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세번째 영화를 찾아왔다면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로.
1. 개요
녹서스를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이다. 녹서스의 젊은 흑인 여성 장교인 이사드 토미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PC 분위기가 짙은 소설이다.2019년 들어 키아나라는 신규 챔피언이 추가되면서 이쉬탈이라는 새로운 지역이 설정에 추가되었다. 그에 따라 이 소설도 이쉬탈 지역 세계관을 다룬 소설에 편입되었다.
2. 본문
2.1. 1막
"일곱 번째입니다." 이사드 토미리가 무덤덤한 목소리와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했다. 오디츠 선장은 책상을 메우고 있는 지도와 보고서에 정신이 팔려 일등 항해사인 이사드의 말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혹은 정신이 팔린 척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짧은 기간이나마 함께 키로냐호를 타고 항해하는 동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방으로 불러 차렷 자세를 취하도록 한 것은 분명 그가 가진 권력의 표출이었다. "최고 사령부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사드가 이번엔 양보하지 않겠다는 투로 말했다. "토미리 사령관, 여기서는 내가 최고 사령부의 대변인이네." 오디츠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자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일곱 번째입니다." 이사드가 반복했다. "최고 사령부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일곱 번을 요청했습니다. 뭘 애원하려는 것도 아니고, 간청하려는 것도 아니고, 약속하기 위해서요." "약속?" 책상 위에 널린 문서를 보던 선장이 마침내 고개를 들어 이사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제국의 영광을 말입니다. 말로든 피를 흘려서든 제국의 영토를 넓히고 원주민들을 데려오겠다고 약속하고 싶습니다. 국경에서는 녹서스의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매일같이 병력이 동원되고 사절이 파견되고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이미 말했을 텐데." 오디츠가 짜증 내듯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도 일곱 번째 말하는 거야. 트리파릭스의 생각을 해석하는 건 최고 사령부의 일이지, 그 수하에 있는 우리가 관여할 사안이 아니야." 이사드의 몸이 뻣뻣해졌다. 불만이 차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후라드 선장이 루우그 해안에서 해적 놈들에게 당했을 때 키로냐호를 승리로 이끈 건 선장님이 아니라 저였습니다. 선원들과 함께 놈들의 배를 나포한 것도 저였고, 마지막 놈까지 소탕했을 때 선원들이 환호하며 부른 이름도 제 이름이었습니다. 그게 '당연'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승리 후에 제가 기대한 건—" "뭐? 자네가? 겨우 굶주린 프렐요드 몇 놈을 잡아 바다에 빠뜨리고선 자네가 나 대신 이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날 뛰어넘어 직접 최고 사령부와의 대화를 요청한 거고." 오디츠 선장은 쥐고 있던 깃펜을 조용히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이사드 쪽으로 덮칠 듯이 다가가자 평생 전장에서 싸우며 얻은 오랜 상흔들이 빛을 받아 드러났다. "토미리 사령관, 원래대로라면 상관에 대한 불손한 태도를 이유로 파면은 물론이고 청산업자 소굴에 내던져 버렸을 텐데." 그가 딱딱하게 말했다. "하지만 하늘이 자네 운명에 개입한 것 같군." 그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이사드에게 휙 건넸다. 두루마리의 봉랍 부분은 뜯겨 있었고, 오디츠 혹은 그의 부하 중 누군가가 이미 내용을 확인한 흔적이 보였다. 그들에게는 그럴 권한이 있었다. "가지고 나가게." 이사드는 잠시 놀란 채로 망설이다가 서신을 집어 들었다. 선장에게 경례한 후 자신의 방으로 서둘러 돌아온 그녀는 서신을 펼치고선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치 도가니의 녹은 쇳물이 가슴에 부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등 뒤로 부는 바람에서 처음으로 신의 섭리를 느꼈다. 드디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도로 오라는 명령이었다. 드디어 그녀에게 명령이 내려졌다. |
2.2. 2막
항구는 인파로 가득했다. 함대 선원들의 옆쪽으로 상인, 무역상, 부두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가며 끊임없이 승선하고 하선했다. 쇠 우리 안에는 희귀한 짐승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투기장에 끌려가거나 귀족들의 관상용으로 팔려갈 운명이었다. 무역선에서는 룬테라 전역에서 실려 온 식자재들이 하적된 후 배분되고 있었다. 이사드의 척박한 고향 땅에 사는 수많은 시민들의 배를 채우기 위함이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생동감으로 가득 찬 항구에는 제국을 넓히고, 풍요롭게 하고, 더 견고히 하는 새로운 문물과 사상들이 흘러들고 있었다. 이 모든 것, 그리고 이곳 너머로 뻗어있는 도시는 불멸의 요새의 그림자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사드는 항구 근처의 길가에서 웅장한 고대 건물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깃발이 휘날리는 탑과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성벽이 보였다. 녹서스의 힘을 과시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타오르는 바로 그 힘이었다. 이사드는 무뚝뚝한 표정과 함께 지휘관으로서의 효율적인 사고방식이 자신을 지배하기 전에 주변의 활기찬 광경을 좀 더 구경하는 시간을 가졌다. 원대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녀는 배가 정박되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사드가 보기에 아르덴티우스호는 다른 과거의 시간대에서 밀려온 배 같았다. 표면의 흔적이 그 역사를 말해줬다. 닳아버린 뱃머리와 뒷갑판의 삐걱거리는 나무판자까지, 선체에는 수십 년을 항해하면서 생긴 상처가 마치 거미줄처럼 곳곳에 나 있었다. 이런 소형 구축함은 키로냐호처럼 더 큰 전함을 호위하는 용도로 사용되곤 했다. 적 전초함의 공격을 대신 받으며 최대한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다하다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운명이었다. 이사드의 눈에는 아르덴티우스호의 운명이 그래 보였다. 갑판 위의 선원들도 별다를 건 없었다. 꾀죄죄한 행색의 남녀 무리가 무질서하게 뒤섞여 일하면서 보급품이나 화물을 싣는 일보다 욕설과 협박을 주고받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선원들의 수는 다 합쳐 60명이 채 안 되었다. 이사드는 이를 드러내며 혐오감을 내비쳤다. 그녀는 냉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가 받은 지원은 형편없었지만 상관없었다. 하찮은 도구로 이뤄낸 정복은 더 가치 있을 것이었다. "거기 당신." 이사드가 모여있는 선원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현장 관리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가죽 방한 외투의 깃을 바로잡고는 여유 있게 씩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웃음은 이사드를 자극했다. "당장 떠날 채비를 하도록 해. 내 배가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이사드가 딱 잘라 말했다. "'내' 배라고 했소?" 남자의 목소리는 걸걸한 중저음이었다. 그는 잠시 얼굴을 찡그리다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 당신이 녹서스의 기린아라 불리는 그분이로군? 배야 당신이 원할 때 언제든 출발시킬 수 있소. 그렇게 보채지만 않는다면 준비가 끝나는 대로 출항할 거요." "네 놈이 감히..." 이사드가 그의 건방진 태도에 얼굴을 붉히며 허리춤의 화려하게 장식된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이름이 뭔가?" "오딜론." 그가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답했다. "동료들은 니앤더라고 부르지만." "니앤더 오딜론." 이사드가 이름을 되뇌었다. 그러는 와중 아르덴티우스호에 포박줄, 올가미, 짐승 우리라고 적힌 화물들이 실리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야수 조련사?" "아, 들어본 적이 있나 보군요." 수도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국을 위해 싸우느라 바쁜 몸이기에 투기장에서 시간을 보낸 적은 별로 없지만, 이사드는 오딜론이라는 이름이 곧 관중의 함성 속에서 맹수들의 극적인 전투를 상징하는 야수 조련사와 동의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사드가 평정심을 되찾았다. "당신이 같은 배에 탈 거라는 말은 없었어." "뭐, 와버린 걸 어쩐담." 오딜론이 오디츠 선장의 낙관이 찍힌 두루마리를 이사드에게 건넸다. 그는 이사드가 노려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이를 다 드러낸 채 음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왕 한배를 탔으니 잘 지내봅시다." |
2.3. 3막
이사드는 뱃머리에 서서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가 출발하자 강어귀를 빠져나가 바다로 향하려는 다른 배들의 행렬 속에 묻히게 되었다. 이렇게 몇 시간을 대기하는 동안 녹서스로 들어가는 바닷길목을 지키는 요새에 배치된 군인들이 무뚝뚝한 태도로 배를 자세히 검문했다. 그들은 아르덴티우스호의 구석구석을 확인하고 이사드의 명령서를 적어도 여섯 번은 읽어본 뒤 결국 통과 허가를 내렸다. 이사드는 바다를 본 적이 많았지만, 자신이 직접 배를 이끌고 나가 본 적은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짙푸른 바다는 한낮의 태양이 내뿜는 열기로 인해 하늘과 갈라져 보였고, 이 광경은 그녀에게 언제나 충격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 이 앞 어딘가에 이사드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탐험하고 정복할, 녹서스 제국의 영토가 될 미지의 땅이. 그녀는 과거에 칼로 영광을 맛보았지만,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의 위업은 아니었다. 아무리 잊어보려 노력한들 가슴에는 항상 세상을 등지고 거리를 떠돌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었고, 그로 인해 조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거나 누군가를 진정으로 신뢰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녀의 삶은 치열했다. 갑판에서 둔탁한 발소리가 들리자 이사드는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야수 조련사가 다가오는 소리였다. 그녀는 낡아 빠진 가죽 일기장에 마지막 메모를 빠르게 적은 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멋진 풍경이오. 안 그렇소?" 오딜론이 난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사드가 발끈했다. "당신은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배가 필요했소." "이건 내 배야. 내 여정이고. 그것만 기억해 둬. 그럼 우리 사이에 문제 될 건 없을 거야." 이사드가 말했다. 오딜론이 어깨를 으쓱했다. "원하는 게 군인 놀이라면 그렇게 하시오. 나한테 중요한 건 도착지까지 안전하게 가는 거고, 내가 놈을 찾는 동안 당신의 간섭을 받지 않는 거니까." 이사드가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게 뭐지?" "괴물이오." 오딜론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엄청난 놈이지. 그놈을 잡으면 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오." |
2.4. 4막
망망대해를 항해한 지 삼 주째. 마침내 배가 바다뱀 삼각주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겨우 발 딛고 설 수 있을 만큼 자그마한 모래사장과 덤불 지대부터 마을이 들어설 만한 커다란 섬까지 많은 땅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바다뱀 군도는 슈리마 대륙 남부, 그리고 동부의 미개척 지역으로 향하는 길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수로는 작은 배와 뗏목, 그리고 물물교환을 원하는 어부와 현지 상인들로 들어차 있었다. 녹서스 제국의 선박이 이곳에 들어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고, 심지어 아르덴티우스호 같은 호위선일지라도 소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군도의 강가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선실에서 주갑판으로 나온 이사드는 배가 현지인들로 둘러싸인 것을 발견했다. 남녀 할 것 없이 흔들리는 배를 타고 서서 생선 묶음과 각종 장신구를 손에 들고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군인들과 선원들을 향해 시끄럽게 소리치고 있었다. 오딜론이 현지인들 사이에서 그들의 말로 대화하는 동안 수하의 덫 사냥꾼들이 물물교환을 하며 가지고 있는 지도와 현지인들의 지리 정보를 비교했다. "이럴 시간이 없어." 이사드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길을 막는 현지인들의 배를 대포로 날려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물자를 그런 데에 쓰기엔 낭비였고, 그녀에게도 득이 될 건 없었다. "가만히 계시오." 오딜론이 세밀하게 깎아 만든 나무 조각품을 살펴보며 이사드에게 외쳤다. 그가 조각품을 상인에게 돌려주자 상인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길 지나면 물길이 거세집니다. 호의를 그렇게 외면하지 마시지요." 이사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식량, 식수, 안내인. 우리가 여기서 얻어야 할 건 그뿐이야. 아무도 육지에 내려서는 안 돼." 오딜론은 거슬릴 정도로 진지하게 경례를 한 번 하고서는 현지인들과 말을 이어갔다. 이사드는 배 위를 돌며 녹서스 해군 기간병들의 경계 태세를 확인하면서 야수 조련사를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대포와 포수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을 마치자 오딜론이 현지인의 배에서 지도 하나를 갑판으로 가져오는 모습이 보였다. "안내인을 찾았소." 안내인이 오딜론에게 현지어로 무언가를 얘기하자 그가 몸을 숙였다. "바다뱀 군도에 온 것을 환영한답니다. 강 상류로 데려가 줄 수 있다고 하는군요." "좋아." 이사드가 어서 출발하고 싶다는 듯 재빨리 답했다. 안내인이 오딜론에게 다시 무언가를 말했다. "그런데 왜 강 상류로 가려는지 묻는군요. 거기로 가려는 이유가 뭐요?" "임무가 끝나면 그곳이 녹서스의 땅이 될 거라고 얘기해." 이사드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
2.5. 5막
기이한 현지 과일과 말린 생선으로 식량을 보충한 원정대는 수상 교역소를 지나 항해를 이어갔다. 군도는 갈수록 협소해졌고 섬과 섬 사이의 미로와도 같은 길도 점점 줄어들었다. 마침내 아르덴티우스호는 깊숙한 정글로 이어지는 넓고 짙은 빛깔의 강으로 들어섰다. 그게 지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미지의 야생이 원정대를 맞이했고, 별다른 일 없는 나날이 흘러갔다. 이사드는 자신과 자신의 선원들이 이처럼 길들지 않은 땅에 발을 내디딘 최초의 녹서스인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이곳은 실로 아름다웠다. 우뚝 솟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고, 형형색색의 화려한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생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그뿐만은 아니었지만. 안내인은 내키지 않았지만 주요 지형지물을 설명하고 암초와 얕은 곳을 피해 원정대를 정글 안쪽으로 이끌었다. 불현듯 이사드는 가려움을 느꼈다. 처음엔 기분 탓인 줄 알았지만 가려움은 계속되었다. 강 주변은 마치 보이지 않고 느낄 수만 있는 그림자에 삼켜진 것처럼 짙은 어둠이 깔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이사드는 손이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찬 칼로 가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손을 다시 거두고는 일부러 팔짱을 끼고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침묵의 공포감이 계속 남아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을 물들였다. |
2.6. 6막
이사드는 의식을 날카롭게 유지하기 위해 항해사와 함께 항로 지도를 만들고 물자를 점검했다. 그녀가 자기 몫으로 배급된 블러드클리프 건빵에서 쥐바구미를 떼어내며 주갑판으로 올라가던 중 갑작스런 고함이 들렸다. "무슨 일이야?" 그녀가 주갑판으로 올라가며 물었다. 오딜론이 안내인의 말을 듣고는 답했다. "더 못 가겠다는군요." 이사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 와서?" 주위를 둘러보자 지금까지 지나온 강과 정글의 모습과 별다른 바가 없었다. 하지만 안내인은 마치 보이지 않는 경계를 뚫고 들어오지 말아야 할 곳에 들어왔다는 듯이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안내인은 벌벌 떨며 주변의 선원들을 가리켰다. 선원들의 몸에 빨간 반점 같은 것이 나 있었고,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사드는 이 증상이 선원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원인을 밝히려 했지만 알아낼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몸에도 똑같은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정글의 저주랍니다." 안내인이 소리치는 말을 오딜론이 통역해 주었다. "우리가 벌을 받는 거라고, 정글이 우리를 들여 보내주지 않을 거라는군요." '겁쟁이 같으니.' 이사드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오딜론을 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배에서 내리라고 해. 물에 던져버리든가. 우리는 돌아가지 않는다." |
2.7. 7막
아르덴티우스호가 정글 안쪽으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간 지도 이제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은 돛에 바람 한 점 불지 않은 탓에 이사드의 명령에 따라 몇몇 선원들이 배에서 내려 어깨까지 물에 잠긴 채 밧줄과 쇠사슬로 배를 끌어당겼다. 여기에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었고, 강둑의 지형이 가는 곳마다 달라졌기 때문에 위험천만했다. 물살이 흐르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선원 수가 아홉 명이나 줄어있었다. 안개가 강을 뒤덮고 시야를 가렸다. 야생목들이 물 위로 가지를 늘어뜨려 강둑의 끝과 끝을 덮개처럼 이었고, 빛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방이 깜깜했다. 이사드는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아래로 가라앉고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 배는 이 수수께끼 같은 땅의 밑바닥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정글이 그들을 삼키고 있던 것이다. 예고 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며칠간 계속되었다. 빗방울은 빽빽한 나무 지붕을 뚫고 내려와 아르덴티우스호 선원들의 몸을 뼛속까지 적셨다. 정글은 마치 이곳에 함부로 침입한 그들에게 벌을 주듯, 그들의 몸과 정신을 황폐하게 했다. 선원들도 그렇게 믿었다. 먹구름으로 인한 우울함과 떠나버린 안내인의 모습이 계속 그들을 괴롭혔다. 미신을 많이 믿는 선원들은 어두운 강물 위로 배가 나아가며 만들어내는 잔물결과 눈에 보이는 모든 나무마저도 불길하다며 중얼거렸다. 심지어 가장 냉소적인 성격의 수병들도 신경이 곤두섰고 한동안 횡설수설하더니 같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곧 선원들이 미쳐버릴 거라는 사실을 이사드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 본보기를 보여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바라던 찰나, 그녀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뱃머리를 돌려!" 겁에 질린 목소리로 누군가 소리쳤다. "지금 당장!" "진정해, 크로스." 오딜론이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죽음의 배야. 저주받은 배라고." 크로스가 오딜론에게 빠르게 다가가 그가 입고 있는 방한 외투의 옷깃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안내인이 한 말 들었지? 이 정글에 한번 들어오면 아무도 살아나갈 수 없어. 아무도!" 오딜론은 주변에 모여있는 선원들 쪽을 힐끗 쳐다봤다. 그가 쓴 낡고 빛바랜 모자챙 끝으로 굵은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들 모두 크로스와 같은 눈빛이었다. "그만해." 그가 크로스를 뒤로 밀치며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여기선 저주의 저 자도 꺼내지 마. 정신 차려." "돌아가야 한다고!" 크로스가 눈을 크게 뜨고 애걸복걸했다. "돌아가야 하—" 크로스는 미처 문장을 다 끝내지 못하고 헉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사드는 더러워진 자신의 칼을 닦아냈다. 옳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때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과도 같았다. "당신이 지금껏 살아온 인생보다 더 긴 시간을 저 녀석과 함께하며 짐승을 사냥해 왔소." 오딜론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도대체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우릴 막을 수 없어." 이사드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게 무엇이든, 누구든 간에." |
2.8. 8막
배가 무언가에 쓸리는 소리가 들리자 이사드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무기를 차고 갑판으로 뛰어나갔다. 배는 뜻밖에도 강 끝에 도착해 있었다. 정글 혹은 진흙땅 아래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만나 형성된 작은 만은 마치 덩굴과 매끈한 나무가 완전히 에워싸고 있는 것 같았다. "강이 막혔소." 오딜론이 뱃길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돌아가야 할 것 같구려. 다른 강줄기를 찾아보시오." 이사드가 작은 망원경을 들고 앞쪽을 살폈다. 아르덴티우스호를 끌고 다른 길을 찾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릴 터, 그러기엔 상황이 촉박했다. 이사드는 모여있는 병력과 선임 선원들의 행색을 보고는 과연 지칠 대로 지친 이들이 배를 끌고 갈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열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 한 명은 자신의 역할을 거부하다 처형당했고, 여섯 명은 기이한 전염병에 사망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은 야밤에 자취를 감추었다. 동이 트고 근무 교대를 하던 인원들이 그들을 찾아보았지만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간다." 이사드가 병력을 모아놓고 말했다. "제국에 보고할 만한 걸 찾아내거나, 전초 기지를 세워 더 깊은 내륙 쪽을 탐색하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다. 스탐, 선발대 병사들에게 칼을 나눠주도록." 스탐이 망설였다. "사령관님... 석궁이나 폭탄은 안 가져갑니까?" 이사드가 칼을 꺼내 들더니 선발대 전원에게 말했다. "덤불 지대에서는 쓸모가 없으니 구식으로 하는 수밖에 없어." 그녀가 오딜론을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만의 사냥단을 꾸리고 있던 참이었다. "야수 조련사, 이것 때문에 여기에 왔다고 했지?" 사냥의 달인 오딜론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강을 건너며 큰 고생을 했음에도 자신감으로 충만해 보였다. "제군, 우리가 노리는 건 큰 놈이다. 사냥과 포획에 필요한 모든 짐을 챙긴 후 모두가 나눠 든다. 사령관이 이끄는 선발대가 출발하면 우리도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 같이 움직이는 거다." 오딜론의 동료들이 해산하자 이사드가 그에게 다가갔다. "놀랍군. 우리가 뜻을 같이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
2.9. 9막
정글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이사드의 머릿속에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온갖 고초를 겪었던 강도 정글에 비하면 낙원이었다. 선발대는 굵은 덩굴과 초목을 베며 나아가야 했다. 정글 안은 숨이 막혔다. 짙고 습한 안개만이 목구멍과 눈을 찔렀다. 얼마 안 가 그들은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사드는 무언가로부터 감시당하는 듯한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와중 대열의 뒤쪽과 양옆에서 한 명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조용히 사라졌지만 몇몇은 도와달라고 소리치며 덤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몇 시간이 흐르자 서른 명이었던 이사드의 선발대와 사냥꾼들은 그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흩어지지 마!" 이사드가 눈가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소리쳤다. 그녀는 온몸에 퍼진 붉은 반점 때문에 따가운 통증을 느꼈고 머리는 어지러웠지만 온 힘을 다해 정신을 집중했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아니, 여기서 멈추기는 '싫었다'. 계속 움직여야만 했다. 선두에 있던 정찰병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이사드는 대열 앞쪽으로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갔다. 그들 앞쪽에 작은 구멍 하나가 나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검은 물로 채워진 얕은 웅덩이가 있었다. 비록 비좁긴 했지만 지금까지 지나온 길보다는 훨씬 개방된 곳이었다. "저 물은 건드리지 마." 이사드 역시 갈증을 느꼈음에도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이동한다." 이사드는 자리에 앉으며 오딜론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낡은 술병을 그녀에게 건넸다. 잠시 후 그녀는 마지못해 술병을 받아들었고, 그 옆으로 오딜론이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여정 내내 그가 보였던 침착한 모습이 사라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너무 감정에 휩싸이지 마시오." 오딜론이 말했다. "당신이 있건 없건 간에 난 이 저주받은 곳에 왔을 거요.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소." 이사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오딜론은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그녀 쪽으로 몸을 더 가까이 기울였다. "난 파산했소." 그가 속삭였다. "그나마 남은 돈도 여기 오는 데 다 써버렸지. 내 목숨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으니까. 이제 난 짐승을 잡아 투기장에 넘겨 빚을 갚거나, 아예 돌아가지 못하거나, 둘 중에 하나요." 오딜론이 한숨을 내쉬며 술병을 다시 가져가 한 모금 들이켰다. "당신은 왜 여기에 온 거요?" "임무가 있어." 이사드가 정글 쪽을 바라보며 답했다. "여기서 복귀한 후 이 지역을 녹서스에 병합시키면 내 이름이 붙게 될 거야. '대장군' 스웨인이 나타나 숙청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고귀한 토미리가의 이름을 알았지. 새로운 땅을 정복하면 내 위업이 두고두고 회자될 거야." "허영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더니." 오딜론이 싱긋 웃어 보였다. "이런 헛고생을 시킨 걸 보니 그들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나 보군. 이제 그 사람들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는구려." 그가 이상할 정도로 나긋하게 말했다. "참 안 됐소..." "잠깐." 이사드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고 애쓰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는 와중에 갑자기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은 건드리지 말라니까!" 그녀가 화난 투로 소리쳤다. "우리가 건드린 게 아니오." 오딜론이 정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웅덩이 위로 나무들이 흔들리는 모습이 비쳤다. 나뭇가지가 꺾여 부러지더니 땅과 웅덩이로 떨어졌다. 그 순간 어떤 소리가 들렸다. 쿵쿵대는 발걸음 소리,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 우르르 거리는 낮은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정글에서 어떤 형체가 나타나더니 빽빽한 밀림 사이를 뚫고 지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형체가 고개를 들자 엄니가 달린 커다란 머리가 나타났다. 이사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바실리스크를 본 적은 있었다. 보통 탈것이나 노역용으로 쓰이는 짐승이었다. 성체 중 어떤 것은 크기가 엄청나게 커 포위당한 도시의 성벽을 무너뜨릴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나타난 것은 그보다 더 큰 놈이었다. 놈은 그들을 노려보더니 서 있는 사람을 넘어뜨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로 포효했다. "좋아!" 기세에 찬 목소리가 충격에 빠져있던 이사드를 깨웠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야수 조련사 오딜론이 작살과 올가미를 꺼내 들고는 짐승을 향해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요 귀여운 녀석. 자, 어디 한번 덤벼 봐!" 오딜론이 사냥용 도구를 빙글빙글 휘두르며 크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누가 더 큰지 한번 보자고!" 이사드는 짐승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넘어질 정도로 강력한 진동이었다. 이내 바실리스크의 원시적인 포효와 사냥꾼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물론 그 유명한 야수 조련사의 목소리도 함께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남겨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
2.10. 10막
이사드는 빈터의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멈춰 섰다. 나무를 한 손으로 짚어 몸을 지탱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더이상 오딜론과 바실리스크가 싸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결국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은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숨을 몇 번 크게 들이쉰 후 고개를 들어 남은 인원들을 살펴보았다. 이사드를 포함해 총 여섯이었다. 녹초가 된 그들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무기를 들고 있는 건 세 명이 전부였다. 오딜론의 사냥단은 그의 곁에 남아 마지막까지 함께 싸웠다. 이사드는 절망감에 휩싸였고, 이는 마치 실제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저길 보십시오!" 병사 중 한 명이 칼로 방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사드가 빈터를 자세히 살펴보자 무언가가 보였다. 그것은 아치 모양이었고, 주변에는 덩굴이 잔뜩 자라 있었지만 분명히 이 숨 막힐 듯한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돌로 된 구조물이었다. 그들은 덩굴과 가시덤불을 헤치며 구조물 쪽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구조물의 형태는 단순했고, 완전히 초목에 뒤덮여 있었다. 굵은 덩굴이 부서진 돌을 휘감고 있었는데, 아마 구조물을 지탱해 주는 유일한 지지대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덩굴은 마치 이 장소가 구조물을 집어삼켜 가루로 만들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비정상적으로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생존자들은 각자 흩어져 식물로 뒤덮인 정육면체 석조물의 내부와 주변을 살폈다. 이사드가 구조물 앞에 서자 알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이 북받쳐 오르더니 목이 메어왔다. 구조물의 표면을 뒤덮은 덩굴을 떼어내자 거기에 적힌 글자가 보였다. 이는 이사드가 어릴 적부터 평생을 알고 있던 언어로 쓰여 있었다. "이건..." 그녀는 말라붙은 혀로 애써 말을 내뱉었다. "녹스토라잖아..." 이사드는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의 원정대는 이 땅을 밟은 최초의 녹서스인들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이곳에 온 다른 녹서스인들이 있었고, 그녀가 지금껏 지나온 여정과 이 전초 기지의 상태로 보아 그들이 맞이한 운명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운명 또한 분명했다. 그녀가 이곳에 보내진 건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이사드는 그토록 원했던 명령을 받고 세상의 끝, 한번 들어가면 다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온 것이다. 그녀는 위업을 남기기 위해 전력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녀는 토미리가의 이름이 역사에서 지워질지도 모를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숨 막히는 이 척박한 땅에서. |
2.11. 11막
버려진 전초 기지에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사드는 생존자들을 이끌고 무성히 자란 덤불을 헤쳐 새로운 길을 만들며 다시 정글로 향했다. 마음이 초조해서였는지 헤쳐놓은 식물 뿌리와 덩굴이 마치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들이 아르덴티우스호를 발견한 건 거의 우연이었다. 그들의 눈앞에 뱃머리가 나타났다. 배는 초목에 완전히 뒤덮여 있었고, 심지어는 주변의 작은 만에도 식물이 자라나고 있었다. 마치 정글에서 배가 생겨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사드의 눈에 마치 부러진 기둥처럼 갑판 위로 무언가 삐져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피가 차가워졌다. 선원들이었다. 배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초목에 집어 삼켜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덩굴에 뒤덮인 동상처럼 제자리에 서 있었다. "정글..."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정글에 갇힌 거야." 나머지 병사들은 이 광경을 보고 공황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무장병 스탐이 소리쳤다. "뭘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강으로 가자." 이사드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강둑으로 가는 길을 찾은 다음 삼각주로 돌아가는 거야." "여기서 걸어 나갈 순 없습니다. 다들 어떻게 됐는지 눈으로 확인했잖습니까, 사령관님. 정글은—" "정글, 정글, 정글!" 그녀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냥 나무와 덩굴, 곤충과 짐승이 있는 곳일 뿐이다. 그리고 넌 녹서스의 병사다. 여기서 널 쓰러뜨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렇게 말했지만 솔직히 그녀 자신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곳은 다른 곳과는 무언가 달랐다. 이곳엔 무언가 어둡고 불가능할 것만 같은 것이 존재했다. 제국의 힘으로도 길들일 수 없는 무언가가. 하지만 절망에 무릎 꿇을 순 없었다. "여기서 혼자 아무도 모르게 죽고 싶다면 그렇게 해."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냈다. "난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따라올 힘이 남은 사람은 따라와도 좋다. 이게 이사드 토미리의 마지막이 될 순 없어." |
2.12. 12막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와 함께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족 생각에 소년은 강둑에 쭈그려 앉으며 낚싯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곧 낚싯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소년은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며 물고기를 낚았다. 꿈틀거리는 물고기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어떤 형체가 물에 뜬 채 소년에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노의 길이만큼 가까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눈치챌 수 없었다. 물체가 더 가까이 다가오자 소년은 바구니 속의 물고기는 잊은 채 얼굴을 찌푸렸다. 무른 강바닥으로 걸어간 소년은 그 물체를 끌어당겨 강둑으로 가져왔다. 유목은 마을에서 유용하게 쓰였고, 돈을 받고 팔 수도 있었다. 물론 집으로 가져갈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유목이 아니었다. 덩굴과 이끼 사이로 사람의 형체가 보이자 깜짝 놀란 소년은 숨이 턱 막혔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지만, 죽은 것은 분명했다. 소년은 그 모습이 마을에서 매해 조상들을 위한 축제를 벌일 때 본 미라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검은빛이 감도는 낡고 부서진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갑옷의 끄트머리는 빛바랜 붉은색을 띠고 있었으며 녹슨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소년은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창백하고 쭈글쭈글한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소년은 간신히 그 물건을 빼냈다. 작은 책이었다. 책은 흠뻑 젖은 낡은 가죽 안에 단단히 싸여 있었다. 소년이 책장을 넘기려는 순간 물에 떠 있던 형체에서 푸른 빛의 녹색 덩굴이 스르륵 빠져나왔다. 이어서 반짝거리는 포자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자 소년은 콜록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소년은 책을 쥐고 내달렸다. 잡은 물고기는 까맣게 잊은 채, 목 뒤를 벅벅 긁으며 집으로 도망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