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3 20:00:26

박재홍(1845)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박홍진(朴洪鎭)
자 / 호 성오(聖五) / 양초(梁蕉)
본관 밀양 박씨
출생 1845년 12월 5일
전라도 남원도호부 이언면 상동리
(현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
사망 1910년 3월 14일
전라북도 남원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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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재홍은 1845년 12월 5일 전라도 남원도호부 이언면 상동리(현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의 양반가에서 박정하(朴貞夏)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정하는 1880년(고종 17) 증광시(增廣試) 진사시(進士試)에 3등 181위로 입격하였다.#

그 또한 1874년(고종 11) 증광시 생원시(生員試)에 3등 11위로 입격하였다.# 그러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향리에 은거해 지내던 그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의 우국지사들과 더불어 시국을 좌시할 수만은 없다고 결의하고 동지를 규합했다.

그러다 남원군수 양한규가 의병 천 명을 모아 남원읍으로 진격하려 하자, 그는 이에 가담하여 참봉 유병두(柳秉斗)[1], 상인 양문순 등과 함께 양한규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지휘를 받기를 청하였다.

음력 1906년 1월 1일 닭이 울 무렵, 남원 의진은 양한규의 지휘하에 읍내로 진격하여 들어갔다. 불의의 습격에 놀란 진위대 군사와 순검들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그중 경부 1명은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은 채 겨우 달아났다. 이로써 큰 희생 없이 남원 성중을 장악할 수 있었다. 4대문은 의병들에 의해서 파수되었으며, 진위대 소속 무기와 군수품은 모두 의병들에 의하여 접수되었다.

그러나 불행히 의병 대장 양한규가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다가 탄환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장병들을 향하여 "나는 지금 죽겠소. 국사가 망극(罔極)하오. 제공들은 힘써 싸우기 바라오."하고 숨을 거두었다. 관군은 양한규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반격에 나섰고, 의병대는 지휘관의 갑작스런 상황에 낙심하여 모두 흩어졌다.

박재홍은 남원성에서 탈출한 뒤 각지를 떠돌다 더이상 버틸 수 없자 자진하여 경찰에 출두했다. 그는 진도군으로 유배된 뒤 고초를 겪다 1910년경 석방되었지만 기력을 상실하여 그해 3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박재홍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1902년(고종 39) 6월 11일, 종9품 숭인전(崇仁殿) 참봉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