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17 10:30:11

서재필(성군 순종대왕 일대기)

1. 개요2. 작중 행적3. 기타

1. 개요

성군 순종대왕 일대기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서재필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

2. 작중 행적

1882년 성균관 생도로 첫 등장.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전 불길한 전조를 보고 기이함을 느낀다. 젊은 나이에 가문 빽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민영환을 못마땅하게 봤었지만 임오군란 이후 세자의 편을 들게 된다. 임오군란 이후 민영환이 강백산과 합의하고 성균관 대사성에서 물러나며 자기 다음 대사성으로 천거하여 대사성으로 임명된다.

이후 한성신문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인쇄기가 없어 죄다 손으로 써야 하다 보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강백산이 이제 한성신문 사장직은 인수인계하라 했을 때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1883년에 접어들자 교육 구조 개혁안을 강백산에게 내놓고 교육 개혁에 집중하기 위해 기존 관직들을 그만둔다. 다른 세자파의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집안빨이 심하거나 너무 나이가 많아서 이런 자리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서재필이 선택된 것. 세자의 개혁으로 인해 관직 바겐 세일이 터지면서 역으로 과거 수요가 늘어났고, 이 때문에 과거제를 개편하여 소과를 새로 개설하고 신학문을 교육시키기로 한다.

양란 이후 공립교육을 담당하던 향교가 많이 줄어 사립학교인 서원이 그 역할을 주로 맡고 있었기 때문에 서원의 폐단은 알고 있지만 어느 정도 되살릴 필요가 있다 주장하였고,[1] 강백산은 서재필의 말을 듣고 일단 종교 기능을 배제한 채 학원 기능만 되살리고, 양반들의 편법을 막고자 노비해방과 연계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1884년 김옥균의 주자 매장 발언의 여파로 총선을 개최하게 되는데, 총선 가지고 논의를 할 때 아직 제한 선거권이라서 양반과 중인에게만 선거권이 행사되면 당장의 총선은 대패하겠지만 민심을 유형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이렇게 된 이상 서양처럼 신문사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홍보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선배들에게는 네가 우리에게 말대답할 짬이 되냐고 갑질당하기는 했지만 서재필의 제안 자체는 다 들어줬다.
1886년 주식 전쟁 과정을 지켜보며 강백산이 주도하는 현 조선의 발전상이 놀라울 정도로 기이하다는 걸 유일하게 눈치챈 사람으로, 다른 관원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현재 조선의 발전상 중 대부분은 조금도 당연한 것이 아니라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의문을 품게 된다.

'유학이 특별한 것이라면 동도서기를 시도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조선처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 한 것을 보면 유학이 특별한 게 아니라 조선이 특별한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무엇이 조선을 특별하게 만든 것인가 고민하다가 글래드스턴의 '동방의 샛별' 발언을 실은 기사를 보고 휘그사관에 물드는데, 정작 작가는 21세기 들어서는 영국인들의 헛소리로 판정되었다고 휘그사관을 깠다.

조선도 영국처럼 의회정치로 향하는 선형적 발전도상을 걷고 있었으며 시간이 지나면 영국처럼 세계를 주름잡는 열강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왜란과 호란이 모든 걸 망쳐버렸다며 "이게 다 되놈들과 왜놈들 때문이다."라는 결론과 함께 민족주의자로 암흑진화한다. 서재필이 민족주의자로 급발진한 것에 대한 개연성은 있는데, 원 역사에서도 서재필은 "요동과 만주를 먹고 대마도를 먹자."라고 주장했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자로 진화한 이후에는 '필립 서'라는 가명으로 한성순보에 논설을 기재하면서 한때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화가 이토록 초라하게 몰락한 이유는 몽골족이 송나라 시절의 찬란한 문명을 파괴하고 그 철학을 황제 독재의 수단으로 악용했기 때문이라며 동양 문명이 실패한 책임은 만주족과 몽골족에게 있다는 책임론을 퍼트리고 있다. 서재필이 한문으로 신문을 싣고 있다 보니 홍콩을 통해 청나라 본토에도 필립 서의 칼럼들이 점차 퍼지고 있는데, 이중 홍콩의 의대생이었던 손덕명이 이에 감명받고 타락해서 원 역사보다 암흑진화한 혁명가 손문이 되어버렸다.

이대로 가면 배타적 민족주의로 흐를 것을 우려한 강백산이 광개토태왕비 발견을 계기로 여진은 말갈을 이었고 고려(고구려)의 일부였고 왜는 백제의 속방이었기에 고려(고구려)와 백제 모두 계승한 조선 입장에서는 한 가족이며 삼한과 발해, 고려 모두 휘그사관에서 말하는 의회정치의 기반이 있었고 말갈과 왜도 참여했겠지만 뿔뿔히 흩어져 서로 다투다 말갈과 왜는 의회정치의 기반이 사라진 것이 아니겠냐고 말해준다.

그러나 서재필은 동양에는 그리스와 로마에 해당하는 의회전통을 가진 국가가 없다는 것에 고민하던 서재필이 삼한이야말로 그리스와 로마에 해당하는 국가라며 더더욱 급발진하자 강백산도 포기해버린다.

이후에도 관직이 아닌 언론인으로 살면서 자신도 고위 관직들에 지지않는 왕좌지재라고 자부하던 차에 융희제가 궁으로 불러서 앞으로 한국이 가야 할 미래를 두고 상담을 받는다.

3. 기타

강백산 파의 주요 인물들 중에서는 나이와 짬이 가장 딸리다 보니 쪼이고 살지만, 조선인 기준으로도 굉장히 괄괄하고 직선적인 언행의 소유자라 작중 초반에 이형이 불편해하는 모습이 나온다. 당시 성균관 생도들은 이런저런 문제로 인해 독기 어린 걸로 유명했지만 서재필은 그들 중에서도 특출났다고.

세자파의 주요 패밀리들 중에서는 제일 어리고 지위가 낮은 데다 후배라서 발언권은 제일 약하지만 치고 나가야 할 때는 망설이면서도 제 할 말은 한다.

정치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사전적인 의미로의 천재는 김옥균보다는 서재필 쪽이라고 한다. 원 역사에서 19세기 후반의 미국에 혼자 망명 가서 그 정도의 학력과 지위를 손에 넣은 걸 보면 확실히 천재가 맞다.

세자의 주요 수하들 중 유일하게 지나치게 꼰대적이지 않으면서 가문빨을 덜 받은 인물이라고 언급되는데, 서재필이 속한 대구 서씨도 객관적으로는 조선시대 내내 요직을 차지한 명문가였지만 세도정치장동 김씨여흥 민씨처럼 거창한 권세를 휘두르지는 못했다.


[1] 본인도 눈치가 보여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했고 강백산도 내키지 않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