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35:35

노차갑

파일:노차갑.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노재원(盧在原)
이명 노차용(盧且用)
본관 광주 노씨[1]
출생 1904년 11월 27일
경상남도 창녕군 오야면 동산동
(현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동산리)[2]
사망 1967년 1월 8일
일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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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노태강스위스 대사와 노태악 대법원 대법관은 그의 손자이다.

2. 생애

노차갑은 1904년 11월 27일 경상남도 창녕군 오야면 동산동(현 창녕군 이방면 동산리)에서 아버지 노정용(盧正容)과 어머니 현풍 곽씨 곽종석의 딸 사이의 5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노정용은 구한 말 출사하여 종9품 참봉을 지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1903년 곽종석고종을 직접 알현하고 국정을 자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고종이 곽종석을 예우하고자 한 일환으로 그 해 9월 10일 노정용에게 의릉참봉에 제수한 것이다.# 그는 이후 사직서(社稷署) 참봉#, 익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1905년에는 경기전을 개수할 때 감독으로 참여했다가 품계가 9품에서 6품으로 승급되었다.# 1908년에는 대한협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계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창녕군 이방면장에 취임하여 1913년1914년 우수 면리원(面吏員)으로 뽑히기도 했으며, 1915년에는 토지 조사 사업을 위해 경상남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에 발탁되기도 하는 등# 일제에 협력한 정황이 보이는 인물이다.

어쨌든 넉넉한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신간회 대구지회와 대구청년동맹(大邱靑年同盟)의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일제의 허가를 받은 합법단체로는 활동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1928년 2월 두 단체를 탈퇴한 뒤 1928년 5월 문상직(文相直)·정태봉 등 5명과 함께 달성공원에 모여 'ㄱ당'을 창당했다. 이들이 조직의 명칭을 'ㄱ당'이라 한 것은 'ㄱ'이 한글의 처음 글자로 조선의 기원(起源)을 촉구하고자 붙인 것이었다. ㄱ당은 조직부와 재정부·조사연구부 등을 두었는데, 그는 재정부의 일을 맡았다.

이들의 활동 목표는 한국인의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고, 실력양성의 방법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에서 농경지를 매수하여 그곳에 농민을 이주시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적당한 인물을 발굴하여 중국 광둥성에 설치된 군사학교에 파견, 정규 과정을 이수케 함으로써 무력양성의 계획도 구상했다. 노차갑은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하고, 1928년 6월 1일 곽동영과 함께 신호용 권총을 휴대하고 달성의 부호 김교식을 상대로 5천여 원의 군자금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면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8년 12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1929년 6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에 건너가서 1937년 동아일보 오사카지사를 운영하면서 조선인 단체 신문사를 창설하고 신문을 통하여 재일본 조선인의 정치적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8.15 광복 후 귀국한 그는 1948년 2월 7일 남조선노동당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거국적인 노동자 총파업과 동맹휴학을 일으키자, 이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석방된 후 치료를 위해 당시 창녕 이방국민학교 교사로 있던 장남 노은현(盧垠鉉)[3]과 함께 친지들이 살고 있던 일본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1967년 1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노차갑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망모정공파 30세 재(在) 규(圭) 지(地) 권(權) 항렬.[2] 인근의 석리·현창리와 함께 광주 노씨 집성촌이다. 노태극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방문단원으로 2000년 9월 한국을 방문하여 극적으로 가족과 상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