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규병(朴奎秉) |
본관 | 밀양 박씨 |
생몰 | 1889년 1월 5일 ~ ? |
출생지 |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원일전리[1]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규병은 1889년 1월 5일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원일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전국에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동네 사람인 박용규(朴容圭)[2]와 현북면 장리 교사 이성윤(李聖允)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현북면 일대에서도 벌이기로 계획했다. 본래 4월 9일 양양읍 장날에 사람들이 모일 때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했지만, 만세시위계획에 가담한 이들 중 한 명인 박원병(朴元秉)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있다가 양양경찰서에 구금되자 부득이 4월 6일에 원일전리 가마솥 제조장에서 40명의 군중에게 만세시위계획을 알렸다.4월 7일 아침, 박규병은 장동리현으로 가서 그곳에 운집한 300명을 이끌고 양양읍내로 행진했고, 용천리에서 만난 경찰을 향해 구속자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그는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119년 4월 19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으로부터 징역 1년 2개월 판정을 받자, 이에 불복하여 공소를 개시했다. 그러나 1919년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그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형이 확정되었고, 이후 그는 원산형무소에서 옥고르르 치르다가 1920년 4월 27일에 석방되었다. 이후 그가 어떻게 살았으며, 언제, 어디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박규병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