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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노 요시히코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아미노 요시히코
Yoshiko Amino | あみの よしひこ
파일:아미노 요시히코.jpg
본명 網野善彦
출생 1928년 01월 22일
일본 야마나시현 히가시야쓰시로군 미사카쵸
사망 2004년 02월 27일 (향년 76세)
일본 도쿄도
국적 일본
학력 시라카네 초등학교 (졸업)
구제 도쿄 고등학교 (졸업)도쿄대학 문학부 (국사학과)
배우자 나카자와 마치코
자녀 아미노 테츠야, 아미노 후사코, 아미노 아키라

1. 개요2. 약력3. 활동 및 평가4.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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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 1928년 1월 22일~2004년 2월 27일)는 일본의 역사학자이다. 전공은 일본 중세사이며 야마나시현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자랐다.

2. 약력

에도 시대부터 지주였던 아미노 가문의 당주 카츠마루의 막내아들로서 야마나시현 히가시야쓰시로군 미사카쵸[1]에서 태어났다. 증조부인 아미노 젠에몬은 기업인인데, 그가 창업한 아미노 은행은 현재 야마나시 중앙은행의 전신 중 하나이다. 아버지 카츠마루는 고슈 시 시오야마의 유서깊은 집안 출신[2]으로 대의원도 맡고 있던 히로세 히사마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아미노 가문으로 입양된 인물이다. 히사마사의 장남인 히로세 히사타다는 요시히코의 숙부에 해당한다. 히로세 히사마사는 히사마사는 우파 정치인이었으며 히사마사의 셋째 아들 나토리 타다히코도 전쟁 전에는 야마나시현 익찬회 단장이었다. 요시히코의 어린 시절에는 이러한 우파적 정치 환경이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유년기에 도쿄시 아자부구 사쿠라다쵸(現 도쿄도 미나토구 니시아자부)로 이주했다. 시라카네 초등학교 졸업 후 1940년 구제 도쿄 고등학교(現 도쿄대학 부속 중학교)에 입학한다. 이 무렵의 친구로는 우지이에 세이이치로[3], 시로츠카 노보루[4], 마스다 요시오[5]가 있다.

구제 도쿄 고등학교 고등과 문과를 졸업한 후 1947년 도쿄대학 문학부 국사학과에 입학해 1950년 3월에 졸업한다. 같은 해 4월부터 시부사와 케이조[6]가 주재하는 재단법인 일본 상민문화연구소에서 근무했다.

1954년 예산 중단으로 인해 연구소에서 사임되었고, 이듬해 4월부터 나가하라 케이지[7]의 도움으로 도쿄도립 키타조노 고등학교의 일본사 담당 시간강사로 근무, 같은 해 5월에는 일본 상민문화연구소 동료였던 나카지마 마치코와 결혼한다.
1956년 6월, 정식 교사가 되어 일본사 수업 외에도 사회 과학 연구회[8] , 부락 해방 연구회 등의 고문을 맡는다. 고등학교에 근무하면서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 다니며 고문서를 필사했고, 1966년에 「중세장원의 양상(中世荘園の様相)」을 저술했다.

1967년 1월 키타노조 고등학교를 퇴직하고 2월에 나고야 대학 문학부 조교수로 취임하며 나고야로 이사간다. 1973년에는 중세사 연구회 발족에 참여하였다.

1978년에 저술한 「무연·공계·악(無縁・公界・楽)」이 학술서로써는 이례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1980년 10월에는 가나가와 대학 단기대학부 교수가 되었으며, 1993년 4월에 가나가와 대학 대학원 역사민속자료학 연구과를 개설해 이후 1995년부터 경제학부 특임교수가 된다.

1998년 3월에 정년퇴직하였으며 2000년 3월 자신이 폐암이라는 것을 알고 투병생활에 들어간다.

2004년에 도쿄도의 병원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3. 활동 및 평가

  • 중세 시대의 상공업자와 예술인 등 농민 이외에 비주류였던 표백인의 세계를 밝히고, 천황을 정점에 세운 채 농경민들의 균질한 국가로 여겨져 온 그간의 일본상에 의문을 제기해 일본 중세사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 중세에서 근 세에 걸쳐 역사적으로 백선 신분에 속한 자들이 결코 농민뿐만이 아니며 상업, 수공업과 같은 다양한 생업 종사자들도 포함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학설에는 아라키 모리아키와 같은 학자들의 비판도 따른다.
  • 일본 사학에 민속학부터 접근해 학제간 연구기법을 도입하였다.[9]
  • 아날학파의 대표적 역사학자인 페르낭 브로델의 저작과 관련해 「바다에서 본 역사-브로델의 ‘지중해’를 읽다」를 니노미야 히로유키[10]와 함께 저술했다.
  • 마루시마 카즈히로는 아미노의 연구가 “전혀 주류가 아니며 대부분의 학설이 ‘지나치다’고 부정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동시에 아미노의 연구는 아미노가 설정한 균형이 있어 성립한 것으로 무비판적으로 계승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고 얘기했다.

4. 영향

  • 중세사가 이토 마사토시는 아미노의 무연 개념을 발전시켜 중세의 사찰세력이 조정[11]과 무가정권[12]에 대항한 거대한 하나의 성역[13]이며 사찰세력 개념에 의해 농업중심사관이 더욱 해체된다는 설을 내세우고 있다.
  • 시대소설 분야에도 일부 영향을 미쳐 유명 각본가 류 케이이치로 등은 무대 설정에서 아미노 학설을 폭넓게 도입해 창작하고 있다.
  • 미야자키 하야오도 모노노케 히메에서 농업 이외를 생업으로 하는 서민을 그리는 데 있어 아미노의 사관에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작품에 대해서 아미노 본인도 “많이 공부한 후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평가했으며 나중에 대담도 하고 잘못도 지적했다.
  • 아미노의 연구 일부는 비실증적이고 직관적이며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특히 동일본을 ‘이에적 사회(イエ的社会)’[14], 서일본을 ‘무라적 사회(ムラ的社会)’[15]로 하는 동서양분론 중 동쪽의 ‘이에적 사회’론은 실증적인 근거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속학 분야에서는 계속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문제시되고 있다.


[1] 현재의 후에부키시 미사카쵸[2] 텐쇼 시대 이전에 설립된 가문이다.[3] 닛폰 TV 방송망 대표이사 회장, 일본 민간 방송 연맹 회장, 요미우리 신문 그룹 본사 이사, 도쿄도 역사문화재단 이사장, 도쿄 현대미술관 관장등을 역임한 인물이다.[4] 일본의 윤리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도쿄대학 명예 교수였다.[5] 일본의 문화인류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도쿄대학 명예 교수였다.[6] 제 16대 일본은행 총재를 맡았으며 재무대신으로도 역임한 인물이다.[7] 일본의 역사학자이며 히토츠바시 대학과 와코 대학의 명예교수였다.[8] 마르크스주의 연구 동아리이다.[9] 여기서 학제간 연구란 지식이나 개념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내용의 일관성이나 이해의 용이성 등의 관점에서 대상을 한정해 다루는 학문과는 달리 본래 그다지 연결되지 않았던 복수의 학문 분야에 걸쳐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연구에 임하는 것이다. 학제적 연구가 발전하여 체계적인 지식으로 정리돼 새로운 학문 분야를 형성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될 경우 이것은 학제간 연구라고 칭할 수 없게 된다.[10] 니노미야 히로유키는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아날 학파를 일본에 소개한 대표적 인물이다.[11] 천황이 우두머리인 일본의 정권[12] 막부[13] 원문에서는 アジール라고 하는데 독일어로는 Asyl, 영어로는 asylum이라고 불리며 성역, 피난처, 자유영역와 같은 개념의 특수한 영역을 의미한다.[14] 일본어로 집을 의미한다.[15] 일본어로 마을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