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덕군 출신 독립운동가, 노병주
성명 | 노병주(盧炳柱) |
생몰 | 1905년 11월 15일 ~ 1993년 6월 10일 |
출생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면 화개리 |
사망지 | 경상북도 영덕군 |
추서 | 대통령표창 |
노병주는 1905년 11월 15일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면 화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7년 11월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청년회에서 재무를 담당했고, 영덕청년회 내 영덕여성친목회 야학부를 개설하고 장차 항일운동의 역군이 될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으로 야학운동을 펼쳤다. 그는 한국의 현실과 세계의 동향을 학생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공감하고, 새로운 교육 자료의 발간을 추진하였다. 주된 내용은 일제의 통치를 비판하는 것으로, <국(國)과 조선(朝鮮)>, <자유롭게 서로 조합하는 러시아의 생활> 등을 번역 및 인쇄했다.
또한 노병주는 한글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 및 <조선문초도(朝鮮文初道)>라는 제목의 한글 교육 책자를 각 30부씩 인쇄 출판했다. 그는 각 10부를 청년회관 내에서 여자 야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약 2개월에 걸쳐 이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경찰에 체포되었고, 출판물은 압수되었다. 1928년 10월 16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은 허가를 받지 않고 사회질서를 방해하는 불온문서를 저술했다는 이유로 출판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금고 6개월을 선고했다. 그 후 영덕군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8.15 해방 후 자유의 몸이 되었고, 이후에는 영덕군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1993년 6월 10일 영덕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노병주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2. 여수시 출신 독립운동가, 노병주
성명 | 노병주(盧秉柱) |
생몰 | 1910년 8월 30일 ~ 1977년[1] |
출생지 | 전라남도 여수군 돌산면 군내리 |
사망지 | 전라남도 여수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대통령표창 |
노병주는 1910년 8월 30일 전라남도 여수군 돌산면 군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9년 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이었으며 급장(級長)을 맡았다.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강당에서 향후의 행동방침을 세우기 위한 집회를 가졌을 때, 그는 사회를 맡아 이형우(李亨雨)의 제의에 의해 가두시위 투쟁을 결행키로 결정을 내리고, 오후 1시에 대오를 정비하여 교문을 박차고 나서 시위 대열을 지휘했다. 그러다가 체포된 그는 1930년 2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해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금고형 6개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는 15년간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일제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 그가 사는 돌산면 군내리는 고립된 섬이라 배를 타고 움직여야 했는데, 배를 타고 나가기 위해서는 경찰에 일일이 신고해야 했다. 게다가 일본으로 유학가서 동경제대에 지원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학생운동 경력이 드러나는 바람에 합격이 취소되었다. 이에 그는 고향에서 부친이 경작하던 전남 고흥의 500마지기 논을 경작하며 지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대퇴부가 상해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서 평생 취업하지 못했다. 그러다 197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노병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노병주의 딸 노미자 여사는 1969년 파독 근로자 모집 때 파독간호사로서 선발되어 독일에 건너갔고, 현재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며 재독대한간호사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녀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요즘 정치권을 보면, 자기 의견만 맞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국회에서는 사소한 일로 싸우는 일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유·불리를 떠나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서로 포용해주는 사회가 되어야 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특히 재산을 가진 자들은 재산으로 자기를 과시하기 보다는 힘이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사회에 기여를 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