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 | ||
K리그 등록명 | 아킨슨 | |
본명 | 데일리언 로버트 앳킨슨 Dalian Robert Atkinson | |
출생 | 1968년 3월 27일 | |
잉글랜드 슈롭셔주 슈루즈버리 | ||
사망 | 2016년 8월 15일 (향년 48세) | |
잉글랜드 슈롭셔주 텔퍼드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83cm |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
프로입단 | 1985년 입스위치 타운 FC | |
소속 | 입스위치 타운 FC (1985~1989) 셰필드 웬즈데이 FC (1989~1990) 레알 소시에다드 (1990~1991) 아스톤 빌라 FC (1991~1995) 페네르바체 SK (1995~1997) → FC 메츠 (1996 / 임대) → 맨체스터 시티 FC (1996~1997 / 임대) 알 이티하드 (1997~2001) → 대전 시티즌 (2001 / 임대) → 전북 현대 모터스 (2001 / 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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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리그 최초의 프리미어리그 출신 선수2. 클럽 경력
2.1. 유럽 무대
1985년 입스위치 타운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하였으며, 강등권 탈출을 고려하던 셰필드 웬즈데이에 입단하게 되었다.
아킨슨은 셰필드에서 10골을 넣는 활약으로 강등권 탈출에 큰 힘을 쏟기도 하였지만, 결국 강등되고 말았고, 잉글랜드 무대를 떠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레알 소시에다드에 입단하게 되었다. 그러나 준수한 활약에도 셰필드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속팀은 극도로 부진한 탓에 한 시즌을 채운 뒤 아킨슨은 잉글랜드 무대 복귀를 타진하게 되었고, 아스톤 빌라에 1991년 7월 입단에 성공하게 되었으며, 1993-94 시즌 풋볼 리그 컵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천금같은 선취 득점을 성공시켜 컵대회 우승의 주역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아킨슨은 1994-95 시즌까지 활동하면서 아스톤 빌라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선수로 성장하게 되었다.
아스톤 빌라 시절 아킨슨은 그야말로 리즈 시절이었는데 피지컬과 유연성, 스피드를 겸비한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손꼽히던 공격수로 평가 받앆다. 특히 프리미어 리그의 첫 시즌인 92-93 시즌의 골로 뽑힌 윔블던 FC전의 엄청난 솔로 골은 프리미어 리그의 역사에 새겨진 명장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먀 해당 시즌 빌라는 리그 준우승을 기록했다.
아스톤 빌라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어가던 아킨슨은 약 4년 만에 터키 리그의 강호 페네르바체의 러브콜을 받고 다시 잉글랜드 무대를 떠나게 되었다. 입단 초기에는 연속골을 넣고 해트트릭을 기록 등 폭발력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점차 부진의 늪에 빠지면서 득점 행진을 멈추고 말았고, 1996년 프랑스의 FC 메스와 당시 잉글랜드 2부에 머물러 있던 맨체스터 시티로 임대를 떠나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앳킨슨의 화려했던 아스톤 빌라에서의 활약은 이후 2011-12시즌 TOPPS EPL 카드에서 20명의 EPL에서 멋진 골을 넣은 골든 카드 선수로 선정될 정도였다. 20명 중에는 웨인 루니, 테디 셰링엄, 맷 르티시에 등 EPL 20년의 역사를 풍미한 레전드 선수들이 포함되었다.
2.2. 알 이티하드 FC
임대 기간에 아킨슨은 부진을 벗어나지 못하고 별 볼일 없는 활약을 이어갔고, 1998년 결국 유럽 무대를 완전히 떠나 사우디 아라비아의 알 이티하드에 입단하며 불안정한 저니맨 커리어를 이어가게 되었으며, 터키에서 시작된 부진을 이어가고 말았다고 한다.또한 설상가상으로 아내가 전재산을 들고 잠적하면서 아내를 잡기 위해 7개월간 동분서주 하다가 몸이 완전히 망가져버렸고, 많은 돈을 잃게 되었다.
2.3. K리그
2001년 파파 오마르 콜리와 함께 대전 시티즌에 입단하면서 대전 시티즌 최초의 외국인선수가 되었다.아킨슨과의 계약은 임대료 2만달러, 월봉 5천달러, 계약기간 6개월의 초단기 소액 계약으로 이루어졌으며, 6개월 후 완전 영입시에는 연봉이 12만달러로 상향조정되는 조건이었다.
대전도 아킨슨의 전성기 기량을 회복하길 바라며 감행한 영입이었지만 반년간 리그 4경기 1골이라는 기대에 못미치는 모습을 보였으며, 가끔 나오는 슈팅이나 드리블은 돋보였지만, 스피드나 체력이 좋지 않아서 도저히 선수로 쓸 몸이 아니었다고 한다.
결국 6개월도 되기전에 대전은 아킨슨과 계약을 해지했고, 아킨슨은 전북 현대로 이적했지만 전북에서도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반년만에 방출되었다.
3. 사망
현지시각 2016년 8월 15일 새벽 1시에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앳킨슨에게 테이저건을 쐈으며 쓰러진 그는 심장마비에 걸렸으며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새벽 3시경 숨을 거두고 만다. 향년 48세.현지 경찰은 해당사건이 경찰 고충처리 독립위원회(IPCC, Independent Police Complaints Commission)로 넘어가서 사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현재 왜 그를 테이저건으로 쐈는지는 불명이다.
아킨슨의 사망 이후 경찰측에서 경과에 대해 함구하는 관계로 과잉진압 논란이 나오기도 하였는데, 정확한 경과는 여러 일들로 심각한 조울증을 겪어 지내오던 아킨슨이 이성을 잃고 자신의 집에서 아버지를 살해하겠다고 협박을 했고, 이 과정에서 출동한 경찰이 아킨슨을 제압하기 위해 테이저건을 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아킨슨은 정신적으로 무너졌지만 몸 또한 많이 망가져 있는 상태로, 신장투석을 몇 년 동안 받을 정도로 정상적인 몸 상태도 아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테이저건을 맞고 바로 쇼크 상태로 들어가 사망으로 이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아킨슨의 사망 이후 과거 그를 사랑했던 아스톤 빌라 팬들과 현역 시절 동료 등이 그를 애도하였으며, 오랜 기간 그를 아껴왔던 은사인 론 앳킨슨도 "비극 그자체" 라고 언급하며 비통한 심경을 밝히기도 하였다.
2019년 11월, 당시 출동한 몽크라는 이름의 경찰관은 앳킨슨의 죽음과 관련하여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 또 다른 경찰관은 실제 신체적 상해를 입힌 폭행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재판은 당초 2020년 9월에 열릴 예정 이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지연으로 2021년 4월로 재판이 연기되었다.
2021년 4월 26일 첫 재판이 열렸고 살인 혐의로 기소된 경찰관들은 무죄를 주장했다. 다음 공판은 5월 4일로 예정돼있다.
앳키슨이 사망한지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논란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21년 5일 4일 앳킨슨 사망사건과 관련한 검찰과 피의자가 된 경찰 측의 2차 공판이 열렸다. 양측의 주장은 이렇다. 검찰은 앳킨슨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던 경찰관 몽크가 규정상 5초간 발사해야 할 테이저건의 방아쇠를 무려 33초나 누르고 있었으며, 쓰러지자 발길질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때 몽크는 총 세 차례 테이저건을 발사했는데, 첫두 번째 발사에서 실패했으며 세 번째로 발사한 후에야 앳킨슨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동행한 여경인 베틀리-스미스는 테이저건을 맞고 쓰러진 앳킨슨을 함께 발로 걷어차는가 하면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때리며 결박했다. 이 과정에서 가뜩이나 건강이 매우 좋지 못했던 앳킨슨이 쇼크 상태에 빠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특히 테이저건은 심장 질환을 앓고 있던 앳킨슨에게 커다란 타격이 된 듯하다.
반면 법정에 서게 된 경찰들은 자신들의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경찰들은 검찰이 말하는 현장에서 폭력 행위는 없었으며, 앳킨슨을 거칠게 다룬 건 “병을 가장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즉, 엄살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검찰의 견해는 다르다. 영국 검찰은 테이저건으로 제압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지만, 발길질 등 이후 불필요한 행동이 앳킨슨의 사망에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고 반박했다. 검찰이 이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망한 앳킨슨의 이마에 경찰들이 신고 있던 신발 끈 자국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양 측은 향후에도 법정에서 이 사안을 첨예하게 다툴 예정이다.
재판결과 벤자민 몽크는 유죄판결을 받고 징역 8년을 받았고 현재 복역중이다. 반면 베틀리 스미스는 몽크의 발차기 이전 사용한 경관봉 사용이 정당한 진압과정으로 인정되어 무죄선고를 받았다. 허나 이후 IOPC(영국의 독립적인 경찰감사기관)에서는 이후 가해진 과도한 폭행은 적법하지 못했다고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징계 이후에 경찰직은 유지될 것으로 보여 논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