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09 18:43:07

바바 타츠이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바바 다쓰이(馬場 辰猪, 1850년 5월 15일 ~ 1888년 11월 1일)는 일본의 무사(武士, 토사번사), 사상가, 정치 논객이다. 민권 사상가로서 번벌 정부와 대립하며 가장 급진적이고 국수주의적인 '국우회'를 조직한 인물. 호는 우지야스(氏保), 통칭으로 진이노(辰猪)라고 한다.

2. 생애

가에이 3년(1850년) 도사번사 바바 라하치(馬場来八)의 둘째 아들로 도사국 고치성 아래 나카지마쵸에서 태어났다. 번교 '분무칸(文武館)'에서 공부하고, 에도 유학의 번명을 받아 게이오 2년(1866년), 테츠포즈에 있던 나카쓰번 저택의 후쿠자와주쿠(福澤塾, 훗날의 게이오대학)에서 정치사, 경제학을 배웠다. 그 후, 나가사키에 가서 나가사키 영어전수소에서 네덜란드인 선교사 구이도 풀베키에게 영어를 배웠다. 메이지 2년(1869년), 게이오대학으로 돌아와 교사로도 활동했다. 메이지 3년 7월 12일(1870년 8월 8일) 도사번의 유학생으로 마나베 마사정, 쿠니자와 신쿠로, 후카오 가이사쿠, 마츠이 마사미즈 등과 함께 영국에 유학하여 해군과 법학을 배웠다.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는 "귀국 후에는 우리 민족의 데스티니를 담당해 주길 바란다"며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바바는 메이지 초기의 가장 축복받은 신지식인으로서 일본의 미래를 위해 폭넓게 서구의 정신을 배우고, 동시에 일본의 현 상황에 대한 서구의 이해를 구하고자 하는 사명감에 충만해 있었다. 출신 가문의 벽을 허물기 위해 오노 아즈사와 함께 '일본인 학생회'를 조직하고 메이지 7년(1874년)에 귀국했다. 이듬해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체류 중 정부 유학생이 된다. 유학 중 1873년 출판한 『ELEMENTARY GRAMMAR OF THE JAPANESE LANGUAGE WITH EASY PROGRESSIVE EXERCISES』(일본어문전)의 서문에서 모리 유례의 국어 영어화론을 비판하여 일본어 논쟁 등 훗날 '국어국자문제'로 불리게 된다. 1875년 10월 런던에서 『The English in Japan : what a Japanese thought and thinks about them』을 출간. 1876년 9월 런던에서 『The Treaty between Japan and England』(일영조약론) 출간. 불평등조약이 영국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며 평등조약의 제정을 호소한다. 미들템플 법학원에서 호시타케와 함께 공부했지만, 바바 같은 지적 엘리트를 싫어하는 호시와 맞지 않았고, 그 만남은 논쟁 끝에 몸싸움으로 끝났으며, 그 후로 교제는 없었다고 한다. 일본인 최초의 바리스타(법정 변호사) 자격 취득자가 된 호시와 달리 바바는 바리스타 취득 과정 이수를 포기했다. 그 후 프랑스에도 갔다. 영국 유학 중 도사번 영국 유학생들의 단장이었던 마나베 마사세이(真辺正精)와 결투를 벌여 마나베에게 부상을 입혔다. 메이지 11년(1878년)에 귀국. 이 유학에서 진이노 사상의 핵심인 언론 사상의 자유, '공의여론(公議輿論)'의 중요성을 배웠다.

같은 도사 출신으로 함께 영국에 유학한 오노 아자사와 나카에 조민 등과 함께 『아사노신문』 등을 통해 민권사상을 일본에 소개하며 공존동중을 결성, 교쿤샤의 활동에 참여한다. 정부에 의해 공존동중이 탄압을 받자 스에히로 시게쿄(末広重恭) 등과 함께 '국우회(國友会)' 등의 단체를 설립한다. 메이지 12년(1879년)부터 13년(1880년) 무렵, 공존동중의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郎)-시마다 사부로(島田三郎) 등과 함께 '사의헌법의견(私擬憲法意見)'을 초안했다. 법학에 의한 계몽 활동에 종사하며 국우회를 기반으로 자유민권운동의 이론적 지도자가 되었다. 메이지 12년(1879년) 교쿠사(交詢社) 창립위원으로 사칙규칙 등에 참여했고, 메이지 14년(1881년) 메이지의숙(明治義塾, 미쓰비시상업학교)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는 유신독재를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민심을 개혁하고 독립시켜 사회 공동의 공익을 경영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국민'의 창조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그 온건한 활동도 메이지 13년 집회조례의 확대 해석으로 인해 방해받았고, 정부와의 대결을 전면에 내세워 자유당 결성에 참여한다. 메이지 14년 자유당 결당대회에서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에 이어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의사일정을 운영하며 상원의원이 되었다. 메이지 15년(1882년) 6월 『자유신문』을 창간하고 주필이 되어 '사회의 개량을 희망하고 국가의 대난을 배제하는' 혁명의 필연성을 설파한다. 같은 해 9월 이타가키 후스케의 외유를 비판하다가 이타가키로부터 자유신문 사원(주필)-당 상원의원을 해임당하고 탈당, 연설회를 주최한다.

메이지 16년(1883년), 경시총감 카바야마 자키(樺山資紀)로부터 도쿄에서의 정치연설 금지(6개월간) 처분을 받는다. 그 후 저술 활동에 들어갔으나, 가바야마 사건과 관련하여 '러시아 허무당의 이기로 불리는 다이너마이트'에 주목하여 메이지 18년(1885년) 11월 21일 요코하마 야마노테의 모리슨 상회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팔고 있느냐'고 물었다가 밀정에게 발각되어 검거되었다.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으로 기소되어 오오이시 마사미와 함께 체포된다. 이듬해 6월 2일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6월 12일 오오이시와 함께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다. (오오이시는 이후 귀국하여 헌정당 내각의 각료 등을 역임했다). 미국에서는 '일본의 감옥' 등 정부를 비판하는 신문 기고와 강연을 활발히 한다. 주미공사로 미국에 있던 리쿠쿠 소우미츠(陸奥宗光)를 찾아가 귀국을 권유받는다.

그러나 병고와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유작이 된 '일본의 정세'를 집필하고 메이지 21년(1888년) 11월 폐결핵과 폐렴으로 필라델피아의 펜실베니아 대학병원에서 사망한다. 향년 38세, 최후를 맞이한 것은 이와사키 히사야(岩崎久弥)와 하야시 민오(林民雄)였다. 진이의 무덤은 우드랜드 묘지에 있다. 우에노의 간에이지다니나카 묘지에도 묘비가 있다.

3. 기타

이노우에 치유(井上痴遊)에 따르면, 연설에 능숙한 것은 이 사람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없으며, 세 시간, 네 시간 동안 서서 말문을 여는 웅변은 실로 위대하며, 민중 앞에 웅변법의 연구를 공표한 것은 바바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진정한 서양의 학설로 자유의 이치를 해석한 것도 처음이었지만, 아쉽게도 한학의 힘이 부족해 저서로 볼 만한 것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국회개설과 정당비화 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