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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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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
파일:the art of loving_first edition.jpg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작가 에리히 프롬
장르 철학서
언어 영어
발매일 1956년

1. 개요2. 내용
2.1. 분리된 인간: 고독2.2. 부분적 해답: 도취, 일치, 창조2.3. 완전한 해답: 사랑
2.3.1. 유년기 정서 발달 과정2.3.2. 성숙한 사랑2.3.3. 사랑의 대상
2.4. 사랑의 실패2.5. 사랑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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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철학자 에리히 프롬이 1956년에 출간한 책. 프롬이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쉽게 쓴 대중철학서적으로서, 34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수백만 부 이상이 팔려나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 내용

2.1. 분리된 인간: 고독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분리되어 세상으로 나오는 존재이다. 태어난 이후에도 갓난아이는 대상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해서 그 자신을 어머니와 구별하지 못한다. 아이는 자궁 밖에서 살고 있어도 아직 완전히 어머니의 무조건적 사랑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는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는 결국 완전히 분리된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류도 그 시초에는 자연과 일체감을 느꼈고, 인간은 자연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찾아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진행함에 따라, 인류의 발달 역시 이러한 자연과의 원초적 합일에서 인간이 탈출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한번 자연과 분리된 인간은 자연으로 되돌아가지는 못한다. 인간은 철저하게 상실한 전-인간적 조화 대신에, 이성을 발달시키고 새로운 조화, 곧 인간적 조화를 찾아내면서 오직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쉬운 길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는 인간은 쉽사리 위기에 빠지고 만다. 분리되어 있는 실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자연 및 사회의 힘 앞에서 느끼는 무력함, 이에 따른 고독과 불안으로 인해 인간은 인간 자신의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들고 말았다. 인간은 이 감옥으로부터 풀려나서 밖으로 나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들과, 또한 외부 세계와 결합되지 않는 한 미쳐버릴 것이다. 분리는 정녕 모든 불안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가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하고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에서 동일한 문제, 곧 어떻게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가, 어떻게 결합하는가, 어떻게 자신의 개체적 생명을 초월해서 합일을 찾아내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해왔다. 그리고 이에 대한 많은 대답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의 기록 ㅡ 동물 숭배, 인간의 희생, 군사적 정복, 사치에 탐닉, 금욕적 단념, 강제 노동, 예술적 창조, 신의 사랑, 인간의 사랑 등 ㅡ 은 바로 인간의 역사다.

2.2. 부분적 해답: 도취, 일치, 창조

온갖 종류의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러한 상태는 때로는 마약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성적 경험이 밀접히 관련되어 혼합되기도 하지만, 핵심은 상황 그 자체가 자동적으로 유발된 황홀경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외부 세계는 사라지고 동시에 외부 세계와의 분리감도 사라진다. 이러한 의식은 공동으로 거행되므로 집단과의 융합을 경험하게 하고, 이 경험이 이러한 해결을 더욱 효과적인 것으로 만든다. 도취 경험을 한 사람들은 얼마 동안은 분리감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도취 상태가 무당이나 사제에 의해 인정되고 요구되는 문화적 관습으로 행해지는 한, 사회는 의식을 되풀이해 거행함으로써 사람들의 불안감이나 죄책감을 감소시켰다. 이러한 문화를 가지지 않는 곳에서는 개인이 선택하는 형태로 스스로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에 빠짐으로써 분리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도취 상태가 지나가버리고 나면 그들은 더욱 심한 분리감을 느끼며, 더욱 자주, 더욱 강렬하게 알코올이나 마약에 의존하게 된다.

성적 도취를 해결책으로 삼는 경우는 이와는 약간 다르다. 성적 도취는 어느 정도 분리감을 극복하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형태이며 고립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답이 된다. 남남으로 지내오던 두 사람이 갑자기 그들 사이의 벽을 허물어버리고 일체라고 느낄 때, 이러한 합일의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유쾌하고 격앙된 경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갑자기 친밀해지는 이 기적은 성적 매력과 성적 결합에 의해 시작되는 경우, 대체로 급격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두 사람이 친숙해질수록 친밀감과 기적적인 면은 점점 줄어들다가 마침내 적대감, 실망감, 권태가 생겨나며 마침내 최초의 흥분의 잔재마저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 그들은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고,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이럴 경우, 사랑이 없는 성적 오르가슴 추구만 남게 되고, 이것은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기능을 떠맡게 된다. 이것은 분리에 의해 생긴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절망적 노력이며, 결과적으로는 분리감을 더욱 증대시킨다.

열정적인 '도취'적 합일과는 다르게, 집단, 관습, 신앙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도 있다. 이것은 개인의 자아 대부분이 사라지고 그 목적이 군중에 소속되어 있는 합일이다. 분리되지 않으려는 욕구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이해한다면, 남과 다르다는 데서 느끼는 공포, 군중과 약간 떨어져 있다는 데서 느끼는 공포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만일 내가 남들과 같고, 나 자신을 유별나게 하는 사상이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으며, 나의 관습이나 옷이나 생각을 집단의 유형에 일치시킨다면, 고독이라는 가공할 경험으로부터 구제될 것이라고 믿는다.

차이를 제거하려는 경향이 이와 같이 강화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강력한 영향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원활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 더욱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그 취미가 표준화되고 쉽게 영향받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각기 자신의 욕망에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이들은 같은 일터에서 일하고 같은 오락을 갖고, 같은 신문을 읽고, 같은 감정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된다. 이러한 일치에 의한 합일은 강렬하지도 않고 난폭하지도 않다. 일치에 의한 합일은 냉정하고 관례에 따라 지시되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분리 상태에서 생기는 불안을 진정시키기에 불충분하다. 모든 사람이 되도록이면 타인들과 똑같해지려고 노력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고독하며, 분리 상태가 극복되지 못했을 때 필연적 결과로 생기는 깊은 불확실성과 불안, 죄책감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오락산업을 수동적으로 소비함으로써, 더 나아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사고 이것을 곧 다른 것과 교환하는 데 만족함으로써 자신의 의식되지 않는 절망을 극복하고자 한다. 상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스릴과 살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돈으로 사는 맛, 이것이 현대인의 행복이 된다. 우리의 성격 또한 교환하고 받아들이고 싸게 팔아버리고 소비하는 데 적합해진다. 마침내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되고 만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라서, 남자에게 매력 있는 여자 그리고 여자에게 매력 있는 남자는 탐나는 경품이 된다. 이들은 자신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유쾌한 태도와 흥미있는 대화술을 익히고 유능하고 겸손하고 둥글둥글하게 처신한다. 남자들은 성공해서 자신의 지위의 사회적 한계가 허용하는 한 권력을 장악하고 돈을 모으려고 하고, 여자는 몸을 가꾸고 치장을 하는 등 매력을 갖추고자 한다. 하지만 이로서는 진정한 사랑을 경험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기껏해야 '받은 만큼 준다'는 자본주의의 공정한 거래 윤리를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합일을 이루는 세 번째 방법은 '창조적 활동'이다. 어떤 종류의 창조적 작업이든 창조하는 자는 외부 세계를 나타내는 자료와 결합한다. 목공이 책상을 만들든, 금세공인이 보석 조각에 가공을 하든, 농부가 곡식을 기르든, 화가가 그림을 그리든, 모든 형태의 창조적 작업에서 일하는 자와 그 대상은 하나가 되고 인간은 창조 과정에서 세계와 결합한다. 그러나 이것은 생산적인 일, 곧 '내'가 계획하고 만들어내고 내 작업의 결과를 볼 수 있는 일에만 해당된다. 현대 사무원의 노동 과정에서, 노동자는 끝없는 벨트 위에 놓여 있고 노동의 결합적 성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노동자는 기계 또는 관료 조직의 부속물이다. 그는 이미 그 자신이 아니며 따라서 일치를 넘어선 합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도취로 이루어지는 합일은 일시적이다. 일치에 의한 합일은 사이비 합일에 지나지 않는다. 창조적 활동에서 이루어지는 합일은 인간 대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합일은 실존의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답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한 해답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결합, 곧 '사랑'에 있다. 대인간적 융합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갈망이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열정이고 인류를, 집단을, 가족을, 사회를 결합하는 힘이다. 이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발광 또는 파괴 ㅡ자기 파괴 또는 타인 파괴ㅡ 가 일어난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성은 하루도 존재하지 못한다.

2.3. 완전한 해답: 사랑

2.3.1. 유년기 정서 발달 과정

우선 유년기 퍼스낼리티의 정서적 발달 단계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임신한 어머니와 태아는 둘이면서 하나다. 그들은 '함께' 살고 서로를 필요로 한다. 태아는 어머니의 일부이고 어머니에게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받는다. 태어난 후에도 갓난아이는 탄생 이전과 거의 다르지 않다. 아이는 이제 자궁 밖에서 살고 있지만 아직도 완전히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사랑받기 위해 아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다. 아이는 어머니의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그러므로 아이에게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이러한 경험이 수동적인 경험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독립의 정도가 높아진다. 아이는 걷는 것을 배우고, 말하는 것을 배우고, 스스로 세계를 탐험할 줄 알게 된다. 이제 아이는 사랑받기 위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사활과 관련되는 중요성을 차츰 잃게 되고 그 대신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점점 더 중요해진다. 여섯 살 이후 어린아이에게는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권위와 지도가 필요해진다. 이때, 아버지는 아이를 지도하여 사회로 들어서는 길을 인도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곧, 아버지는 사상, 인공적 사물, 법률과 질서, 훈련, 여행과 모험 등의 세계를 대표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의 원칙은 '너는 나의 기대를 충족해주기 때문에, 네 의무를 다하고 있기 때문에, 나를 닮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적어도 권위와 지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조건 있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사랑의 본성에는, 복종은 주요한 덕이고 불복종은 중요한 죄라는 사실이 가로놓여 있다.

이상적인 경우에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을 모두 받고 성장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이의 성장을 방해하거나 무력감을 조장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기쁘게 지켜보고 그 아이가 마침내 독립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진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단지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닌, '삶에 대한 사랑'을 천천히 길러준다. 아버지의 사랑은 원칙과 기대로 인도되어야 하며, 위협적이고 권위적이기보다는 참을성이 있고 관대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 역시 성장하는 아이에게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끔 도와줘야 하고, 마침내 아이가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권위를 갖고 아버지의 권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그래서 아이의 성장은 아이가 어머니다운, 그리고 아버지다운 양심을 갖게 되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진다. 결국,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정신적 건강과 성숙의 기반은 어머니 중심의 애착에서 아버지 중심의 애착으로의 이와 같은 발달, 그리고 이러한 애착의 궁극적 종합에 있다. 반대로 이러한 발달의 실패가 각종 신경증의 근본 원인이다.

2.3.2. 성숙한 사랑

미성숙한 사랑(공서적 합일)은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복종함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고립감과 분리감에서 도피한다. 그는 모든 것이고 내가 그의 일부인 한 나는 위대성, 힘, 확실성이며, 그의 일부가 아닌 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고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나는 외롭지 않을 것이나 결코 독립하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완전히 탄생하지 못한 자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을 지배하여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서 고독의 감정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을 숭배하는 다른 사람을 흡수함으로써 자신을 팽창하고 강화시킨다. 양자는 서로 의존하는 관계이며,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이 살아갈 수 없다. 한쪽은 명령하고 착취하고 상처를 입히고 모욕을 가하고, 다른 한쪽은 명령받고 착취당하고 상처를 입고 모욕을 당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을 추구한다. 사랑은 인간들 사이의 벽을 허물어버리고 동료가 되게 하는 능동적인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하고자 한다면,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적극적인 활동이며, 그 활동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오해는 준다는 것이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 희생하는 것이라는 오해이다. 특히, 시장형 성격의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가 주는 경우에도, 단지 받는 것과의 교환을 의미할 뿐이다. 그에게는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는 것은 사기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산적인 성격의 사람에게 있어서,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에게 주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이다.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서 그는 그의 힘, 그의 부, 그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그는 매우 큰 환희를 느낀다. 그는 그 자신을 넘쳐흐르고 소비하고 생동하는 자로서, 따라서 즐거운 자로서 경험한다. 주는 것은 결코 희생하는 것이 아니며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이런 사람은 단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ㅡ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모든 표현과 현시를 기꺼이 준다. 그는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줌으로써 타인을 풍요롭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그는 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생명에 무언가를 야기시키고, 다른 사람의 생명에 야기된 것은 다시 그에게 되돌아올 수밖에 없어서,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마저 '주는 자'로 만드는 기쁨이 된다.

이러한 순수한 사랑의 공통된 기본 요소에는 보호, 책임, 존중, 지식 등이 있다. 사랑에 '보호(care)'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동물이나 꽃에 대한 사랑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인 관심이다. 적극적인 관심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보호와 관심에는 사랑의 또 하나의 측면, 곧 '책임(responsibility)'이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책임은 다른 인간 존재의 요구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 수 있고, 응답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응답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문제는 그 사람의 문제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책임을 느낀다.

그러나 만일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중(respect)'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존중은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인정하는 능력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 나는 내가 이용할 대상으로서 그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존중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존중하려면 그를 잘 '알지(knowledge)'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화가 났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를 사랑함에 따라, 그가 화를 냈다는 것 이상으로 그의 감정을 더 깊이 알게 된다. 그러면 나는 그가 불안하고 근심에 싸여 있으며, 외로움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나, 우리는 직접 사랑에 뛰어듦으로써 ㅡ행위, 이것이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우리의 유일한 방법이다ㅡ 그의 가장 내면적인 핵심에 침투해 들어갈 수 있고, 중심 대 중심으로서 그와 마주할 수 있다. 그런 앎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비밀을 열어젖힐 수 있다.

2.3.3. 사랑의 대상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단지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한다. 올바른 대상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그 밖의 일은 모두 저절로 잘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생적 애착, 즉 확장된 이기주의다. 이런 사람들은 사랑이 활동이라는 것을, 영혼의 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즉, 사랑은 특정한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인 것이다.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이 모든 사람과 관계하는 성격의 방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받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형제애
    사랑의 모든 형태의 바탕에 놓여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랑은 형제애이다. 형제애는 동등한 자 사이의 사랑, 즉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동등하다는 것은 차이가 없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언젠가 스스로의 발로 서서 걸어야 한다는 것,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상태라는 것이다. 이 사랑은 배타성이 없다. 형제애는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의 능력을 발달시켜왔다면, 나는 내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형제애를 통해 사람들과의 결합과 인간적 유대와 인간적 일치를 경험한다.
  • 모성애
    모성애는 마치 자신의 일부라고 느끼는 아이의 생명과 욕구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이다.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관계이며, 이 관계에서 한쪽은 전적으로 도움을 구하고 다른 한쪽은 도움을 준다. 아이의 웃음이나 만족하는 표정 말고는 아이에게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는데도 대부분의 어머니는 아이를 원하고 행복해하며 열심히 돌본다. 심지어 아이가 성장하여 결국 독립하게 되더라도 어머니는 아이의 성장을 기뻐하며 모든 것을 주면서도 사랑하는 아이의 행복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자라나는 어린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곧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은 아마도 가장 달성하기 어려운 사랑의 형태일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나는 모든 아이, 나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아이를 사랑하게 된다.
  • 성애
    성애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과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성애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며 형제애와 모성애에는 없는 독점욕이 있다. 흔히 성애의 독점욕은 소유적 애착으로 오해되며, 현대인들에게 사랑은 자발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의 결과로써, 거역할 수 없는 폭발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갑자기 친밀해지는 경험으로 생각된다. 이들에게 친밀감은 우선 성적인 끌림과 접촉을 통해 확립되지만 이런 경험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희박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 새로운 타인과의 사랑을 추구하게 되고, 이로써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다시금 유쾌하고 강렬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경험 역시 차츰 덜 강렬한 것이 되고 마침내 또다시 새로운 사랑을 바라게 된다. 이것을 사랑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해 단순히 강렬한 감정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랑은 결의이자 판단이고 약속이어야 한다. 사랑은 의지의 소산이다.
  • 자기애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할 줄 아는 힘의 실현이고 집중화이다. 그런데 사랑은 본질적으로 인간 성질의 구현으로서, 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는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이 내포되어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원칙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곧 나 자신의 자아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어떤 개인이 생산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있다. 만일 그가 오직 다른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 신에 대한 사랑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만일 그가 일신론적 관념의 본질에 따른다면, 어떠한 일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고 신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어린아이가 어버이에 대한 유치한 의존 상태를 유지하듯 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신은 인간 진화의 초기 단계에서 인간이 갈망하던 모든 것, 곧 정신 세계의 영역을 나타내는 상징 ㅡ 사랑과 진리와 정의의 상징이다. 그는 '신'이 대표하고 있는 이 원리를 믿는다. 그는 진리를 생각하고, 사랑과 정의에 따라 살고, 자신의 인간적인 힘을 더욱 충분하게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에만, 자신의 전 생애는 보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있어서 겸손하다. 그래서 그는 신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신의 이름도 말하지 않는다. 신을 사랑하는 것은, 만일 그가 계속해서 이 말을 사용해야 한다면,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충분히 획득하기를 갈망할 때 신이 그의 편이 되어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2.4. 사랑의 실패

자본주의 문화의 사회 구조와 이러한 사회 구조로부터 발생한 정신은 성숙하고 생산적인 성격을 가지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을 보기 힘들게 만든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일을 결정하는 요인은 시장에서의 교환이기 때문이다. 상품시장은 상품이 교환되는 조건을 결정하고 노동시장은 노동력의 획득과 판매를 결정한다. 상품은 아무리 유용하고 필요하더라도, 시장에서 수요가 없으면 경제적 교환 가치를 지니지 못하므로, 노동자는 굶어죽지 않으려면 현재의 시장 조건에 따라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자본이 노동력을 지배하게 되는 이런 경제적 구조가 가치의 위계질서에 반영되면서, 생명이 없는 상품이 살아 있는 인간의 힘, 곧 노동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게 된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래로 자본주의의 기본 구조였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점점 더 노동은 철저하게 분업화되고 개인은 개성을 잃고 소모적인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면서, 사람은 하나의 상품으로 변하고 개인은 현재의 시장 조건 아래서 최대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투자로서 자신의 생명력을 경험한다. 인간 관계는 근본적으로 소외된 자동 기계 같은 관계가 되고, 사랑마저도 교환할 수 있고 공정한 거래를 희망할 수 있는 '퍼스낼리티라는 상품'으로 취급된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의 애정 관계가 상품 및 노동시장을 지배하는 교환 형식과 동일하다고 해서 놀랄 이유는 없다. 시장 지향적이고 물질적 성공이 현저한 가치를 지니는 문화권에서 사랑이란 일종의 거래와 같은 것이다. 상대는 사회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보아 바람직해야 하며, 동시에 상대자도 나의 명백한 또는 숨겨진 재산과 능력을 고려한 다음 나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교환 가치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서로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최상의 대상을 찾아냈다고 느낄 때에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거래'로 볼 경우, 인간이라는 상품의 가치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고, 가치가 떨어진 모든 상품은 외면당하게 되므로, 결국 거래로 이루어진 사랑은 언젠가 모두 파탄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온갖 미숙한 사랑과 사이비 사랑이 세상에 나와 극성을 부리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 사람들은 지능적ㆍ사회적으로는 자신의 생활 연령 수준에 도달해 있지만, 애정에 있어서는 5살 또는 12살 어린아이가 요구하는 사랑의 모습을 보인다. 오늘날 자주 볼 수 있는 신경증적 애정 관계는, 독립할 나이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에 대한 유아적 애착을 아직 벗어나지 못해서 어머니가 그에게 줬던 무조건적 사랑을 다시금 갈망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의 목적은 사랑받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은 보통 상당한 허영심이 있어서, 상대가 계속해서 그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다면 갈등과 분노를 표한다. 신경증적 증상의 다른 형태는 주로 아버지에게 애착을 느끼는 경우이다. 그는 애착을 느끼는 사람에게서 아버지 상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는 성공지향적이지만, 상대와 핵심적인 경험에 있어서는 가벼운 경멸감을 갖고 한 걸음 떨어져 있으려고 한다. 결국 상대는 사랑에 대해 이차적 역할밖에 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좌절한다. 한편, 어버이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 불만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에 있어서 자식의 신경증적 장애는 더욱 복잡하다. 자식이 경험하는 것은 '예의 바른' 분위기이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밀접한 관계를 갖게 하는 분위기는 결코 아니어서 자식은 당황하고 무서워한다. 이런 분위기는 그의 애정 관계를 항상 신비에 빠지게 만들고 굳건한 불안은 강렬한 흥분을 갈구하게 한다.

흔하지는 않으나 가끔 강렬하고 갑작스러운 사랑으로서 경험되는 사이비 사랑의 형태는 '우상 숭배적 사랑'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생산적 전개의 힘을 믿지 못하는 단계에 있으면, 그는 상대를 우상화하기 쉽다. 그는 상대를 최고 선, 곧 온갖 사랑, 온갖 빛, 온갖 지복을 간직하고 있는 자로서 숭배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힘에 대한 모든 감각을 박탈하고, 자기 자신을 찾는 대신 상대에게서 그 힘을 찾는다. 그러나 대체로 우상시하는 자의 기대에 맞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실망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의 사랑은 실패하고 만다. 사이비 사랑의 다른 형태는 '감상적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은 환상 속에서만 경험될 뿐이다. 그는 영화와 잡지의 사랑 이야기나, 사랑 노래의 소비자들에 의해 경험되는 사랑에서 만족을 얻으나, 사랑이 실제로 두 사람 사이의 현실적인 관계가 될 때, 그는 얼어붙는다. 또 하나의 형태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고 그 대신에 상대의 결함이나 결점에 관여하려는 '투사적 사랑'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사소한 결점까지도 낱낱이 비판하지만, 자기 자신의 결점은 천역덕스럽게 무시해버린다. 그러나 실존의 문제는 각자 스스로의 힘으로서만 해결될 수 있고 남이 대신 해결해줄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문제는 내면에서 풀리지 않은 채로 남게 되고, 그의 사랑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된다.

사랑의 실패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 오해는, 사랑은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고통과 슬픔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가 사랑이라고 믿고 있다. 갈등은 어느 쪽에게도 좋은 결과를 초래하지 못하고 오직 서로를 파괴해버릴 것 같다는 사실에서 그들은 이러한 생각에 대한 좋은 이유를 찾아낸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갈등은 사소한 또는 피상적인 문제에 대한 의견의 불일치이고, 두 사람 사이의 진짜 갈등, 곧 은폐하거나 투사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고 그들이 속해 있는 내면적 현실의 차원에서 경험되는 갈등은 전혀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갈등은 명료해지고 카타르시스 작용을 하며, 이러한 카타르시스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더 많은 지식과 힘을 갖게 된다.

두 사람이 서로 그들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오직 이러한 '핵심적 경험'에만 인간의 진실이 있고 오직 여기에만 생기가 있고 오직 여기에만 사랑의 기반이 있다. 이와 같이 경험되는 사랑은 끊임없는 도전이다. 그것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곳이다. 거기에 조화, 갈등, 기쁨, 슬픔 중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에센스 차원에서 경험하는 것이요, 각자가 자신들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서로 합일되는 것이다. 사랑의 현존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의 증거가 있을 뿐이다. 곧 관계의 깊이, 관련된 각자의 생기와 힘이 그것이다.

2.5. 사랑의 실천

만일 우리의 온갖 사회적ㆍ경제적 조직이 각자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바탕을 두고 있다면, 이 조직이 공정성이라는 윤리적 원칙에 의해서만 조절되는 이기주의적 원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현존하는 사회의 틀 안에서 활동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 사랑의 실천은 우리의 모든 세속적 관심을 포기하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견해는 사실상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만일 진지하게 이와 같이 실행한다면 굶어 죽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은연중의 냉소를 합리화한다. 이러한 급진주의는 곧바로 도덕적 허무주의로 변한다. 물론 사랑과 일상적 생활이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는 대답은 추상적 의미에서만 옳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구체적으로 본 현대 사회는 그 자체로 상당한 불일치나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는 끊임없이 변하는 복잡한 구조라는 점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탐욕스러운 물질지상주의 정신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은 예외적으로 이 정신에 맞서서 성공적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사랑은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 대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을 처방하기는 어렵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자기 혼자서 몸소 겪어야 하는 개인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의 기술의 전제 조건을 검토하고 그 접근법의 실용을 찾는 것은 사랑의 기술의 숙달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처방'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풀려난 사람들에게는.

우선 기술의 실용에는 '훈련'이 요구된다. 훈련된 방식으로 이 기술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 기술에 숙달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훈련을 하는가? 그것은 매일 일정한 시간 동안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사랑은 사랑의 어떤 특정한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닌 전 생애를 통한 훈련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훈련을 즐겁게 생각하며 훈련을 그만두면 결국 실패하게 될 행동에 천천히 익숙해지는 것이 본질적인 일이다. 훈련은 어쨌든 고통스러운 것으로 가정해서 고통스러운 훈련만이 좋은 훈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서양의 훈련에 대한 개념의 불행한 한 측면이다.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에게 좋은 것은, 비록 처음에는 약간의 저항을 극복해야 하더라도 역시 즐거운 것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자기훈련 이상으로, '정신 집중'이 어떤 기술을 습득하는 데 필수조건이라는 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다.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집착한다면, 그 또는 그녀는 생명을 구조하는 자일 수는 있지만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이 된다. 바로 이 순간 하고 있는 활동이 유일하게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하고 이 일에 몰두해야 한다. 정신을 집중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현재에,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 따라서 지금 무엇인가 하고 있으면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신 집중은 일차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는 뜻이며, 말할 것도 없이 정신 집중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실행해야 한다.

세 번째 요소는 '인내'이다. 기술에 숙달하려고 해본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일을 달성하려면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빠른 결과만을 바란다면, 우리는 결코 기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모든 일은 이루어지는 때가 있고,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하고 억지로 할 필요가 있다. 인내가 어떤 것인지 알려면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를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어린아이는 계속 시도하며 조금씩 고쳐나가서 결국 어느 날엔가는 쓰러지지 않고 걷는다. 만일 어른이 중요한 일을 추구하면서 어린아이 같은 인내와 정신 집중에 도달한다면, 무슨 일인들 성취하지 못하겠는가!

끝으로, 어떤 기술을 배우는 조건은 기술 습득에 대한 '최고의 관심'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민감하지' 못하면 정신 집중도 배우지 못한다. 우리는 어머니의 어린아이에 대한 민감성과 재빠른 반응에서 가장 현저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어머니는 아이의 약간의 신체적 변화, 요구, 불안 등을 그것이 분명하게 표현되기 이전에 알아차린다. 어머니는 아이가 울면 곧 잠이 깬다. 다른 소리였다면 훨씬 요란하더라도 깨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러한 모든 일은 어머니가 아이의 생명의 표현에 민감함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불안하거나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보내는 의미 있는 커뮤니케이션은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빈틈없는 균형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민감할 수 있다. 이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피곤하다는 느낌, 또는 우울하다는 느낌을 알고 피로감에 젖거나 언제나 신변에 따르기 마련인 우울한 생각으로 우울감을 부채질하는 대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왜 나는 우울한가?'라고 묻는다.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는 왜 내가 불안하고 우울하고 조바심내는가를 말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