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22 18:39:21

신암리


울산 울주군 서생면의 행정리이다.

인구수:2400명

우리 고장의 동부에 위치하고 있는 신암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유물인 즐문토기가 발견된 곳으로 옛날부터 기후가 따뜻하고 또 바다와 접하여 먹을 것이 많았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우리 고장에서는 가장 먼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았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유물은 서울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신암리의 위치를 보면 북으로는 용리가 있고 동남으로 바다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명산리가 있다. 마을은 해안으로 달리는 31호 국도를 기준으로 볼 때 대부분 해안가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이 때문에 마을 뒤로는 해송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앞으로는 바다가 확 트여 있다.
면소재지가 있는 이 지역은 각종 관공서와 금융기관이 들어서 있어 행정의 중심지인 동시에 학교가 많아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현재 신암리에 위치하고 있는 관공서를 보면 서생우체국, 울산수협 서생지소, 서생농협, 서생파출소가 있고 또 서생초등학교와 중학교 등이 있다.
또 이 지역은 일제시대 어업을 크게 일으켰던 수곡상사가 광복이 될 때까지 있었기 때문에 상업 역시 활발했던 지역이다. 당시 수곡상사는 신암리에서 정치망 등 수산업을 크게 했는데 이렇게 해서 생산된 수산물을 부산의 여러 시장에 가져다 팔았다.
신암리는 지금부터 약 천년전에 윤씨(尹氏)가 처음으로 마을을 찾아 들어왔고 그 후 안씨(安氏), 이씨(李氏)가 차례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후 세 성씨의 대표들이 마을이름을 짓기 위하여 의논하고 있는데 그들 앞에 구름 같이 희고 큰 바위가 보여 그 바위 모양을 따서 구름 '운(雲)'자와 바위 '암(岩)'자를 따서 운암동(雲岩洞)이라 정하였다고 한다.
그 후 각 성씨들이 계속 모여들어 인구가 늘어나고 마을이 커지자 한 개의 마을을 4개 지역으로 분리하여 부르게 되었는데 이때 생겨난 4개의 마을이 훔턱각단, 솔진개, 새마을, 비학머리 등이다.
훔턱각단은 지형이 움푹 꺼진 곳이라 하여, 솔진개(현 송리)는 소나무 숲이 많이 우거져 있고 앞으로는 갯마을이라 해서, 새마을은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하여 그리고 비학은 인근의 강월 무학동에서 학이 떼를 지어 날아와 살았다 하여 각각 붙여진 이름이다.v 현재 신암리에는 신암, 신리, 비학의 3개 행정마을이 있다. 그러나 이들 마을 중 신리의 일부와 비학 마을 전체가 원전 추가건설 고시지구에 들어가는 바람에 요즘 들어 각종 민원이 그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신암리는 당초 울산군 당시 외남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운곡리, 신생리, 효열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암리로 서생면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1962년 면 전체가 동래군에 편입되어 이 지역도 동래군에 편입이 되었다. 이듬해인 1963년 다시 서생면 전체가 양산군에 편입되어 양산군에 속했다가 1983년 다시 울주군 소속이 되었다.
신암마을

신암리에서 북쪽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나사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이 군령으로 불리었던 것을 보면 군사적으로 요충지대의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이 지역은 한때 구름같이 희고 큰 바위가 많다고 해 운암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를 보여주듯 이 마을에는 과거 서생을 찾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한번씩 둘러보았던 신선암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의 유물인 즐문토기가 발견된 곳도 이 마을이다. 즐문토기가 발견된 곳은 면사무소의 남북 지역으로 남쪽에는 현재 수협이 있는 자리에서 발견되었고 북에서는 서생초등학교 인근에서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1914년 행정 개편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양산군 외남면에 속했는데 당시 외남면 면소재지가 이곳에 있었다. 이 마을은 고려 8대 현종(1009∼1031) 때는 마을 앞이 아름다운 포구였는데 이때 청주 한씨 조상들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변천을 거듭하면서 양산군 외남면에 속했을 당시 마을 이름을 연산동(아리민등 또는 하민등)이라고 하였다.
또 이 마을에서 용리로 가다 보면 동삿재라는 산이 있는데 이 산 부근에는 광복 이후까지 고인돌 30기가 있었으나 마을 사람들이 과수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신암리는 광복 이후 마을의 규모가 비대해져 신암회관을 중심으로 서남쪽은 중리로, 그리고 동북쪽을 송리로 나누려고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그러나 요즘도 이들 두 지역은 지역정서가 달라 친목단체 등이 따로 운영이 되고 있는 형편이다.
마을 사람들은 농업과 어업을 같이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다. 마을 앞 해변은 주로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때문에 해수욕은 할 수 없지만 사철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낚시를 즐기는데 흑돔과 노래미 등이 주로 잡힌다.

이 때문에 내륙에 위치한 마을에 비해 어업이 활발한 이 마을은 일찍이 어촌계가 조직돼 있었다.

대중교통은 715번.405번.기장군3번이 다닌다. 인근에 서생역이 있다.

학교시설은 서생중학교.서생초등학교 가 있다.

이외 신리마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