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마리오 에밀리오 헤리베르토 보예 아우테리오 (Mario Emilio Heriberto Boyé Auterio) |
생년월일 | 1922년 7월 30일 |
사망년월일 | 1992년 7월 21일 (향년 69세) |
국적 | 아르헨티나 |
출신지 | 부에노스 아이레스 |
포지션 | 아웃사이드 포워드, 센터 포워드 |
신체조건 | 187cm | 83kg |
소속팀 | CA 보카 주니어스 (1941-1949) 제노아 CFC (1949) 미요나리오스 FC (1950) 라싱 클루브 (1950-1953) CA 우라칸 (1954) CA 보카 주니어스 (1955) |
국가대표 | 17경기 7골 (1945-1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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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CA 보카 주니어스의 유스팀 출신인 보예는 1941년 6월 8일에 보카에서 CA 인데펜디엔테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고 CA 우라칸전에서 첫 골을 넣었다.그가 보카에서 뛰었던 초기 9시즌 중 보카는 1943년과 1944년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46년에는 그가 24골을 넣어 득점왕이 되었다.
1949년, 보예는 제노아 CFC에서 반 시즌을 뛰었고 18경기에서 12골을 넣어 꽤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보예는 콜롬비아의 미요나리오스 FC로 건너가 한 시즌을 보낸 후 아르헨티나로 다시 돌아왔다. 그의 행선지는 친정팀 보카가 아닌 라싱 클루브였고 라싱의 리그 우승에 힘을 보탰다.
그는 CA 우라칸을 거쳐 1955년, 친정팀 보카에서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했다.
2.1.2. 국가대표
보예도 1940년대에 아르헨티나가 이룩했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3연패의 주축 선수 중 한 명이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보예는 킥력이 좋은 아웃사이드 포워드였다. 그가 가장 선호하던 포지션은 오른쪽이었지만 왼쪽 측면에서도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고 센터 포워드도 소화 가능했다.보예는 1940년대 CA 보카 주니어스의 아이돌 중 한 명이었다. 초기의 보예는 기술적으로 미흡한 면이 있어서 서포터들에게 큰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기량을 끌어올려 곧 보카의 아이돌이 되었다.
4. 뒷이야기
- 1951년 5월 9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렸던 잉글랜드와의 친선 경기에 참가했던 보예는 잉글랜드 선수들과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체격을 비교하면서 경기에서 승리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예는 전반 18분에 골을 넣었고 아르헨티나가 거의 이길 뻔 했지만 후반 34분과 41분, 잉글랜드의 스탄 모텐슨과 재키 밀번에게 골을 먹혀 결국 그의 생각대로 되었다.
- 보예는 레네 폰토니와 함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피자 가게 La Guitarrita(작은 기타)를 열었다. 폰토니가 1983년 사망한 후 보예는 혼자 1992년에 사망할 때까지 피자 가게를 운영했고 이 가게는 지금도 성업중이다.
5. 수상
5.1. 클럽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4회: 1943, 1944(이상 CA 보카 주니어스), 1950, 1951(이상 라싱 클루브)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4회: 1945, 1946, 1947(이상 CA 보카 주니어스), 1952(라싱 클루브)
5.2. 국가대표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우승 3회: 1945, 1949, 1947
5.3. 개인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1회: 1946(CA 보카 주니어스)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