步出齊東門(보출제동문)
제나라 도성 동쪽 문밖 길을 걸으며
遙望湯陰里(요망탕음리)
눈 들어 멀리 탕음리를 바라보니
里中有三墳(이중유삼분)
그 가운데 세 무덤이 있구나
累累正相似(누누정상사)
서로서로 모두 비슷하여
問是誰家塚(문시수가총)
이 무덤이 뉘의 무덤인지 물으니
田開古冶子(전개고야자)
전개강과 고야자의 무덤이라 답하네
力能排南山(역능배남산)
힘은 능히 남산을 지고
文能絶地紀(문능절지기)
지략은 능히 지기를 끊을만 했으되
一朝中陰謀(일조중음모)
하루아침에 모략에 휘말려
二桃殺三士(이도살삼사)
두 복숭아가 세 장사를 죽였다 하네
誰能爲此謀(수능위차모)
그 어떤 이가 이런 꾀를 내었을까.
國相齊晏子(국상제안자)
제나라 재상 안자였다네
양보음의 다른버전
제나라 도성 동쪽 문밖 길을 걸으며
遙望湯陰里(요망탕음리)
눈 들어 멀리 탕음리를 바라보니
里中有三墳(이중유삼분)
그 가운데 세 무덤이 있구나
累累正相似(누누정상사)
서로서로 모두 비슷하여
問是誰家塚(문시수가총)
이 무덤이 뉘의 무덤인지 물으니
田開古冶子(전개고야자)
전개강과 고야자의 무덤이라 답하네
力能排南山(역능배남산)
힘은 능히 남산을 지고
文能絶地紀(문능절지기)
지략은 능히 지기를 끊을만 했으되
一朝中陰謀(일조중음모)
하루아침에 모략에 휘말려
二桃殺三士(이도살삼사)
두 복숭아가 세 장사를 죽였다 하네
誰能爲此謀(수능위차모)
그 어떤 이가 이런 꾀를 내었을까.
國相齊晏子(국상제안자)
제나라 재상 안자였다네
양보음의 다른버전
〈양보음(梁甫吟)〉은 초(楚)나라 지방의 악부곡(樂府曲) 이름으로, 〈양보음(梁父吟)〉이라고도 한다.[1] 양보(梁甫)는 즉 양보(梁父)로 태산(泰山) 아래에 있는 작은 산 이름인데, 사람이 죽으면 이 산에 매장하였기 때문에 장가(葬歌)로 불리기도 한다. 지금 제갈량과 이백이 지은 두 가지의 〈양보음〉이 전해지는데, 제갈량은 춘추 시대 제(齊)나라 재상 안영(晏嬰)이 공손첩(公孫捷), 진개강(陳開疆), 고야자(顧冶子) 세 명의 용사(勇士)에게 복숭아 두 개를 가지고 서로 다투게 하여 끝내 모두 자살하게 만들었던 안타까운 일을 서술하였고, 이백은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과 역생(酈生)을 거론하며 지사(志士)가 포부를 실현하지 못하는 비분강개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무릎을 끌어안고 불렀다 하여 포슬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고사(高士)의 울울한 심회가 담겨 있다고 한다.
세 장사는 공손접, 전개강, 고야자로서 공손접은 범과 멧돼지를 한칼에 죽였고, 전개강은 대군을 이끌고 적군을 수차례나 무찔렀으며, 고야자는 임금의 말을 물고 황하 속으로 헤엄쳐들어가는 큰 거북을 쫓아들어가 거북이와 격투하여 끝내 그를 죽임으로서 하백으로까지 불렸던[2]용사다. 이 셋은 절친한 친구로서 걸출한 무략과 신의로 제나라 경공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들의 위세는 참으로 대단하여, 당시 재상이었던 안영조차도 어찌하지 못할 정도였다 한다.
그러나 제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하던 안영은 이들의 위세가 제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해가 된다 여기고, 마침 고야자가 어디로 나가 없는 동안, 질좋은 복숭아 두 개를 경공에게 올려 이를 가장 뛰어난 두 용사가 나누어 먹도록 하시라고 주청하였다. 이에 전개강과 공손접은, 자신들의 용략이 하늘을 찌르기 때문에 마땅히 자신들이 그의 주인이라고 여기고 이를 먹어 버렸는데, 마침 돌아와 이 사실을 안 고야자가 이를 규탄하자, 잘못을 깨달은 두 사람은 자결하였고, 이에 상심한 고야자 또한 자결하고 말았다. 이후 안영은 명장 사마양저를 이 세 사람의 후임으로 제 경공에게 천거하고, 제나라는 안영과 사마양저의 활약으로 부흥을 이루게 된다.
이런 줄거리를 지닌 이 노래는, 듣기에 따라서 목숨을 잃은 세 장사를 기리며 안영을 비웃는 노래가 될 수도 있겠고, 또는 안영의 지략을 노래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양보음은 흔히 제갈공명이 지었다 알려져 있기도 했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 전승되어오던 노래로, '양보음'이라는 제목의 어원인 '양보'가 사람의 죽음을 관장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죽은 이를 장사지낼 때 부르는 만가(晩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제갈공명의 아버지 제갈규가 한때 태산군의 승이었고, 이 일대가 제나라의 수도였던 임치에 가까웠기 때문에, 어린 제갈량이 아버지와 함께 이 일대를 방문했을 가능성이 크고, 그때 아마도 이 지역의 민요였던 양보음을 듣게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가 소년 시절에 고향을 떠났고 평생 귀향하지 못했음을 생각하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그 지역 민요를 부른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제갈량은 어려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여의고 숙부의 손에 자라면서 부침많은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어려서 상을 많이 당했기에 아마도 만가로 불리던 이 양보음이 귀에 배어 입에도 자연스레 붙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3살 때 어머니를 잃고, 8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지할 곳이었을 숙부조차도 그가 20세가 되기 전에 죽었다.
그렇다 하여도, 젊은 사람이 키는 크지만 여윈 체격에 낯빛은 창백한데[3] 읊는 노래는 또 장례치를 때 부르는 노래라니, 이래서야 사람들이 범상치 않게 여기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여러분 주변에 키 크고 얼굴 하얗고 허우대 멀쩡한 총각 하나가 천날만날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나 '이제 가면 언제 오나'를 휘파람으로 불어제끼며 다닌다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엔 '범상치 않게 여겼다'는 말이 어떻게 여겨졌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학자마다 이 노래를 부른 의미를 달리 해석하는데 학경,郝經,(1223∼1275)은 '아마도 한(漢)말 명사들이 종종 타인으로 인해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환관과 적신(賊臣)의 금고(禁锢) 때문에, 죄다 그들의 절조가 땅에 버려졌다가, 한이 마침내 망한 까닭에, 은거하며 일어나지 못함을 슬퍼한 것이다.'이라고 했고 노필,盧弼,(1876∼1967)은 '그냥 제갈량이 심심해서 부른 거 같은데?' 라는 의견을 냈다.
이 노래의 의미는 아무리 뛰어나도 국정 방향에 맞지 않으면 제거되어야 한다는 냉정한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위연 등 여러 인재들이 비록 유능하기는 하지만 그의 구상에 맞지 않기 때문에 쓰지 않거나 의견을 무시하는 등 박대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런 태도가 양보음에서 필요 없는 인재들을 제거하는 가르침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의도에 어울리지 않으면, 없애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