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레알 코우테 Réal Caouett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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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세프-다비드-레알 코우테 |
Joseph-David-Réal Caouette | |
출생 | 1917년 9월 26일 |
캐나다 퀘벡주 아모스 | |
사망 | 1976년 12월 16일 (향년 59세) |
캐나다 온타리오주 오타와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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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이본 카르팡티에 (배우자) 질 코우테 (아들) |
종교 | 로마 가톨릭 |
직업 | 교사, 자동차 판매원, 정치인 |
소속 | 캐나다 사회신용당 |
1. 개요
캐나다의 정치인2. 생애
조제프 다비드 레알 코우테는 1917년 9월 26일 캐나다 퀘벡주 아모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지역 사회와 정치에 관심을 가지며 공공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레알 코에트는 원래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었으나, 1962년 총선을 계기로 퀘벡 사회신용 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전국적인 정치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는 1939년에 사회신용 운동에 참여했으며, 1946년 보궐선거에서 신용연합 소속으로 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이후 연방 하원과 퀘벡 주의회 재입성을 노렸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1961년에는 자신이 이끌던 신용연합을 전국 사회신용당과 합류시키고 당 대표직에 도전하였다. 그러나 로버트 톰슨에게 패배하였고, 이후 그는 톰슨의 부대표이자 퀘벡 지부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1962년 총선에서는 보수당의 소수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당선된 사회신용당 하원의원 30명 중 26명이 코우테를 따르는 인물들이었다. 코우테와 사회신용당은 주로 퀘벡의 농촌 및 소도시 지역구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그의 열정적이고 극적인 연설 스타일과 15분짜리 텔레비전 방송은 그를 퀘벡에서 주요 정치 인물로 부상시켰다. 그는 연방주의를 확고히 지지하였지만, 그의 경제적 견해는 전통적인 사회신용 이론에서 다소 벗어난 급진적인 형태로, 특히 은행을 비롯한 대규모 권력 구조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띠었다.
1963년 9월, 그는 톰슨과 결별하고 12명의 퀘벡 출신 하원의원들과 함께 자신만의 정당인 신용연합을 창당하였다. 이후 몇 차례 선거에서도 당의 의석 수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1971년에는 퀘벡 내 정당과 전국 정당을 통합하여 다시 한번 전국 사회신용당의 대표가 되었으며, 건강 악화로 인해 1976년 앙드레 포르탱(André Fortin)에게 대표직을 넘기기 전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그의 정당은 이후 몇 차례 선거에서 안정적인 지지를 받으며 퀘벡의 제3당으로 자리 잡았다.
1971년, 그는 다시 사회신용당과 합당하여 캐나다 사회신용당의 전국 지도자가 되었으며, 연방 차원에서의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몇 차례 선거에서 당의 의석 수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1971년, 그는 퀘벡에서 분리되어 있던 사회신용당 세력을 통합하고 캐나다 사회신용당의 전국 지도자가 되었다. 1976년 앙드레 포르탱에게 지도자직을 넘겼다.
같은 해 12월 16일, 항년 59세의 나이로 오타와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1]
3. 활동
선거년도 | 선거 | 정당 | 선거구 | 결과 | 비고 |
1946년 | 연방 보궐선거 | 유니옹 데 젤렉퇴르 | 퀘벡주 | 당선(1위) | 초선 |
1949년 | 연방 총선 | 사회신용당 | 퀘벡주 | 낙선 | |
1953년 | 연방 총선 | 사회신용당 | 퀘벡주 | ||
1957년 | 연방 총선 | 사회신용당 | 퀘벡주 | ||
1958년 | 연방 총선 | 사회신용당 | 퀘벡주 | ||
1962년 | 연방 총선 | 사회신용당 | 퀘벡주 | 당선(1위) | 재선 |
1963년 | 연방 총선 | 사회신용당 | 퀘벡주 | 3선 | |
1965년 | 연방 총선 | 사회신용당 | 퀘벡주 | 4선 | |
1968년 | 연방 총선 | 퀘벡 사회신용당 | 퀘벡주 | 5선 | |
1972년 | 연방 총선 | 퀘벡 사회신용당 | 퀘벡주 | 6선 | |
1974년 | 연방 총선 | 퀘벡 사회신용당 | 퀘벡주 | 7선 |
우리는 아무 근거 없이 국민배당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캐나다의 실질적인 가치에 기반한 배당입니다. 우리는 캐나다 전반을 뒤엎으려는 혁명가들이라고 비난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사회신용에는 나름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캐나다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기반으로 통화를 창출하자는 것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우리는 근거 없는 돈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며, 마치 아무 데나 흩뿌리듯 전국에 무차별적으로 돈을 나눠주자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지성 있는 개혁, 즉 캐나다의 생산력을 고려한 정책입니다.
이 국민배당은 캐나다 국민이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배당을 반드시 얻어낼 것입니다. 여기 캐나다에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끈질기고, 끝까지 해내려는 의지가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의장님, 매년 캐나다는 국민배당을 이미 시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다릅니다. 그것은 바로 국가 부채에 대한 이자 지급이라는 형태로 은행에 배당되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만 하더라도 우리는 단지 이자만으로 4억 7,100만 달러를 지불했습니다. 이는 국민 1인당 43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이 나라,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를 일군 것은 바로 캐나다 국민입니다. 이 땅의 모든 기반은 우리의 손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4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배당을 은행가들이 가져가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1948년 1월 29일 - 국가 배당금을 현금으로 지불 할 것이냐는 캐나다 자유당 Maurice Lalonde 의원의 질문에.[2]
이 국민배당은 캐나다 국민이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배당을 반드시 얻어낼 것입니다. 여기 캐나다에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끈질기고, 끝까지 해내려는 의지가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의장님, 매년 캐나다는 국민배당을 이미 시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다릅니다. 그것은 바로 국가 부채에 대한 이자 지급이라는 형태로 은행에 배당되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만 하더라도 우리는 단지 이자만으로 4억 7,100만 달러를 지불했습니다. 이는 국민 1인당 43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이 나라,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를 일군 것은 바로 캐나다 국민입니다. 이 땅의 모든 기반은 우리의 손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4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배당을 은행가들이 가져가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1948년 1월 29일 - 국가 배당금을 현금으로 지불 할 것이냐는 캐나다 자유당 Maurice Lalonde 의원의 질문에.[2]
4. 여담
- 평소에 그는 특이하고 선동적인 발언으로 대중 연설을 했는데, 그럴때마다 영어권 사회신용당 동료들은 코우테가 하는 프랑스어가 종종 번역 과정에서 왜곡된다고 열심히 해명했다. 카우에트의 극적이고 흥미로운 연설은 그리고 15분짜리 TV 쇼에서 빛을 발했다.
- 프랑스 매체 Le Magazine Maclean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웅이 누구냐는 질문에 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를 꼽아버리는 바람에 논란이 터지고 만다. 덧붙혀서, "나는 무솔리니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존경하며, 그가 파시스트였다는 점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히틀러의 경제 개혁을 존경하며, 그가 독일 국민을 빈곤에서 구해냈다고 본다. 다만, 그는 자신의 사상을 평화가 아닌 전쟁을 위해 사용했다는 점이 유감스럽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