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5 16:11:21

수원 32호 격침 사건

<colbgcolor=#315288> 대한뉴스에 방영된 모습

1. 개요2. 사건 전개3. 사건 이후

1. 개요

1974년 2월 15일 북한 함정에 의해 민간 어선 수원 32호가 격침된 사건이다. 70년대에 북한은 NLL인근에서 우리 선박에 대한 납북을 자주 시도 했으나 수원 32호의 경우처럼 어선을 격침한 예는 흔치 않았다. 또 같이 조업을 하던 수원 33호[1]납북되었다.

2. 사건 전개

1974년 2월 15일 오전 10시 백령도 서쪽 30마일 공해상에서 조업 중[2]이던 수원 32호와 수원 33호에게 북한 함정 1XX[3]가 접근하였다. 수원 32호는 급히 남쪽으로 선회하였으며 수원 33호는 그물을 끌어올리느라 약 5분 후 32호를 뒤따랐다. 그러나 속력이 빠른 북한 함정에게 이내 따라잡혔고 북한 함정은 포를 쏘아 수원 32호의 선미를 타격하였다. 피격 된 수원 32호는 3분여만에 침몰하였으며 수원 32호에 타고 있던 선원 12명은 침몰 순간 모두 바다에 뛰어들어 실종되었고 그 중 김모씨 한 명만[4] 북한 함정에게 로프로 구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함정은 수원 33호에 접근하여 마이크로 뒤따라 오지 않으면 격침시키겠다고 위협하여 따라오도록 하고 북동쪽으로 앞서나갔다. 이후 북한 함정은 구조한 김모씨를 수원 33호에 옮겨 태우려고 30분간 시도했으나 파도가 심해 실패하였다. 당시 파고는 2m에 달했고 강한 남풍과 짙은 안개로 가시거리가 500m도 되지 않을 정도로 기상 상황이 열악했다. 앞서가던 북한 함정은 선수를 남동쪽으로 돌려 항해하다 오후 2시 30분 정도에 항해를 중단하고 수원 33호에게 구조자는 판문점을 통해 귀환시키겠다고 전하고 방향을 돌려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수원 33호가 남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항진한 지 10분 뒤에 다시 다른 북한 함정 9XX[5]함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고 다시 선수를 돌리게 했다. 자취를 감췄던 1XX함도 돌아와 수원 33호를 포위했고 수원 33호는 다시 북동쪽으로 끌려갔다. 북한의 두 함정에는 총을든 인민군이 10여명씩 총구를 겨누며 수원 33호를 감시했다. 결국 1시간 30분 후인 오후 4시 15분 "우리 경비정이 보이지 않는다. 육지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 북동쪽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선장 박모씨의 마지막 절규로 교신은 끊어졌다.

3. 사건 이후

포격과 납치 정황이 비교적 자세히 알려지게 된 것은 당시 수원 33호와 해경무선실과의 교신을 중계했던 남일수산 소속 모란 31호의 선장과 통신장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란 31호는 대청도 근해에서 15일 낮 12시부터 오후 4시 15분까지 조업중이었고 30여 차례에 걸쳐 수원 33호와 해경무선실의 교신을 중계했다. 당시 북한 함정은 포격을 통해 수원 32호를 격침했고 수원 33호는 북한 함정의 위협을 받아 피랍되던 중이었으나 기상상황이 워낙 좋지 않아 접선은 불가 했으므로 납북되어가는 도중에도 지속적인 교신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해상에서 비무장 민간 어선을 포격하고 납북한 명백한 도발 행위였지만 북한은 2월 28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회담에서는 수원 32호를 간첩선이라고 주장했으며 심지어 총 한 발 쏜 적이 없고 수원 32호는 북한 포함에 부딪혀 침몰했다는 억지 주장을 했다. 하지만 동년 3월 3일 2시 15분에 평양방송 대담프로에 수원 32호를 피격한 함정의 승선 병사들을 출연시켰고 이들 '손도국 부대' 소속의 전채근을 위시한 5명은 자신들이 수원 32호를 포격하여 침몰시켰다고 공언하였다. 충돌로 인한 침몰을 주장해 놓고 격침했음을 공인하는 자가당착에 빠진 모습을 보인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납북된 선원들을 송환할 것을 북측에 요구했으나 북한은 수원 32호가 간첩선임을 주장하며 맞섰다. 협상 과정 중 당초 수원 32호의 선원 중 1명만 구조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수명의 선원들이 추가로 구조된 사실이 확인되었고 총 25명의 선원이 피랍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끝끝내 송환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가족들은 이산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후 약 4달 후인 1974년 6월 28일 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이 터진다.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1975년 헨더슨 소령 사건이 있었던 것처럼 점차 북한의 대남 도발이 강도를 더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의 경우 민간인을 상대로 한 북한군의 도발이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 하고 있다.

이후로도 1980년대 말까지 북한에 의한 어민들의 피랍이 이어졌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 1980년대 말까지 어선 462척, 어부 3,677명이 납북되었으며 이 가운데 어선 430척과 어부 3,258명은 송환 되었으나 32척의 어선과 어부 419명은 송환되지 않았다. 그리고 해상 일기 악화 등으로 실종된 줄 알았던 어부들이 북한에 납북된 것으로 후일 밝혀지기도 하는 등 알려진 것보다 피랍된 어부들이 더 있을 걸로 여겨진다. 그래도 대부분의 어선과 피랍 어부들이 송환되긴 하였으나 수원 33호의 경우 민간 어선에 포격을 가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북한 입장에서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우니 피랍 어부들을 송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2014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서 수원 32호의 승조원 최영철 씨가 납북 40여 년만에 형과 상봉했다. #


[1] 15명이 승선해 있었다. 선원 명단에는 12명이 탑승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추후 조사에서 선원 명단에는 없던 승선자 3명이 확인되었다.[2] 저인망 어선으로 홍어를 잡고 있었다.[3] 신문 기사에 블러 처리가 되어 있다. 실제 선박은 100번대 함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4] 수원 33호에 형이 타고 있었고 신원을 확인했다고 한다. 후술 되어 있지만 당초 알려진 것과 다르게 추가로 구조된 선원들이 있었다.[5] 역시 신문 기사상에 블라처리가 되어 있다. 실제 선박은 900번대 함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