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신의균(申의均) |
본관 | 평산 신씨[1] |
출생 | 1860년 7월 12일 |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남초동면 예림동 (현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예림리)[2] | |
사망 | 1941년 9월 12일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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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신기균은 1860년 7월 12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남초동면 예림동(현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예림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이후 신기균은 고향 인근 부북면 후사포리에 위치한, 점필재 김종직을 배향한 예림서원(禮林書院)에서 신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유림활동을 했다.1919년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하여 작성된 독립청원서(일명 파리장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세계 만방에 알리려 했던 유림단(儒林團) 사건에 연루, 대구경찰부에 체포되어 고초를 당하였다.
1920년대에 민족주의 운동가들이 전국적 차원에서 민립대학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을 일으켰는데 밀양군 지역에도 이러한 운동이 파급되자 1923년 2월 26일 오전 11시에 박상일 외 50명의 유지들이 모여 밀양물산장려회 발기 총회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에 발기인으로서 참석했다. 그를 비롯한 발기인들은 임시 석장(席長) 박해철의 사회로 제반 사항을 논의하면서 토산품 장려 및 금주·단연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 창립 총회를 3월 11일 육영재에서 개최한 결과 출석 인원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기균이 총재로 당선되었다.
또한 밀양 지역의 교육진흥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3년 3월 11일 육영재에서 밀양교육회가 창립될 때에는 밀양 지역 원로인 박상일, 노상직, 이병희 등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4년 음력 8월 말경, 같은 밀양교육회 고문인 김찬규(金燦奎)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명의의 '군정서 총국장에 임명한다'는 취지의 사령서 1장을 받고서 군정서(軍政署) 국내 운동원이 되었으며, 운동원 임명 등기료 명목으로 30원의 군자금을 제공했다. 그러다가 1926년 1월경 밀양군에서 신석원·송채원(宋彩源) 등과 함께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었고, 그해 3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증빙인멸·다이쇼 8년(1919) 제령 제10호 위반·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이후 1930년 9월경 권총을 밀수입하여 국내에 반입하려다가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941년 9월 12일 별세했다.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