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18 23:34:17

대구진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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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여담3. 소속 장병

1. 개요

한자: 大邱鎭衛隊

대구진위대는 대구에 설치된 대한제국군 진위대의 부대이다. 대구는 본래 경상감영이 있던 곳이었다. 친군영 시절에는 친군남영(親軍南營)이 존재했다. 1896년에 지방대(군대)가 편성될 때 대구에 대대급 부대로 대구지방대가 설치가 되었다.

1900년에는 대구지방대가 대구진위대로 바뀌었다. 남부에 위치했던 진위대의 특성상 북부 부대와 달리 완편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제3연대의 본부가 대구에 있었다.

1905년에 일본의 군축으로 부대 규모가 대대란 이름은 유지했지만 256명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그나마도 진위대 3연대의 3개 대대 중에 대구에 주둔한 1대대만 남았다.[1] 경주분견대와 울산분견대 등이 대구의 제3진위대대 소속이 되었다.

이후 1907년에 대한제국 군대해산 당시에 부대가 해체되었다.

대구진위대의 청사는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2가에 있었고 연병장은 중구 덕산동에 있었다.

2. 여담

1906년에 신돌석, 유시연 등의 의병 부대가 경상북도 봉화군 등에서 활동하였고 대구진위대가 이들과 교전하였다. 1906년 6월에 대구진위대 병력 80명, 안동[2]과 경주 진위대 병력 50명이 봉화 각황사의 의병 120명, 안동 춘양면에 머물던 의병 700명과 교전하였다. 이후 체포된 의병장들이 대구진위대 연병장에서 총살되었다.

장봉환이 대대장이던 시절에 조정의 대신과 함께 의병 봉기 독려를 논의하는 밀서를 보내는 등 지휘관이 의병에게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 # 그러던 것이 1906년 4월에 장봉환이 대대장직에서 물러났다.[3] 장봉환의 후임자로 온 인물은 양재훈이었다. 1906년 8월 2일 관보

대구역사문화대전 대구진위대

3. 소속 장병

  • 1900년 7월 28일
    • 보임
      • 대대장 참령 신좌균(申佐均)
      • 중대장 정위 홍순명(洪淳明)
      • 부위 안대형(安大亨), 김관호(金觀鎬), 김장옥(金長玉), 이장우(李章雨)
  • 1900년 8월 9일
    • 보임
      • 중대장 정위 진학순(秦學純)
  • 1900년 8월 23일
    • 보임
      • 참위 나종배(羅鐘培)
    • 면직
      • 부위 김관호(金觀鎬)
  • 1900년 9월 11일
    • 보임
      • 대대장 참령 강한준(姜漢駿)
      • 중대장 정위 유석용(柳錫用)
    • 면직
      • 대대장 참령 신좌균(申佐均)
  • 1900년 9월 21일
    • 보임
      • 부관 부위 김현준(金顯俊)
      • 참위 장행원(張行遠)
  • 1902년 1월 8일
    • 보임
      • 육군 군의보 남성수(南聖洙)
  • 1902년 4월 23일
    • 면직
      • 부위 백낙흥(白樂興)
  • 1902년 8월 6일
    • 휴직
      • 부위 안대형(安大亨)
  • 1902년 8월 6일
    • 보임
      • 박주면(朴柱勉), 한필상(韓弼相)
  • 1902년 9월 22일
    • 보임
      • 참위 이효진(李孝鎭)
  • 1902년 10월 3일
    • 보임
      • 참위 심상희(沈相煕), 장용석(張容奭)
  • 1902년 11월 26일
    • 보임
      • 참위 이응하(李應夏)
  • 1903년 6월 25일
    • 보임
      • 중대장 정위 홍순명(洪淳明)
      • 부위 신태승(申泰昇), 참위 이종익(李鍾翊)
  • 1903년 6월 26일
    • 보임
      • 참위 이남녕(李南寧), 백운채(白雲彩)
  • 1903년 6월 27일
    • 보임
      • 중대장 정위 최재익(崔在瀷)
  • 1903년 7월 2일
    • 보임
      • 참위 나종배(羅鍾培)
  • 1903년 7월 24일
    • 보임
      • 중대장 정위 진학순(秦學純)

[1] 당시 군축에서 진위대 18개 대대를 8개로 축소했다.[2] 본래 안동진위대는 청주진위대에 속했으나, 알력 끝에 대구진위대에 속하게 되었다. #[3] 의친왕의 귀환 행사에서 의전을 맞추지 못했단 이유로 면직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