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마이클 잭슨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1]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이름 | 잭슨 5 THE JACKSON FIVE | |
멤버 | 재키 잭슨, 저메인 잭슨, 말론 잭슨, 마이클 잭슨, 티토 잭슨 | ||
입성 연도 | 1997년 | }}} |
역대 최연소 빌보드 Hot 100 차트 1위 아티스트 (솔로 아티스트로서 최연소 1위는 12살의 스티비 원더)
마이클 잭슨은 1958년 8월 29일 미국 인디애나 주 개리에서 가난한 흑인 집안의 10명의 자식들 중 8번 째로 태어났었다. 그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은 소아마비로 영구적으로 절뚝거리는 신체적 불편을 안고 있었고 파트 타임으로 가정부 일을 했으며 아버지 조지프 잭슨은 특별한 직업없이 이리저리 떠도는 철강 노동자였다. 조지프는 음악에 관심이 있었고 가족의 수입을 보충할 겸 R&B 밴드인 Falcons와 함께 기타를 연주했었다.
조지프는 자신의 자녀들이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아들들을 모아 잭슨 브라더스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마이클은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초기에는 밴드에 들어가지 못 했지만 마이클이 4살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며 뛰어난 재능을 과시하는 것을 보고 캐서린이 조지프에게 마이클을 밴드의 멤버로 추천했다. 그 결과 마침내, 마이클도 잭슨 브라더스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후 잭슨 브라더스는 '잭슨 파이브' 로 이름을 바꾼다.
마이클은 밴드에서 가장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가창력을 인정받아 1965년 그의 형 저메인과 메인 보컬을 같이 담당하기 시작했다. 마이클 잭슨의 음성은 샘 쿡, 재키 윌슨을 연상케 하는 꽉찬 테너의 목소리로 매우 독특했고 테크닉도 대단하여 결국 저메인을 메인 보컬에서 사실상 밀어내게 된다. 마이클의 'Who's Loving You'를 들어보시라 그 조그만 소년이 어떻게 그렇게 슬프고 아름답게 성인들의 사랑을 외치며 불멸이 된 흑인 거장들의 목소리가 분출될 수 있을까? 소녀들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잭슨 5에게 특히 마이클에게 녹아 들었다.
아무튼 그들은 열심히 여러 지역 탤런트 쇼,학교 축제,스트립 쇼,칵테일 바 등에서 공연을 했고 인디애나주 개리의 소규모 지역 레코드 사인 스틸 타운에서 최초로 'Big Boy'라는 상업용 싱글을 녹음했다. 빌보드 차트에 의하면 10,000장을 넘게 팔았다고 한다. 물론 여러 방송에서도 송출됐고 가족들은 그것을 들으며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이 녹음본은 유실된 줄 알았는데 25년후 재발견 되었고 리마스터하여 재발매 했다. 2014년 롤링 스톤은 시카고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Big Boy를 최초 보도했는데 굉장히 음질이 좋다. 유튜브
잭슨 5, 가운데가 마이클
명성을 쌓은 보이 밴드는 마침내 1969년 스티비 원더, 마빈 게이, 다이애나 로스 등의 대중음악 역사에 가장 중요한 아티스트들을 배출했으며 1961년~1971년 사이 무려 110곡을 빌보드 싱글 차트 Top 10위 안에 진입시킨 흑인음악계의 영원한 전설 모타운 레코드 사와 계약을 체결한다. 모타운은 AM 라디오를 잘 활용했고 대중들이 쉬운 노래를 즐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타운의 특징은 'Kiss (keep it simple, stupid)' 불리는, 간단하고 세련된 멜로디 구조로된 후크 송 위주의 곡들이었다.[2] 잭슨 5는 모타운이 만들어 낸 최고의 상품으로 1970년에만 무려 4곡('ABC','The Love You Save','I'll Be There','I want You Back')을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렸다. 'I Want You Back'은 피치포크 선정 1970년대 가장 위대한 곡 2위에도 오를 만큼 여러모로 기념비적 작품으로 200만장 이상이 팔렸다. 잭슨 5가 대성공을 거둔 뒤 모타운에서는 이들을 주요 마케팅 대상으로 선정하여 잭슨 5의 'J5' 로고가 포함된 여러 물건을 믹스해서 판매했고 각종 TV 방송이나 잡지에도 열심히 나왔다.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발매된 'Jackson 5 Christmas Album'도 상업적 히트는 물론 비평가들에게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 잭슨 5는 당대 최고의 밴드였던 '비틀즈'에 빗대어 '흑인 비틀즈'로 불릴 정도로 10대 흑인들의 우상이 되었고 그 중에서도 메인 보컬이었던 마이클 잭슨은 특히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마이클은 롤링 스톤 잡지의 커버를 장식하기도 했었다.
2014년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잭슨 5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이 밴드 1위로 선정했다
1971년, 마이클은 최초로 솔로 데뷔를 한다. 이때 빌 위더스의 Ain't no sunshine을 멋지게 커버해서 주목을 받았다. 유튜브 그 다음 해 싱글 발매한 'Ben'은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멋지게 불러 마이클 잭슨의 기념비적인 라이브 영상 중 하나로 남게 됐다. 1971년 ~ 1975년 사이 마이클은 총 4장의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 1집 Got to Be There 2집 Ben 3집 Music & Me 4집 Forever Michael 그러나 1,2집 외에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었다. 그럼에도 전형적인 모타운 풍의 마이클 잭슨의 독특하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잘 어울리기에 마이클 팬일 경우 한번 쯤은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잭슨 5의 인기는 영원할 수 없었다. 1972년 마이클 잭슨의 성공적인 솔로 데뷔에도 불구하고 잭슨 5는 차트에서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변화하는 음악 산업에 맞춰 'Dancing Machin'이라는 Funk와 Disco가 멋지게 조화된 좋은 앨범을 발매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가세를 다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와중에 모타운 사와 계약 문제가 불거졌고 잭슨 5 멤버들도 나이를 먹게 되면서 자신들의 예술적 자율성을 인정받아 스스로 레코드를 만들기를 원했다. 잭슨 5를 관리했던 매니저이자 아버지인 조지프는 불안해져 갔으며, 모타운은 '너희들은 어려서 아무 것도 못한다!'며 거절했다. 결국 그들은 1975년 Epic 레코드사로 좋은 로열티를 받는 대가로 이적하기로 한다. 그러자 모타운에서는 계약 위반이라며 법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그들은 '잭슨 5'라는 이름을 쓰지 못 하게 되고 'The Jacksons'로 밴드 이름을 바꾼다. 참고로 저메인 잭슨은 당시 모타운 사의 사장 딸내미와 막 결혼했기 때문에 잭슨즈에 합류하지 못했다. 그래서 잭슨즈부터는 마이클 잭슨 혼자서 메인 보컬을 담당했다.
1976년 잭슨즈는 이적 후의 첫 정규앨범인 'The Jacksons'를 발매한다. 이 중 'Blues Away,Style of Life'는 마이클 잭슨이 처음으로 작곡한 곡으로 앨범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Soul과 R&B,Funk로 구성됐으며 변성기를 거쳐나가고 있는 마이클 잭슨의 부드러운 미성의 목소리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달콤하다. 여기서 싱글 발매된 'Enjoy Yourself'는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6위 'Show You the Way to Go'는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28위를 차지했으며 앨범은 50만장이 팔려나갔다. 그러나 그 다음해 발매한 정규앨범 'Goin' Places'는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실패했다. 이후 그들은 절차부심하여 1978년 흑인음악의 영원한 걸작 중 하나인 'Destiny'를 발매한다. 1곡을 제외하고는 모든 수록곡들을 잭슨즈의 멤버들이 만들고 프로듀싱 했으며 랜디와 마이클이 공동 작곡한 'Shake Your Body (Down to the Ground)'는 8분이라는 긴 런닝타임이 결코 지루하지 않은 디스코와 펑크 장르의 명곡이다. 'Destiny'는 마이클 잭슨 본인의 레코드 중에서도 가장 걸작이라는 평을 받으며 무려 미국에서만 200만장이 넘게 팔렸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도 7위를 차지했다. 한편, 'The Wizard' 영화에 출연한 마이클은 영화 촬영 중 프로듀서 퀸시 존스를 만났고, 같이 음악을 제작하기로 약속한다. 퀸시는 훗날 회고에서 마이클의 첫인상에 대해 지나치게 조용하고 내향적인 사람이라 걱정했다고 한다.
종합하자면 잭슨 5는 70년대 초반 대중 음악에서 가장 큰 현상 중 하나였고 3천만장 이상의 레코드를 판매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1997년 대중음악 역사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록 비평가 1000명의 투표에 의해 선정되는 권위있는 시상식인 Rock & Roll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 1999년에는 VH1이 선정한 록앤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44위에도 선정되었다.[3]
[1]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한다.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야 한다.[2] 모타운 레코드 시기에 마이클은 사장 배리 고디를 유심히 관찰했었고, 성인 시절에도 항상 고디의 원칙을 사용했었다. 마이클은 훗날 인터뷰에서 "배리는 완벽함과 세심함을 요구했었다, 오늘까지 나는 같은 원칙을 사용한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마이클의 자율성이 확대된 Bad 앨범 제작부터 가장 잘 드러난다.[3] 2010년에 재선정 할 때는 탈락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