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03 10:56:10

데키모마누 전투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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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3.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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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15년 가을,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카르타고-사르데냐 반란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2. 전개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뒤,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시칠리아 섬의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했다. 이때 사르데냐는 중립으로 하되 카르타고가 이곳에 병력을 이끌고 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던 기원전 238년, 카르타고에서 반란을 일으킨 용병대가 진압군을 피해 사르데냐로 달아나자, 카르타고군은 이들을 토벌하고자 사르데냐로 출정했다. 그러자 로마는 조약 위반으로 간주하고, 사르데냐를 로마의 속주로 삼는 건 물론이고 배상금까지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카르타고인들은 사르데냐를 어이없게 빼앗긴 일로 분노했고, 사르데냐 현지에 사는 카르타고인들 역시 하루아침에 로마의 속주가 된 후 막대한 세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 했다.

그러던 중 한니발 바르카가 이탈리아에 쳐들어온 뒤 로마군을 연이어 격파하면서, 사르데냐 섬에 대한 로마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카루스 출신의 사르데냐 대지주 함프시코라는 지금이야말로 독립할 때라 여기고, 카르타고에 몰래 사람을 보내 자신의 뜻을 밝혔다. 당시 범무관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맘물라는 임기가 끝나서 후임자로 교체되기를 기다리고 있기에 섬에 별 관심이 없고, 사르데냐에 주둔한 로마군은 얼마 되지 않으니, "우리를 이끌어줄 사람을 보내준다면 기꺼이 카르타고의 통치를 받겠다"고 했다. 카르타고 원로원은 이에 고무되었고, 대머리 하스드루발에게 군대를 맡겨 사르데냐로 파견했다.

함프시코라는 카르타고로부터 지원군이 곧 도착할 거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기원전 215년 반란을 일으켜 키수스 벨리를 점령했다. 맘물라를 대신하여 사르데냐에 도착한 법무관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는 하필이면 도착 직후 병에 걸려서 전투를 지휘할 수 없었다. 그 덕분에, 그는 로마군의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병력을 불릴 수 있었다. 스카이볼라를 대신하여 사르데냐에 부임한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는 5,000명의 보병과 4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반란군 진압에 착수했다.

한편, 대머리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함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발레아레스 제도로 후퇴한 뒤 그곳에서 파손된 배를 수리해야 했다. 그동안 토르콰투스는 함대의 승무원과 노잡이들까지 동원하여 병력 규모를 23,200명까지 불렸다. 로마군이 접근했을 때, 그는 병력을 더 모으기 위해 다른 곳에 가 있었고, 아들 호스투스가 아버지를 대신해 군대를 이끌었다. 그런데 호스투스는 로마군과 정면 대결을 택했고, 그 결과 3,8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잃고 코르누스로 퇴각했다. 그 직후 카르타고 함대가 도착하자, 토르콰투스는 칼라 시로 회군했다. 이후 카르타고-사르데냐 반란 연합군은 칼라 시로 진군하였고, 토르콰투스는 이에 대항하여 출진하면서, 양군은 데키모마누 평원에서 조우했다.

양군의 병력은 대등했으며, 진지를 서로 가깝게 설치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설명에 따르면, 처음에는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고, 다음에는 4시간 동안 격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장시간 회전을 벌이는 데 익숙하지 않았고 전투력도 뒤떨어졌던 사르데냐인들은 결국 패주했고, 로마군은 카르타고인들을 포위해 철저하게 섬멸했다. 이 전투에서 12,000명의 카르타고인과 사르데냐인이 죽임을 당했고, 3,7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27개의 깃발이 로마군에게 노획되었다고 한다.

3. 결과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로마군을 피하지 못하고 포로로 잡혔고, 함프시코라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아들 호스투스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자결했다. 생존자들은 코르누스 시로 탈출한 뒤 며칠간 항전했으나, 토르콰투스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반란을 지원했던 다른 도시들도 인질을 보내며 투항했다. 토르콰투스는 각 도시에 돈과 곡물로 배상금을 지불하게 하고, 포로들을 끌고 로마로 돌아와 원로원에 승리 보고를 하였다. 한편 살아남은 카르타고인들은 서둘러 함대를 타고 아프리카로 떠났지만, 도중에 로마 함대에게 공격당하여 패퇴했다. 로마는 카르타고가 또다시 사르데냐 시를 공략하려 들 것을 우려해 2개 군단을 추가로 배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