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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피를로/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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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브레시아 칼초3.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4. AC 밀란
4.1. 2001-02 시즌4.2. 2002-03 시즌4.3. 2003-04 시즌4.4. 2004-05 시즌4.5. 2005-06 시즌4.6. 2006-07 시즌4.7. 2007-08 시즌4.8. 2008-09 시즌4.9. 2009-10 시즌4.10. 2010-11 시즌
5. 유벤투스 FC6. 뉴욕 시티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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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드레아 피를로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이다.

2. 브레시아 칼초

피를로는 롬바르디아브레시아 현의 대대로 이어져 온 재벌가에서 태어났고, 유스 시절부터 리더를 맡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1] 1995년 브레시아 칼초에서 16세의 나이에 데뷔한 피를로는 브레시아의 세리에 A 최연소 데뷔 기록을 갱신했다.

3.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피를로는 1998년 인터 밀란으로 이적하게 된다. 하지만 주전 경쟁에 밀려 레지나 칼초, 다시 브레시아 칼초로 임대된다. 원래 공격형 미드필더였던 피를로는 노장이지만 아직 실력이 죽지 않았던 어린시절의 우상 로베르토 바조에 밀려 여기서도 후보로 밀릴 위기에 처했지만, 피를로의 패스를 눈여겨본 카를로 마초네 당시 브레시아 감독이 후방에서 플레이메이킹을 해보라는 제안을 받고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피를로 축구인생에 신의 한수가 된다.

4. AC 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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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400경기 41골 70도움
임대생활을 마친 피를로는 2001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인터 밀란에서 AC 밀란으로 이적한다.

4.1. 2001-02 시즌

후이 코스타가 있던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수비형 미드필더, 레지스타로 보직 변경 후 이적한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의 공백을 우려하던 시각을 불식시키며 밀란의 주전으로 뛰면서 기량이 급성장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1/02 시즌: 29경기 2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18 7 11 2 3
유로파 리그 9 4 5 0 1
코파 이탈리아 2 2 0 0 1
합계 29 13 16 2 5

4.2. 2002-03 시즌

시즌 전에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 아주리의 일원으로 참가하지는 못했다. 다만 포텐이 터지기 시작하는 유망주에 불과하던 때이니 월드컵 우승후보이자 전성기의 이탈리아 국가대표에 승선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언더독이었던 한국에게 일격을 맞으며 16강에서 탈락을 하며 결과적으로 피를로의 불참가는 아쉬움을 남겼다.

02-03 시즌에도 밀란의 주전으로 활약하며 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에 기여했다.

2002/03 시즌: 42경기 9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7 21 6 9 7
챔피언스 리그 12 10 2 0 0
코파 이탈리아 2 1 1 0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1 1 0 0 0
합계 42 33 9 9 7

4.3. 2003-04 시즌

03-04 시즌에도 여전히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밀란과 아주리의 레귤러가 될 자격이 있음을 보였고 밀란은 스쿠데토를 획득했다. 왕성한 활동량과 적지 않은 경기 출장 수를 보여 놀라움을 선사했다.

2003/04 시즌: 44경기 8골 8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2 31 1 6 7
챔피언스 리그 9 9 0 1 0
수페르코파 1 1 0 1 0
슈퍼컵 1 1 0 0 0
인터컨티넨탈컵 1 1 0 0 1
합계 44 43 1 8 8

4.4. 2004-05 시즌

04-05 시즌엔 챔피언스 리그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결승전에서 충격적인 역전패로 준우승에 그쳤고 리그에서도 2위에 그쳐 스쿠데토 역시 얻지 못했다. 피를로는 이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이스탄불에서의 패배를 오랫동안 잊지 못했던 듯하다. 은퇴할 생각도 했었을 정도라고 한다.

2004/05 시즌: 43경기 5골 10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0 26 4 4 6
챔피언스 리그 12 12 0 1 4
코파 이탈리아 1 0 1 0 0
합계 43 38 5 5 10

4.5. 2005-06 시즌

05-06 시즌 클럽에서도 역시 뛰어난 활약을 했으나 챔스, 리그 양쪽에서 모두 타이틀을 얻지는 못하였다. 이때 리그에 어마어마한 악재가 있기도 했다.

이때의 피를로는 여러 시즌에 걸쳐 소속팀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왕성한 활동량에도 부상도 적었으니 피를로에 대한 평가는 상한가를 치고 있었다 해야 할 것이며 당대 동포지션 최고의 선수로 여겨질 정도였다. 실제로 그는 월드컵과 클럽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FIFA FIFPro 월드 XI를 수상하기도 했다.

2005/06 시즌: 49경기 5골 6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3 31 2 4 5
챔피언스 리그 12 12 0 1 1
코파 이탈리아 4 0 4 0 0
합계 49 43 6 5 6

4.6. 2006-07 시즌

시즌 전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 대단한 활약을 선보이며 팀의 우승을 이끌내며 절정의 폼을 자랑했다. 하지만 부상에 대한 우려도 받게 되었다.

2006-07시즌에서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2년전 리버풀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하며 우승을 차지해낸다. 팀의 에이스였던 카카는 발롱도르를 수상하고 그의 옆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피를로는 2007년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5위, FIFA 올해의 선수 시상식에서 7위를 기록하는 명예를 누린다.

하지만 06-07 시즌 이후로 밀란의 스쿼드에 노쇠화가 시작됐고 제대로 된 리빌딩을 하지도 못했다. 비록 당시도 이미 예전만큼의 강력함을 보이지 못하고 노쇠화가 진행되던 시기였으며 밀란의 피를로에 대한 의존도도 당시에 이미 매우 컸으며, 결정적으로 여름 이적시장에서 첼시로 보낸 팀의 간판 공격수 안드리 셰브첸코의 공백을 제대로 메꾸지도 못했다.[2]

2006/07 시즌: 52경기 3골 10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4 31 3 2 8
챔피언스 리그 12 11 1 1 1
코파 이탈리아 4 4 0 0 1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0 0
합계 52 48 4 3 10

4.7. 2007-08 시즌

밀란이 07-08, 08-09, 09-10 세 시즌간 실망적인 모습을 보일때에도 피를로는 왕성한 활동량과 존재감을 보였으며 명불허전이라는 말을 실감케했다. 다만 이 기간 동안 휴식이 부족하여 거의 혹사에 가깝게 뛰며 피를로의 컨디션에 따라 팀 전체의 경기력이 달라진다거나 직접 프리킥 성공률이 낮아진다거나 피를로를 향한 압박에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여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2007/08 시즌: 45경기 5골 1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3 31 2 3 7
챔피언스 리그 8 8 0 2 4
코파 이탈리아 1 1 0 0 0
클럽 월드컵 2 2 0 0 0
슈퍼컵 1 1 0 0 1
합계 45 43 2 5 12

4.8. 2008-09 시즌

08-09 시즌에는 근육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뛰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팀의 주축들의 노화로 노인정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부진을 겪었고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낸다. 이 시즌 종료 후 밀란의 전성기를 이끈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이 첼시로 떠나게 된다.

2008/09 시즌: 29경기 2골 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6 26 0 1 3
유로파 리그 3 3 0 1 0
합계 29 29 0 2 3

4.9. 2009-10 시즌

09-10 시즌에는 30대에 접어들었음에도 노인정으로 전락한 밀란의 스쿼드때문에 노예 수준의 혹사를 당하며(거의 전 경기를 풀타임 출장했으며 거의 매경기 활동량도 적지 않았다.) 예전 만큼의 폼은 보여주지 못하였다. 여전히 롱패스는 일품이지만 프리킥의 경우에는 정확도가 많이 떨어진 것이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이시즌 안첼로티가 밀란을 떠나고 레오나르두 아라우주가 감독에 부임해서도 피를로는 부동의 주전을 꿰찼으나, 레오나르두 역시 성적부진이라는 베를루스코니의 개소리[3]로 경질시켜 버리며 팀은 위기를 겪게 된다.

2009/10 시즌: 43경기 1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4 33 1 0 5
챔피언스 리그 8 8 0 1 0
코파 이탈리아 1 0 1 0 0
합계 43 41 2 1 5

4.10. 2010-11 시즌

06-07 시즌부터 워낙 혹사를 당해와서 폼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지만, 처진 플레이메이커 포지션에서 피를로와 동급 혹은 능가하는 선수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피를로가 빠졌을 때 대체자를 구하기보단 전술을 고쳐야 할 정도로 존재감이 대단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실패했고, 밀란이 세대교체를 위해 피를로를 놓아주는 원인이 된다.

단적인 예로, 남아공 월드컵 슬로바키아전때 피를로가 투입되자마자 공격의 활로와 볼배급이 원활해졌다. 피를로가 부상만 아니였다면 이탈리아가 토너먼트 진출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사비 알론소가 피를로와 스타일이 비슷하지만, 완전 대체가 가능할 정도는 아니다. 그 전에 현대축구에서 피를로와 같은 처진 플레이메이커를 기용하기 힘든 것도 그 원인. 중원 압박이 갈수록 거세지는 현대축구에서 보디가드(가투소, 암브로시니)를 두고 경기를 조율하는 처진 플레이메이커는 유용할 만큼의 플레이를 해 주는 선수는 정말 찾기 어렵다. 샤비 알론소는 피를로보다 천재성과 킥력, 세밀함과 탈압박은 모자라지만 몸싸움, 수비적인 측면에서는 보다 뛰어나 보디가드 및 여러 역할들도 맡을 수 있다.

이 시즌, 칼리아리에서의 호성적을 바탕으로 떠오르는 젊은 감독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가 부임하면서 피를로의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알레그리는 피를로같은 레지스타보다는 안토니오 노체리노, 케빈 프린스 보아텡, 설리 문타리. 마르크 판보멀같이 활동량 좋은 미드필더를 선호하였고, 10-11 시즌 겨울 이적시장에서 판 보멀이 영입되자 주전에서 밀리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타팀에서 쩌리취급받던 보아텡, 문타리, 노체리노는 당시 팀의 에이스였던 즐라탄과 환상적인 케미[4]를 선보였으며, 보멀은 명불허전의 실력을 보이며 다시금 밀란의 미드필더진에 무게를 더했다.[5]

결국 10-11 시즌 밀란은 7년 만에 스쿠데토를 탈환했지만, 유벤투스 FC에서 영입한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3년 계약이며 밀란은 세대교체가 필요한 상황에서 피를로를 내줄 수도 있고, 피를로 본인도 이적을 고려중이라고 한다.

2010/11 시즌: 25경기 1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17 12 5 1 3
챔피언스 리그 5 5 0 0 0
코파 이탈리아 3 2 1 0 1
합계 25 19 6 1 4

5. 유벤투스 FC

파일:pirlo_Juve.jpg
통산 163경기 19골 38도움
결국 10-11 시즌이 끝나고 10년간 뛰었던 밀란을 떠나 유벤투스로 이적하였다. 계약기간은 3년.

5.1. 2011-12 시즌

이적 후 부활의 개가를 울리며 데뷔 시즌부터 팀의 에이스로 빛나고 있다. 유베는 피를로의 창조적인 패스와 움직임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중원의 키플레이어를 얻었다. 델피에로가 맡아 차던 킥도 사실상 전담해가며 차는 중이다.[6]

11-12 시즌 유벤투스는 도움왕에 오른 피를로의 활약에 힘입어 클럽 역사상 최초로 무패 우승을 달성한다. 코파 이탈리아도 무패로 결승에 진출했기 때문에 사상 초유의 무패 더블까지 노렸지만 나폴리에게 패해 무산. 이 활약으로 피를로는 커리어 처음으로 세리에A 올해의 선수상을 받게 된다.

2011/12 시즌: 41경기 3골 1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7 37 0 3 14
코파 이탈리아 4 4 0 0 0
합계 41 41 0 3 14

5.2. 2012-13 시즌

12-13 시즌에도 여전히 유베의 간판 에이스로 활약, 과거 밀란에서의 혹사로 떨어졌던 프리킥 정확도가 다시 상승하여 시즌 초반임에도 꽤나 많은 수의 프리킥 골을 성공시켰다. 메시가 피를로의 프리킥을 참고해서 골을 기록하고, 서로 인터뷰로 존경을 표시하는 훈훈한 일화도 있었다. 최근 아탈란타전에서 또 골을 성공시켜 본인의 한시즌 최다 프리킥 골 타이를 기록, 소속팀 유베는 리그 2연패를 달성했고 피를로도 2년 연속 세리에A 올해의 선수에 선정.

그러나 챔스 8강에서 만난 FC 바이에른 뮌헨이 강력한 중원 압박으로 피를로를 봉쇄하는 전술을 들고 나오면서 피를로에 대한 해답이 보이기 시작했고, 유벤투스도 합산 스코어 4-0의 완패를 당한다. 이제 거의 모든 구단들이 對유벤투스전에서는 중원 세명으로 피를로 묶기라는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해 유벤투스의 안그래도 암걸리는 공격진에 빨간 불이 켜졌다. 그만큼 피를로의 존재감이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엄청나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7] 하지만 이 때 바이언은 트레블을 달성한 팀이고 경기력 자체에서 유베가 완전히 압도당하는 양상이었기 때문에 피를로 혼자서 어떻게 해 볼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천하의 메시조차 아무것도 못하게 만든 팀이 아니던가?[8]

2012/13 시즌: 45경기 5골 1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2 32 0 5 7
챔피언스 리그 10 10 0 0 3
코파 이탈리아 2 0 2 0 0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 1 0 0 1
합계 45 43 2 5 11

5.3. 2013-14 시즌

13-14 시즌에도 유베의 역대 최다 승점 우승(102점)을 이끌면서 개인 통산 3번째 세리에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다. 3년 연속 수상은 역대 최초였다.

2013/14 시즌: 45경기 6골 8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0 29 1 4 7
챔피언스 리그 5 5 0 0 1
유로파 리그 8 7 1 2 0
코파 이탈리아 1 1 0 0 0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 1 0 0 0
합계 45 43 2 6 8

5.4. 2014-15 시즌

14-15 시즌 들어서는 수비적으로 도움이 거의 안되고 있다. 그래도 비달의 트레콰르티스타 기용과 마르키시오가 수비적으로 많이 보조를 해주면서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전 시즌에 비해 패스 미스가 늘고 압박이 거세게 들어오면 공을 뺏기는 모습이 자주 나오고 있다. 자리가 자리인만큼 위험도가 많이 큰편. 부상으로 출장 못하던 때도 있었지만, 중요한 경기에 선발로 출전해 교체되어 나가거나 때론 풀타임으로 출장하며 유베에 있어 여전히 중요한 선수라는 것을 입증했다.[9] 유베가 챔피언스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피를로가 다시 한번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레알 마드리드와의 4강전이 그 계기인듯. 유베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진출해서 바르샤와 트레블을 다투게 되었다. 피를로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풀타임 출장했으나, 경기력은 저조했고 팀은 3-1로 패배해 준우승에 그쳤다. 피를로는 이 경기가 끝나고 눈물을 보였는데,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흔히 오지 않는, 자신에게 너무 아쉬운 기회여서 그랬다고 하며 교체로 잠시 나와 다시 우승한, 이제 곧 팀을 떠날 바르샤의 주장 차비와 풀타임으로 출장해 준우승한 피를로가 대조되기도 했다. 다만 피를로 역시 이후로 유벤투스를 떠날 것으로 보였으나, 챔스 결승전을 다시 경험한 이후로 생각이 조금 바뀐듯. 앞으로 있을 유로 2016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피를로를 플레이메이커로 기용한 이탈리아는 스페인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팀이었다. 유로 2008때 스페인과 8강전에서 치열한 0-0 무승부 끝에 승부차기로 패한 것도 그렇고,[10] 2011년 8월 10일에 벌어진 평가전에서도 피를로가 대활약하며 2-1로 승리를 거뒀다. UEFA 유로 2012에서도 스페인vs이탈리아의 조별 예선 경기는 팽팽한 긴장감과 전술싸움, 화려한 경기력으로 대회 최고 명경기로 꼽힌다.[11] 여기까지는 좋았던 장면이고 결승전은 이것저것 악조건이 겹치는 바람에 대차게 털렸지만. 스페인의 감독 델 보스케는 이 당시 스페인의 대승에 대해 이탈리아가 휴식이 부족해 지친 덕분이라 말한바 있다. 그리고 2013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도 이탈리아는 스페인에게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다.

2014/15 시즌: 33경기 5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0 19 1 4 5
챔피언스 리그 10 10 0 1 0
코파 이탈리아 2 2 0 0 0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 1 0 0 0
합계 33 32 1 5 5

15-16 시즌 MLS 뉴욕시티로 이적이 유력해지고 있다. 뉴욕 시티 홈페이지에서 21번 등번호가 부여된 사진이 올라왔으나, 바로 삭제되었다. 유벤투스 스토어에서도 이름이 빠진 것으로 보아, 발표만 안 되었을 뿐, 이적 확정인걸로 보인다.

6. 뉴욕 시티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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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6일자로 이적이 확정되었다. 입단 직후 바로 트레이닝 캠프에 합류하였으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까지 뛰고 왔기 때문에 일단은 휴식을 취한 뒤 7월 26일 올랜도 시티와의 홈경기에서 MLS 데뷔전을 치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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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6일 올랜도 시티와의 경기에서 홈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후반 교체 출전으로 데뷔하였다. 그리고 5:3 승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특히 뉴욕 시티는 미드필더진에서 상대팀의 압박에 눌리는 모습이 약점으로 지적받고 있었는데 피를로는 상대의 압박을 가볍게 피하면서 특유의 킬패스 한 방으로 곧바로 역습으로 전환시키는 등 클래스를 입증하였다. 7월 26일 경기에서 뉴욕 시티의 3번째 골과 4번째 골은 사실상 피를로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 후 몬트리올 임팩트, 뉴욕 레드불스와의 경기에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다가 8월 14일 DC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다비드 비야의 골을 어시스트 하는 등 간만에 클래스 입증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깊숙이 내려와 빌드업 과정에도 참여하고 킬패스와 중거리슛, 가끔은 최전방까지 치고 올라오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전체적으로 고령의 나이와 14-15 시즌 세리에 A를 풀로 치루고 오면서 따른 체력적인 문제 때문인지 몇몇 번뜩이는 모습을 제외하곤 경기에서 지워지는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최근엔 체력을 어느정도 회복했는지 골도 넣어주고 있지만,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여전하다.

현지에서 "피를로는 팀에 반드시 필요한 선수가 아니다. 이 돈 주고 데려올 필요는 없었다."라는 칼럼까지 나왔을 정도였으며 2017년 12월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


[1] 피를로의 아버지는 두 개의 제철소를 소유하고 있으며, 형 이반은 브레시아에 있는 세리에 C2 소속의 클럽에서 뛰었다.[2] 본래 밀란의 공격수 플랜 1순위는 칼치오폴리로 강등된 유벤투스의 주전 공격수 즐라탄이였고, 즐라탄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인테르가 즐라탄 영입에 참가, 때마침 언더독 기질이 발동하여 인테르로 가버렸다. 결국 차선택으로는 레알 베티스에서 나름 활약을 보여줬던 브라질 출신의 히카르두 올리베이라를 영입했는데 시즌 시작전부터 비판이 엄청났고, 모두의 예상대로 데뷔전 및 초반 반짝후 제대로 폭망했으며, 질라르디노 역시 카카의 미끼로 쓰이느라 파르마 시절의 파괴력이 줄어버렸고, 인자기는 잔부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겨울 이적시장에서 카펠로에게 버림받은 호나우두를 영입하며 공격진이 안정된다.[3] 09-10 시즌 레알에 카카를 판 6,800만 유로 중 일부인 2,000만 유로로 팀 스타일과는 상극인 훈텔라르나 쩌리들만 업어와준 주제에 3위의 성적을 기록해놨더니 성적부진이랍시고 경질시켜버렸다. 그 전에 레오나르두도 예스맨은 아니라 베총리와의 불화가 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4] 특히 노체리노는 시즌 10골을 기록하는 등 의외의 영입 수완으로 꼽혔다. 물론 보아텡은 공격전개도 못하고 조율도 못하고 패스도 못하고 공만 뻥뻥 날리는 즐라탄빨 스텟귀신이라 무지하게 까였지만 나름 쏠쏠하게 활약하였다. 사실 밀란 공미의 전임자들이 카카, 루이 코스타, 보반, 리베라등 쟁쟁한 선수들이였기에 더 까인감이 없진 않다.[5] 암브로시니가 매우 준수하긴 했지만 기복이 있던 편이고, 가투소는 09-10 시즌의 부상으로 폼이 나락으로 떨어져 08-09 시즌 뮌헨의 오퍼를 받고 팔았었어야 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쩌리로 전락한 상태였다.[6] 이건 델피에로가 노쇠해서 출장시간이 많이 줄어든 탓도 크다. 혹사당한다는 얘기도 있는데, 유럽 대회가 없는 까닭에 혹사까지는 아니다.[7] 피를로를 상대한 팀들은 경기 전에는 '피를로를 막아야 한다' 경기 후에는 '피를로를 막아냈다 혹은 피를로를 막아내는데 실패했다'하는 인터뷰를 항상 한다. 대표적으로 당해 챔스 뮌헨전 전후의 하인케스 인터뷰.[8] 물론 메시는 그때 부상으로 컨디션이 엉망이었다는걸 감안해야 한다. 또한 그 당시 바르셀로나는 팀이 정상이 아니었다.[9] 물론 비달과 포그바, 무엇보다 마르키시오와 테베스의 뛰어난 플레이가 있었다.[10] 이게 대단한 게 이 대회에서 스페인은 우승까지 차지한 것 뿐만 아니라 엄청난 파괴력으로 상대팀들을 몰아붙이는 막강한 팀이었다. 조별리그에서 독일 월드컵 우승팀 이탈리아, 준우승팀 프랑스를 각각 3-0, 4-1로 대파하며 강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되던 네덜란드를 꺾고 4강에 오른 러시아는 힘 한번 못쓰고 3-0으로 완패했으며, 독일은 발락을 중심으로 승승장구했던 팀 답지 않게 경기력에서 완벽하게 밀리며 패배했다.[11] 이 경기는 21C 이래 FIFA 회원국끼리의 국가대표팀 경기 중 내용면에서 최고의 경기로 종종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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