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9 10:05:26

라울 당크통빌

성명 라울 당크통빌
Raoul d'Anquetonvill
생몰년도 미상 ~ 1413년
출생지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비흐
사망지 플란데런 백국 브뤼헤
아버지 라울 당크통빌
형제 풀크, 장
직위 부르고뉴 공작 고문, 프랑스 재무장관, 베베른 성주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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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군인. 부르고뉴 공국을 섬기던 귀족으로,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을 암살해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간의 내전을 유발했다.

2. 생애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의 비흐 출신으로, 아버지 라울 당크통빌은 비르의 영주였다. 형 풀크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과 프랑스 국왈 샤를 6세의 비서였으며, 앙크통빌의 영주였다. 또다른 형 장은 1398~1400년 부르르로이의 시장을 역임했고, 뒤이어 국왕의 마구간 종자를 맡았다. 라울은 1383년 부르부르에서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의 수행원으로 처음 언급되었고, 1390년 왕의 마구간 종자로 발탁되어 스코틀랜드로 파견되어 120명의 궁수를 모집했다. 또한 코탕탱 반도 입구에 있는 생콤뒤몽 요새의 요새화된 다리인 퐁두브의 수비대장을 맡았으며, 1396년 샤를 6세의 딸인 이자벨 드 발루아가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왕비가 될 때 지참금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98년 삼부회 고문이 되었지만, 1401년 이자보 드 바비에르 왕비로부터 받은 돈을 다른 데로 빼돌린 혐의로 고발당해 1401년 6월 4일 삼부회에 소환된 뒤 지불해야 할 금액을 상환하고 벌금을 납부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1402년 6월 21일 호담공 필리프의 지원 덕분에 프랑스 재무장관에 선임되어 1404년까지 역임했다. 호딤공 필리프가 사망한 후 재무장관에서 해임되었지만, 왕의 마구간 종자로서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을 섬겼다. 그러나 이자보 왕비에게 지불해야 할 금액을 마련하지 못해 독촉에 시달렸고, 어떻게든 곤궁한 삶에서 벗어나려 했다.

파일:Assassinat_louis_orleans.jpg
오를레앙 공작 암살.

1407년 6월, 라울은 용맹공 장의 지시에 따라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 암살을 준비했다. 그는 왕실 별장 인근에 집을 임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407년 8월 8일, 그는 용맹공 장으로부터 100크라운을 지급받았다. 그해 11월 그는 마침내 파리 마리 지구의 비에유뒤템플 거리에 있는 호텔을 임대하는 데 성공했다. 그해 11월 23일, 루이 1세 도를레앙이 며칠 전에 출산한 이자보 왕비를 방문하기 위해 왕궁으로 향하던 중 마레 지구를 지나갔다. 이때 라울이 암살자 15명을 거느리고 그에게 접근했다. 그의 하인인 토마 쿠르투아즈가 루이 1세 도를레앙에게 다가가서 왕이 전할 말이 있다고 알렸고, 루이 1세는 별 의심없이 그들 앞을 지나갔다. 이때 암살자 한 명이 외쳤다.
"죽여라! 죽여라!"

그리고는 도끼로 그를 공격했다. 루이 1세는 손을 휘저으며 외쳤다.
"나는 오를레앙 공작이다!"

암살자들이 화답했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오를레앙 공작을 낙마시킨 뒤 마구 쳐서 죽였고, 그의 오른손을 잘랐다. 그 후 플란데런으로 도주한 라울은 용맹공 장으로부터 월 50프랑의 급여를 받았고, 1408년과 1409년에 각지로부터 "폭군이었던 오를레앙 공작을 처단한 영웅"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상당한 기부금을 받았다. 1408년 8월 12일, 용맹공 장은 "사랑스럽고 충실한 구원자 라울 당크통빌이 나에게 제공한 위대하고 주목할 만한 공헌"을 기리기 위해 종신 연금으로 1,200 프랑을 책정했다. 1409년 베베른 성주로 선임되어 1410년 말까지 맡다가 피에르 데 에사르로 교체되었고, 1413년 브뤼헤에서 자연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