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0-26 17:46:34

빌헬름 세바스찬 폰 벨링



파일:Wilhelm_Sebastian_von_Belling.jpg

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2.3. 7년 전쟁2.4. 이후 경력

1. 개요

프로이센의 장성.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 시기 기병대 지휘관으로 활약했고 포메른에 침입한 스웨덴군에 맞섰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벨링은 1719년 2월 15일 동프로이센의 폴스도르프에서 태어났다. 그가 속한 벨링 가문은 1270년대부터 포메른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간 군인 집안으로, 역대로 많은 인물들이 폴란드, 헝가리,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서 복무하며 명성을 떨쳤다. 벨링은 이러한 가문의 전통에 따라 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1737년 18셀의 나이에 키가 크지 않다는 이유로 자격 미달 판정을 받고 콜베르크 수비대로 전출되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 의해 코넷으로 임명되어 동프로이센 후사르 중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한 1741년, 벨링은 치텐 후사르 연대의 중위가 되었다. 이후 그는 몰비츠 전투, 호엔프리드베르크 전투, 케셀스도르프 전투에 참가해 프로이센군의 연승에 한 몫을 톡톡히 했다. 이후 전쟁이 끝난 1749년, 벨링은 30세의 나이에 베흐마르 후사르 연대의 소장이 되었다.

2.3. 7년 전쟁

7년 전쟁이 발발한 후인 1758년 2월, 프리드리히 대왕의 친동생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왕자가 이끄는 신 블랙 후사르 연대가 결성되었다. 벨링은 이 새로운 후사르 연대의 지휘를 맡아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1759년 8월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아군이 대패하는 와중에도 분전한 그는 무공 훈장을 수여받았고 잠시 동안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후 1760년에 포메른에 파견된 벨링은 스웨덴과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벨링은 1760년부터 1761년까지 5,000명의 프로이센군을 이끌고 15,000명에 달하는 스웨덴군을 상대로 큰 손실을 입어가며 스웨덴군이 오데르 강 건너편에 있는 동부 포메른에서활동하는 러시아군 분견과 합세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였고 1762년 7월 4일 소장으로 승진했다. 그 후 러시아와 스웨덴이 프로이센과 강화를 맺고 전쟁에서 이탈한 뒤, 그의 경기병 2,250명은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왕자의 지휘하에 작센으로 침공하는 프로이센군에 배속되어 10월 29일 프라이베르크 전투에 참가해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2.4. 이후 경력

7년 전쟁이 끝난 후, 벨링 휘하 후사르 3개 대대는 2개로 줄어들었고, 검은 제복을 진홍색으로 바꾸었다. 그의 연대는 동부 포메른의 콜베르크에서 동쪽으로 약 113km 떨어진 스톨프에 자리를 잡았다. 1776년 벨링은 중장으로 승진했고 1778년엔 검은 독수리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매년 1,000 탈러의 연금을 지급받았다. 그러나 벨링은 불과 1년 후인 1779년 11월 28일 심장마비로 사망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영예를 다 누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