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남갈백(南葛百) |
자 | 문가(聞可) |
본관 | 영양 남씨[1] |
출생 | 1894년 4월 25일 |
경상도 영해도호부 묘곡면 원구동 (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2] | |
사망 | 1941년 10월 31일[3] |
경상북도 영덕군 | |
묘소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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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남만진은 1894년 4월 25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묘곡면 원구동(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서 아버지 남교현(南敎鉉, 1843 ~ 1894. 4. 25)과 어머니 영천 이씨(永川 李氏, 1857 ~ ?. 4. 1) 이주상(李周相)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4] 출생 이후 15촌 지간의 족숙 남교응(南敎膺, 1858 ~ 1899. 8. 4)에 입양되었다.그는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 등이 주도한 영덕군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는 오후 1시경 3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성내동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했으며, 경찰주재소로 달려가서 일본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해 그들도 독립만세를 부르게 했다.
이후 장터로 돌아가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그는 군중과 함께 다시 주재소로 갔다. 이때 주임순사 스즈키 쓰루지로(鈴木鶴次郞)가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빼앗으려 했다. 이에 그는 분노한 시위 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때려부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후 공립보통학교로 행진하여 평소 일제의 정책을 극찬하던 교사들을 규탄하고 건물을 파괴했으며, 일본인 소학교, 소학교, 우편소, 면사무소를 차례로 파괴하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군중은 주재소에 도착한 뒤 독립만세를 위치고 찬송가를 불렀으며,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고 비치되어 있던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했다. 이때 주재소의 응원 요청을 받고 영덕경찰서장 시게요시 손(茂義孫)[5]과 4명의 경찰이 긴급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다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려 철수했다. 그러자 남만진은 군중과 함께 이들을 추격해 총과 칼을 빼앗고 제복을 찢은 후 곤봉 세례를 가했으며, 그들을 일본인이 경영하는 미즈모토(水本)여관에 감금했다. 이 시위는 이튿날까지 지속되다가 오전 11시경 포항 헌병대에서 출동한 일본 헌병분대장과 6명의 헌병이 이를 제지하려 했지만, 이들도 군중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오후 5시 경상북도 대구부에 있던 일본군 보병 80연대로부터 장교 이하 17명이 출동해 헌병들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해 8명이 피살되고 16명이 부상당했다. 이때 선두에 서서 시위를 주도하던 그 역시 좌측 엉덩이에 총상을 입고 평생 불구자로 지내다가 1941년 10월 31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남만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송정공파(松亭公派)-영덕 원구(元邱) 문중 17대손 진(鎭) 항렬. 영양 남씨 25세.[2] 인근의 괴시리와 함께 영양 남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남호정도 이 마을 출신이다.[3] 남씨대동보 권2 706쪽에는 9월 2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4] 어머니 영천 이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으로, 첫째 부인 무안 박씨(1847 ~ 1872. 11. 10) 박가영(朴家永)의 딸은 슬하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별세하였다.[5] 1908년 함흥경찰서장 대리,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전라북도 진안경찰서장,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전라북도경무부 경부(警部), 1917년 10월부터 1919년까지 영덕경찰서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