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안봉익(安鳳翼) |
생몰 | 1896년 2월 20일 ~ 1951년 8월 19일 |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
사망지 | 경상북도 영주시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안봉익은 1896년 2월 20일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유연성, 유동수, 이강욱(李康郁), 홍명성(洪明聖), 박재식, 유교희, 박진선(朴晋先), 유곡란(柳谷蘭)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일 계획을 세우고 3월 21일 임동면 중평동 편항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윽고 3월 21일 오후 2시, 편항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주재소에서 2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주동자인 유연성과 배태근(裵太根)을 체포하려 하자, 그는 군중과 함께 일본 경찰들에게 달려들어 주재소로 쫓아버렸다.이후 그가 군중과 함께 편항주재소로 달려가 시위를 전개하자,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했다. 이에 그는 분노한 군중과 함께 주재소의 유리창, 책상, 의자를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했다. 또 경찰로부터 빼앗은 대검과 소냉에 비치되어 있던 장총, 칼, 탄환, 제복 등을 거둬 우물 안에 버렸다. 이때 2명의 경찰이 신덕리 방향으로 도망하자, 그는 이를 추격하여 한 명을 도중에 붙잡아 구타했다. 그후 그는 군중과 함께 경찰관의 사택도 습격하여 완전히 파괴했고, 경찰 가족들은 모두 피신했다.
오후 5시, 안봉익은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류를 파기했다. 자정부터는 파괴해 버린 주재소의 판자로 모닥불을 피워가며 이튿날 새벽 3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자진 해산했다. 편 급보를 받은 안동경찰서에서는 오전 5시, 순사부장 1명과 일본군 하사 이하 8명을 파견하여 대대적인 검거 작업을 펼쳤다. 결국 그는 체포되었고, 1919년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 건조물 손괴, 가택 침입, 상해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는 영주시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51년 8월 1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안봉익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