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의
한국의 전통 민속인형극. 남사당패가 하는 여섯 종목의 놀이(풍물 · 버나 · 살판 · 어름 · 덧뵈기 · 덜미) 중 끝놀이.하나의 갈래이자 작품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내용이 한가지로 굳어져 이에 관련된 후속편이나 또다른 내용의 인형극이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까지 전래된 민속인형극으로서는 유일.
탈춤의 이름이 지명 중심으로 일컬어지는 데 비해 꼭두각시놀음의 이름은 등장인물 중심으로 일컬어졌다.
주요 등장인물에 따라 꼭두각시[1]놀이 또는 박첨지놀음, 홍동지놀음이라고 하며 채록자에 따라서 등장인물에 ‘놀음’ 대신 ‘놀이’ 또는 ‘극’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2]
실제 연희자들 사이에선 '덜미'[3]로 가장 많이 통하고 있다. 간혹 고로(古老)들 중에서도 '꼭두각시놀음 잘 한다'는 것을 '덜미 잘 팬다'로 표현하고 있음을 자주 공연장소에서 들을 수 있다.
2. 기원(유래)
꼭두각시놀음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가지 학설이 있으나[4] 이 두가지가 그나마 많이 알려진 학설이다.1. 꼭두의 어원
꼭두는 으뜸을 나타내는 우리의 고유어로서 남사당패(男寺黨牌)에서도 우두머리를 ‘꼭두쇠’라 일컬었으나 인형을 뜻하는 말로는 쓰지 않았다. 중국어의 ‘곽독(郭禿)’, 몽골어 ‘고독고친’, 집시어 ‘쿨리’, 인도어 ‘쿠쿨라’ 등과 연관 지어서 중국기원설과 서역기원설, 지중해기원설까지 펼치기도 하지만, 꼭두의 어원만으로는 그 개연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2. 중국으로부터 전래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인형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 이때의 인형극은 이미 삼국시대[5]의 고구려악(高句麗樂)에 있었고, 중국을 거쳤거나 혹은 직접 북방을 거쳐 수입된 서역악(西域樂)의 일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고구려 악무(樂舞) 중 서역악에서 유래된 가면무악(假面舞樂)과도 서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역사(발전과정)
본래의 인형은 수렵용 위장 인형으로 허수아비같은 형태였으며, 짐승을 사로잡는 데에 긴요하게 쓰였다.이어 적을 공격하기 위해 위장하여 만들어 놓은 전투용 위장 인형이 등장했다. [6]
고구려 때부터 제의용 신상(神像)으로 인형을 만들어 섬기는 전통이 비롯되었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과 『북사(北史)』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고구려조(高句麗條)에 의하면, 두 사당에 신상을 모셔두고 섬기는데, 한 사당에는 유화부인의 모습을 다른 사당에는 시조인 주몽의 모습을 나무인형으로 만들어 모셨다고 한다.
이처럼 신상 인형을 모셔놓고 제의를 올리는 단계에서 나아가 신격인 인형을 안고 다니며 놀리는 주술적 인형놀이를 하게 되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고구려조(高句麗條)에는 “해마다 시월 국중대회 때 수혈(隧穴)의 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에 모시고 제사를 올리면서, 나무로 다듬은 신을 신좌에 모시는 의식을 했다.” 라고 하였다.[7]
고대의 제의적 인형놀이가 중세에 들어오면서 가무용(歌舞用) 인형으로 발전했다. 각종 연회와 잔치에서 음악에 맞추어 인형을 춤추게 하여 즐기는 인형놀이가 나타났다.
『해동역사(海東繹史)』 권22 악무조(樂舞條)에서는 “인형을 만들어서 놀리며 가무를 잘 하도록 하는 것을 괴뢰자”라고 하였다. 인형을 음악에 맞추어 조종할 수 있는 악곡괴뢰(樂曲傀儡)가 형성된 것이다. 『문헌통고(文獻通考)』 「악고(樂考)」에는 “괴뢰자가 인형을 만들어 놀리며 노래와 춤을 잘 하였는데, 본디 상가에서 비롯되었으나 좋은 잔치에서도 놀았다.”라고 전한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인형 기술이 한층 발전하고 사회의식이 성장하여 삶의 갈등을 그럴듯하게 연출하는 극적 인형놀이가 전승되었다.
『지봉유설(芝峰類說)』 권18 잡기조(雜技條)에 오래 전부터 “괴뢰목우희(傀儡木偶戱)가 있었다.”라고 하며, 이규보의 시 ‘부답병서(復答幷序)’에서도 이미 현존하는 꼭두각시놀음의 건사(建寺)거리에 해당하는 인형극을 노래함이 드러난다.
고려 중기에는 마침내 ‘만석중놀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작품이 등장하며 불교문화의 타락상을 풍자하는 소박한 인형극이 사찰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4월 초파일 연등행사를 하면서 인형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실을 매어 놀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인형에 옷을 입혀서 조종한 것을 보면 만석중놀이에서 진전된 꼭두각시놀음이 초파일의 연등회 때 전승된 것으로 짐작된다. 사찰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만석중놀이와 함께 불교적 인형놀이가 전승되는 가운데, 세간에서는 조선조의 세태를 다룬 상당히 발전된 인형놀이가 전승되었다.
그 이후에는 봉건시대부터 개화기까지 떠돌아다니던 직업적 유랑예인집단(流浪藝人集團)인 남사당패(男寺黨牌)에 의하여 연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꼭두각시 놀음은 고대 동양의 목조 인형의 특징을 그대로 계승한 인형극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전통이라고 알려졌고 조선시대 말까지는 인형의 종류도 많고 다루는 방법도 많은 굉장한 기교들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인형극’으로만 존재한다.
이 놀음은 민족항일기에 명맥이 거의 끊어질뻔하다가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1988년 꼭두각시놀음이 남사당놀이로 명칭 변경되면서 남사당놀이의 종목에 꼭두각시놀음이 포함되었다.
이 극본이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근까지는 산대도감계통극(山臺都監系統劇)의 하나로서 조선 후기로 추정해왔다. 그러나 이규보(李奎報)의 <관극시 觀劇詩>에 인형극의 내용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시대에 어느 정도의 극본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내용
4.1. 특징
한국 전통극에서 쓰이는 용어로 '마당'과 '거리'라는 것이 있다. '놀이판'에서의 '놀이(음)'는 '굿(劇)'이라는 뜻으로도 표현되며, 하나의 '굿'은 몇 개의 '마당'으로 구성되고, '마당' 속에는 이것을 이루는 '거리'가 존재한다.<꼭두각시놀음>의 내용은 채록본(採錄本)에 따라 다소 다른데, 이는 민속극의 구전성이라는 점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그 내용은 보통 7∼10막으로 나뉘는데, 최고(最古)의 채록본인 김재철본(金在喆本)에 의하면 8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민들의 인생사를 담은 희노애락 뿐만아니라 처첩(일부다처제)제도의 폐해와 지배계층의 횡포 등을 풍자적인 사건들을 담은 춤, 노래, 연기가 집합된 종합예술 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은 탈춤과 함께 우리 고전극의 한 종류이면서도 주인공 박첨지의 일대기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 색다르다.
즉, 박첨지 일가의 파탄과 구원이라는 줄거리를 일관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며 삶의 덧없음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격조 높은 인형극이라고 할 수 있다.
꼭두각시놀음은 박첨지놀음이라 일컬어질 만큼 점차 박첨지의 역할이 커진다. 각 거리마다 박첨지가 등장할뿐더러 다음 거리를 설명해 주는 극의 진행자 구실까지 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이 홍동지이다. 벌거벗은 인물답게 무엇이든 저돌적으로 공격하여 기성의 고정관념과 지배질서를 과감하게 혁파하는 민중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 특징이다.
내용상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가부장적 봉건가족제도를 박첨지 일가를 통해 비판했다.
2. '이심이'를 통해 민중과는 대립적 대상들을 희화적으로 분쇄함으로써 오히려 적극성을 기하고 있다.
3. 봉건지배층을 매도(罵倒)함에 있어 벌거벗은 '홍동지'를 등장시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또 '우스갯거리'로도 보이게 하여, 그에 따를 역공세를 상쇄시키고 있다.
4. 끝거리에서 절을 짓고 축원을 올려 불교에의 귀의를 나타내지만, 결국은 다시 헐어버림으로써 역시 외래 종교를 부정·극복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우리의 민속놀이에서 보이는 것처럼 변질·왜곡된 후기적 현상이기는 해도, 저항이라는 명목을 통한 자기학대 내지는 자음적(自淫的)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지는 못하고 있다.
4.2. 등장인물
<꼭두각시놀음>에 등장하는 인물·동물(상징적인 동물 포함)의 내역은 다음과 같은데, 이는 채록본에 따라 약간씩 달리 나타나고 있다.인형극에 등장하는 인형은 다음과 같다.
1. 박첨지 [8]
파일:박첨지인형.jpg
2. 꼭두각시 [9]
3. 홍동지 [10]
파일:홍동지인형.jpg
4. 돌머리집 [11]
파일:첩인형.png
5. 피조리 [12] 2인
6. 상좌 [13] 2인
7. 표생원 [14]
8. 묵대사 [15]
9. 영노 [16]
10. 귀팔이 [17]
11. 평안감사 [18]
파일:평안감사인형.jpg
12. 작은 박첨지 [19]
13. 박첨지 손자 [20] 3인
14. 상주 [21]
15. 동방석이 [22]
16. 잡탈 [23] 3인
17. 사령 [24] 3인
18. 상도꾼 [25] 12인
인형극에 등장하는 동물은 다음과 같다.
1. 이심이 [26]
파일:이심이인형.jpg
2. 매 [27]
3. 꿩 [28]
4. 청노새 [29]
4.3. 줄거리
4.3.1. 박첨지마당
제1막인 ‘곡예장거리’는 [30] 박첨지가 팔도강산을 유람하다가 남사당패 놀이판에 끼어든 이야기를 산받이(인형과의 대화자)와 나누면서 자기소개를 하면서 시작한다. 양반 행세를 하는 가짜 양반의 허위를 폭로하는 내용으로 양반을 자처하는 박첨지가 양반이라는 사실을 자랑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양반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며 남사당패의 놀이판에 자진 합류함으로써 역설적 풍자의 방법으로 양반의 허위를 보여준다.제2막인 ‘뒷절거리‘는 파계승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다. 뒷절의 상좌들이 박첨지의 소무당녀들과 놀아나는 것을 보고 박첨지가 노해서 자기 조카 홍동지를 “중이 불도는 닦지 않고 미색놀음만 한다.”라고 꾸짖다가 마침내 자기들도 함께 어울려 춤을 즐기는 내용으로, 오히려 그들의 놀이야말로 건강하고 떳떳한 놀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입증하며 상좌와 소무당녀들의 춤을 통해서 놀이의 당위성을 나타낸다.
제3막인 ‘최영로(崔永老)의 집거리’는 사람을 해치는 이심이의 퇴치를 통해서 지배층의 무능을 우회적으로 풍자하는 내용이다. 박첨지의 사돈 최영로의 집에 이심이가 나타나 닥치는 대로 사람을 잡아먹자, 박첨지는 홍동지의 힘을 빌어 이심이를 퇴치하려 한다. 그러나 공명심 때문에 죽음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가 홍동지의 구조로 간신히 살아난다. 명분만 앞세우다가 외세의 침략에 나라와 국민을 위험에 빠뜨린 지배층의 무능을 비판하는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제4막인 ‘동방노인거리’는 불교적 관념이 지닌 한계를 풍자하는 내용이다. 수도승을 자처하는 동방삭은 세속이 부정(不淨)한 까닭에 눈을 감았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풍자 또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내 반주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춤까지 추며 놀이판에 동화되는 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놀이본능을 해학적으로 긍정한다.
제5막인 ‘표생원(表生員)거리‘는 [31] 가부장적 권위의 모순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박첨지가 첩인 돌머리집을 데리고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본처 꼭두각시를 만나는데, 첩이 본처를 공격하고 박첨지가 첩에게만 살림을 후하게 나누어주자 본처 꼭두각시는 금강산으로 중이 되러 가겠다고 가출해버린다. 일부처첩제(一夫妻妾制)로 인한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모순과 서민층의 생활상을 보여주며 처첩을 함께 데리고 살려는 남편의 가부장적 횡포를 풍자한다.
4.3.2. 평안감사마당
제6막인 ‘매사냥거리‘는 관료의 전횡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평안감사가 새로 부임해오자마자 관속과 포수를 동원해 매사냥을 하겠다며 떠나는데, 이 과정을 통해서 민중의 불만과 고난을 여러모로 드러냄으로써 지배계급의 횡포와 그에 대한 풍자를 보여준다.제7막인 ‘평안감사재상거리’[32]는 평안감사의 패륜을 한층 직접적으로 풍자한다. 평안감사가 모친상을 당해 상여가 나가는데 상제는 오히려 양산도를 부르며 좋아하는가 하면, 홍동지는 향두꾼으로 불려와 벌거벗은 몸으로 상여를 메서 모욕을 준다. 이를 통해 양반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풍자하며 지배계급에 대한 조롱을 보여준다.
제8막인 ‘건사(建寺)거리’는 마무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박첨지가 나와 장례 후 명당에 절을 짓겠다고 알리면 중 2명이 나와 조립식 법당을 짓고는 다시 헐어버린다. 이후 시주를 받음으로써 구경꾼들의 행운을 빌어준다. 절을 짓는 것은 주인공의 종교에의 귀의로 해석할 수 있으며, 마지막에 다시 절을 허는 것은 토속사상과 외래종교인 불교와의 상극이라는 해석으로, 또는 종교마저 뛰어넘는 주인공의 초월사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참고영상: 돌아온 박첨지
5. 연출적 특징
5.1. 무대
한국의 민속인형극은 그 놀이판(무대)에 있어서 중국·일본 그 밖의 동남아 여러 나라의 인형극들과 극형식에 유사한 점이 많다. 따라서 그 놀이판에 있어도 비슷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꼭두각시놀음>의 무대라든가 연출방식, 인형조종법 등은 중국 인형극과 대체로 비슷하고, 일본 민속인형극과도 꽤 비슷한데, 이는 세 나라 인형극이 동일계통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그러나 한국 민속인형극은 이와 같은 유사성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독창적인 양식을 가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대는 시골의 타작마당이나 장터에서 주로 무대를 설치했는데, 사방에 한 2미터 정도 되는 기둥을 4개 세운 뒤, 인형이 나와서 노는 가로 2m 50㎝ 내외, 세로 70㎝ 정도의 무대면만 남겨놓고 귀퉁이에 까만 천을 둘러 막을 설치하고 높게 올린 형태였다. 조종사는 주로 무대 아래에 들어가 인형의 하반신을 잡고 조종했으며, 인형들은 상반신만 포장 위로 올라와 관객들에게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주로 저녁에 공연하는 경우가 많아서 무대 양옆에 횃불에 불을 피워 조명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남사당패의 공연과 꼭두각시 놀음은 소리를 할 땐 소리판, 야외 공터에 놀이판을 설치해놓고 풍물을 돌 땐 놀이판이라고 불리었다.[33]
파일:꼭두각시놀음 무대.jpg
파일:꼭두각시놀음 무대2.jpg
파일:꼭두각시놀음 무대3.jpg
5.2. 인형의 형태
인형의 재료는 나무와 종이 등이었으며, 조종하는 방식에 따라 인형의 종류도 나누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1. 나무막대기로 만들어진 <막대기 인형>
2. 천을 자루나 장갑처럼 만들어 조종하는 <주머니 인형>
3. 신체 부위에 줄을 매어 만들어진 <줄 인형>
주로 적당한 크기의 통나무로 얼굴과 몸통을 만들어 사용해 조종했으며 인형에 옷을 입혀 사람의 형상과 아주 유사하게 만들어 사용하였다. 관절 부분은 철사 못을 꿰어 연결시키기도 하고 관절 부분 안에 끈을 매어서 조종자가 직접 끈을 당기어 조종하기도 하였다고 한다.[34]
인형의 역할의 비중에 따라 크기를 대/중/소로 크기를 달리하는 특징이 있다.
5.3. 방식
먼저 조종사가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 대잡이 : 인형을 잡고 조종하는 역할. 포장 무대 안에서 몸을 숨긴 채 인형을 조종하고 재담과 노래까지 담당하는 연희자.[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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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받이 : 무대 밖에서 인형과 대화를 하며 놀이꾼들을 지휘하는 역할.[37] 무대면 밖에 약간 비스듬한 자리에 관중석과 거의 분리되지 않은 채 무대면을 보고 앉아있다고 한다.
무대 안에서 주조종자(主操縱者)인 '대잡이'가 중심이 되어 양옆에 '대잡이 손(補)'을 거느리고 인형을 놀리는 것이다. 등장인물 구실을 하는 인형의 대잡이들끼리 대사를 주고받을 뿐 아니라, 무대 밖에서 반주와 더불어 산받이와 잽이(樂士)가 함께 대잡이와 대화를 하며 극을 진행해나갔다.
5.4. 음악
반주악기는 풍물에 쓰이는 꽹과리 · 북 · 징 · 장구 · 날라리이고, 장단은 염불 · 타령 · 굿거리 등이며, 주로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인형의 양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상반신을 흔드는 춤을 춘다.한 가지 주목할 것은 '산받이'가 장고를 잡는데, 이 '장고잽이'가 반주음악의 앞을 끈다는 것이다. 보통 풍물에서는 꽹과리가 앞을 끄는 것인데 여기서는 장고가 상쇠노릇을 하고 있음은 재담을 주고 받는 극 진행상에 있어 재담 전달에 방해됨이 없이 신호를 주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날라리나 피리는 주로 춤장단을 칠 때 유일한 관악기로 등장하는 것이다. 장고의 '엇가락'과 '잔가락'이 그때그때 재담이 주는 극적 분위기를 돕고 있으며 꽹과리가 맺고 끊는 상황의 음향효과까지 겸하고 있다.
반주가락은 '염불' '타령' '굿거리' 등이며, 가창으로는 뜻을 알 수 없는 서곡과[38]구음 무곡(口吟舞曲)[39]이 박첨지의 춤장단으로 나타난다. 그 밖에 <팔도강산(八道江山) 유람가(遊覽歌)>, 상좌와 피조리의 춤장단인 구음 무곡 <나니네 나이네…>, 박첨지와 꼭두각시가 만나는 장면에서 <보괄타령> <세간을 놓는다> 묵대사의 <회심가(回心歌)> <매사냥 소리> <상여소리> <장타령> <절 짓는 소리> <절 허는 소리>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꼭두각시, 피조리, 홍백가 등의 잡가(雜歌)와 동박석이, 묵대사의 염불·시조(時調)가 있는데 이것은 그때그때 흥에 따라서 생각나는 대로 선택하여 부른다.
6. 현황
현재는 ‘사단법인 민속극회남사당’이 그 전수사업을 벌여오고 있다.역대 기능보유자로는 남운룡(인형조종 및 제작) · 양도일(받는 소리, 악사) · 송복산(악사, 호적) 등이 있으며, 현재는 박계순(산발이)과 남기환이 지정되었다.
채록본은 김재철채록본(전광식 · 박영하 구술, 1937) · 최상수채록본Ⅰ[40] · 최상수채록본 Ⅱ[41] · 박헌봉채록본[42] · 이두현채록본[43] · 심우성채록본[44]의 여섯 가지가 있다.
7. 의의·전망
탈춤이 지역마다 풍부하게 전승되며 문화재로 지정된 작품도 많은 데 비하여, 꼭두각시놀음은 남사당패에 의해 서울 지역에서만 전승될 뿐 아니라,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 민속극의 다양한 양상을 이해하는 귀중한 연극사 자료이자 한국 인형극의 전통을 보여주는 희귀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탈춤의 내용과 풍자적 성격이 흡사하면서도 연행 방식과 구성 방식이 독특하여 연극미학으로서 가치가 크다.특히, 연행 방식의 독자성은 ‘산받이’의 존재에서 비롯된다. 포장 밖의 반주석에 앉아서 무대 속의 인형들과 대사를 주고받는 산받이의 역할에 의해 극중 공간이 무대 밖으로 확대되는 동시에 구경꾼들이 극적 환상에 빠져들지 않게 된다. 그럼으로써 산받이는 구경꾼 중심으로 극을 진행하고 극중에서 창조된 사실과 생활 속의 현실을 일치시키는 구실을 한다. 그리고 각 거리별 구성이 극적 내용과 풍자의 방식에 따라 삽화적 구성과 연쇄적 구성, 유기적 구성의 다양한 방법을 효과적으로 창출하고 있는 사실은 연극미학의 훌륭한 양식으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앞으로 탈춤과 판소리에 더불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역 축제에서라도 꾸준히 대중들에게 보여준다면 역사 속에 잊혀지는 문화가 아니라 우리나라를 보여줄 수 있는 또 하나의 고고한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평가된다.
8. 참고문헌
숭실대학교 전공자료한국민속대백과사전
TV 약학궤범
돌아온 박첨지
KBS진주 1라디오 '정보주는 라디오'
[1] 꼭두각시는 우리나라의 민속 인형극인 '박첨지놀음'에 나오는 여자 인형을 말한다. 인형을 뜻하는 꼭두와 아내를 뜻하는 각시가 합쳐진 말.[2] 박첨지의 역할이 풍부하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박첨지놀음이라고도 널리 일컬었다고 하나 꼭두각시놀음으로 더 많이 불렀다고 한다.[3] 남사당패 출신 연희자들에 의하면 '덜미'란 '목덜미를 잡고 논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4] 외래전래설이 주류를 이룬다.[5] 중국 문헌에 따르면 당나라의 군대가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우리의 인형을 얻어간 기록이 남아있는 걸로 보아 삼국 시대에도 꼭두각시 놀음이 있었다고 예상할 수 있다.[6] 신라 지증왕이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공격할 때 나무로 사자를 다듬어 위협했다는 내용이『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남아 있다.[7] 수혈의 신상을 맞이하여 동쪽의 신좌에 모시는 과정에 신상을 놀리는 놀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론된다.[8] 노인, 주역이자 극 진행상 해설자를 겸함 / 박을 사용하여 만들어낸 인형을 나타내어 ‘박’, 몰락한 것을 나타내는 ‘첨지’[9] 박첨지의 본처[10] 박첨지의 조카[11] 박첨지의 첩[12] 박첨지의 조카딸[13] 파계한 암자의 승려[14] 시골양반[15] 도에 이른 고승[16] 무엇이나 먹겠다는 걸신들린 요귀[17] 뜯기다 못하여 귀까지 너풀대는 백성의 하나[18] 권력의 상징으로 내세운 탐관[19] 박첨지의 동생[20] 저능아[21] 평안감사의 아들[22]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동방삭[23] 마을사람, 남자들[24] 평안감사의 매사냥 장면과 상여장면에 나오는 관속[25] 평안감사의 상여를 멘 사람[26] 이무기:뱀도 용도 아닌 상상적 동물, 사람을 잡아먹음[27] 평안감사의 매사냥 장면에 나옴[28] 평안감사의 매사냥 장면에 나옴[29] 곡식을 축내려고 중국에서 날아온 해조[30] ‘박첨지 유람거리’라고도 한다.[31] 흔히 ‘박첨지거리’라고도 한다.[32] '평안감사 상여'라고도 한다.[33] 축제의 처음부터 끝까지 춤을 추기도 하고 일상생활에서 직접 사용하는 접시나 냄비뚜껑이나 줄을 넘기도 했다고 한다.[34] 대중적으로 알고 있는 인형 위에 줄을 매달아 사용하는 ‘마리오네트’ 같은 인형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35] 쉽게 말해 성우[36] 거의 4명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37] 쉽게 말해 해설자[38] 떼이루 떼이루 띠아라따…[39] 나이니 나이니 나이니나…[40] 崔常壽採錄本Ⅰ, 노득필 구술, 1954[41] 남운룡 구술, 1954[42] 朴憲鳳採錄本, 남운룡 구술, 1964[43] 李杜鉉採錄本, 남운룡 · 송복산 구술, 1964[44] 沈雨晟採錄本, 남운룡 · 양도일 구술, 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