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남외출(南外出) |
자 / 호 | 자경(子京) / 눌은(訥隱) |
본관 | 영양 남씨[1] |
출생 | 1901년[2] 6월 3일 |
강원도 울진군 원남면 금매동 (현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금매리)[3] | |
사망 | 1967년 3월 25일 |
대전광역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316호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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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남광호는 1901년 6월 3일 강원도 울진군 원남면 금매동(현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금매리)에서 아버지 남재양(南載陽)과 어머니 청주 한씨 한효원(韓孝源)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4] 출생 이후 큰아버지 남재악(南載岳)에 입양되었다.그는 1919년 3월 3.1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원남면 매화리와 금매리의 청년들과 연락을 주고받았고, 4월 11일 매화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했다. 그는 윤호규(尹鎬逵)·최현탁(崔鉉卓)·윤병관(尹炳寬)·최중모 등과 함께 만세시위 운동의 계획을 추진하였고, 그들은 4월 10일 밤 그곳의 진산인 남수산(嵐峀山)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아 두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3명이 체포되었고, 경찰의 경비는 더욱 삼엄해졌다.
하지만 남광호는 이에 굴하지 않고 4월 11일 오후 3시경 동지들과 함께 몰래 태극기를 지니고 장터로 나가 원남면사무소 앞에서 주민을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때 최효대는 목면으로 제조한 태극기와 비슷한 큰 기를 흔들며 시위군중을 주도하였고, 다른 동지들은 '대한독립기(大韓獨立旗)'라고 쓴 작은 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주도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대전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7년 3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남광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6년 9월 22일 대전광역시 중구 호동의 고성 남씨 종중 산에 묻혀있던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