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베르트 트라우트만의 맨체스터 시티 FC 경력을 소개하는 문서.2. 경력
세인트 헬렌스 파크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 그는 1949년 맨체스터 시티와 계약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이력을 두고 25000여명의 팬들이 시위를 하며 경기 보이콧을 외칠 정도로 큰 반대를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맨시티의 주장이자, 참전자인 에릭 웨스트우드[1]는 베르트와 대면에서 "이 라커룸에서는 전쟁이 없다, 나는 너를 환영하며 앞으로 행운을 빌겠다." 며 호의를 보였다. 이후 맨체스터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 알렉산더 알트만도 일방적인 증오로 베르트 트라우트만을 추방하는 건 옳지 않다는 뜻을 보이며 맨시티 팬들을 설득했다.베르트는 11월 볼튼 원더러스와 경기에서 데뷔하여 꾸준히 좋은 활약을 이어갔고, 풀럼 원정 경기를 위해 런던을 방문했을 때는 폭격 피해자들에게 야유와 비난을 들었지만, 꿋꿋하게 선방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1950년 베르트는 마가렛 프리어와 결혼을 한다. 장남 존은 결혼 후 7개월 후에 태어나는데, 이 결혼 생활은 1956년 장남의 교통사고 사망으로 파국을 맞게 되었다.[2][3]
1955년 FA컵 결승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선방을 펼치지만 팀은 패배하여 준우승에 그친다. 하지만 베르트 트라우트만은 잉글랜드 축구 협회에서 지정한 올해의 선수[4]로 선정되었다.
다음해 베르트는 다시 FA컵 결승에 섰고, 팀은 버밍엄 시티를 상대로 우승을 다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후반 70분경 피터 머피의 슛을 막다가 부상을 당해 고전했지만, 팀은 3-1로 승리를 거두며 우승컵을 든다. 사흘 후 X레이 검사에서 목뼈가 부러진 사실이 밝혀졌다.[5] 그는 이 결승전을 "17분을 안개 속에서 뛰었다"고 회고했다.
수술을 마치고 다다음 시즌에 복귀한 베르트는 1964년까지 맨시티에서 508경기를 뛰었다.
맨체스터 시티에서 총 15년간 뛰었는데, 활동한 시기가 오랜만큼 많은 일화가 있는데, 그 중 유명한 것은, 플레이 중 선수와 부딪쳐 목뼈가 부러진 상황에서도 끝까지 팀의 골문을 지켰다는 일화가 있다.
1955-56 시즌 FA컵 결승전때 일이다. 당시 영상이 유튜브에 있는데, 경기 끝난 후 뿐만 아니라, 수상식까지 지켰다! 경기 중이나 이후 수상식때도 계속 목을 잡고 있었는데, 처음엔 그리 심각한 부상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듯. 부러진 목뼈는 2개였는데, 다행히 신경이 손상되지 않았고 금이 간 상태에서도 목뼈가 간당간당하게 붙어 있어 전신불수가 되는 위험은 모면했다. 심지어 목뼈가 부러졌다는 걸 알게 된 건 경기가 끝나고 3일 후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은 다음이었다.[6]
3. 평가
에데르송과 조 하트를 넘는 맨시티 최고의 골리로 평가받는다.맨체스터 시티에서의 전설적인 경력을 공로로 인정 받아 잉글랜드 4등급 훈장인 OBE를 수여받았다. 웬만한 영국 내 베테랑 직업인들도 수여하기 어려운 것을 독일인인 트라우트만이, 그것도 나치 독일군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7] 어쨌든 그가 맨시티의 전설적인 선수였다는 것은 사실인 셈.
[1] D-Day 상륙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2] 장남의 사망이 결정적이었지만, 마가렛은 남편의 화려한 인기에 관심이 있었을 뿐, 그의 선수 생활을 돕는데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3] 마가렛과 결혼 생활은 1971년에 끝났고, 이후 우르슬라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8년을 살다가 이혼, 마를리스와 세번째 결혼을 하고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생활한다.[4] 골키퍼로서 최초 선정에 외국인으로서도 최초였다.[5] 당시에는 목뼈가 부러진 줄도 몰랐지만, 사흘동안 통증이 지속되자 결국 검사를 받았고 골절 판정을 받고 대수술을 한게 된다.[6] 다만 이 부상으로 다음 시즌은 거의 통째로 날렸고(하마터면 맨시티는 강등될 뻔했다.), 그 다음 시즌에도 부진하면서 맨시티가 한 경기에 9골이나 먹는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 부상 후유증도 문제였지만, 이때 장남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아내도 이 때문에 심한 우울증을 겪으면서 트라우트만 본인의 심신도 정상이 아니었다.[7] 사실 트라우트만은 병역 때문에 프로데뷔 이전인 41년부터 44년 까지 군 생활을 하다 전역했다. 트라우트만이 프로 데뷔한 해는 1948년이지만, 그래도 당시 영국에는 독일에 대한 반감이 많이 남아 있었다. 젊은 세대 상당수가 전쟁에 참전하거나 혹은 독일의 폭격으로 고통받았기 때문.(당장 이웃팀 유나이티드 경우엔 올드 트래포드가 폭격으로 날아가서 메인 로드에 더부살이를 해야 했다.) 그래서 그가 맨시티에 입단할 당시에는 이를 반대하는 여론이 적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커리어를 쌓아 영국과 독일 양국의 레전드 스포츠맨으로 인정받았으니 이는 정말 대단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