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17 13:29:09

김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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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립유공자 김찬기.jpg
출생 1915년 5월 5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사망 1945년 10월 10일 (향년 30세)
중화민국 충칭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본관 의성 김씨
부모 아버지 김창숙
형제 김환기
동생 김형기
배우자 손응교[1]
자녀 장남 김위, 장녀 김주
학력 진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서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90년)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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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심산 김창숙의 차남이다.

2. 생애

1915년 5월 5일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에서 김창숙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9년 학생운동에 나서기 시작하여 광복까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1929년 10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갔다. 당시 진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그 해 11월 20일 밤, 학생들을 이끌고 시내 곳곳에 격문을 뿌렸다.

이 일로 경찰에 붙잡혀 조사 받을 때, “내가 곧 유림단(儒林團) 사건의 주역 김모의 둘째 아들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하였다고 한다. ‘유림단 사건’이란 부친 김창숙이 1919년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전국의 유림 130여 명의 서명을 취합하여 파리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 파리장서의거라고도 부른다. 이때 1년 6월에 집행유예 5년형이 결정되었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한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또 1939년 2월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경북 칠곡군 왜관에서 일본인 교사를 응징한 ‘왜관사건’이 일어났는데, 배후 인물이라는 혐의로 1941년까지 옥고를 치렀다고 전해지지만 이 또한 확인되지 않는다.

1945년 11월 29일자 『자유신문(自由新聞)』 에 따르면, 1943년 무렵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충칭(重慶)으로 탈출하였다고 한다. 이후 충칭에서 임시정부에서 참가하였다가 광복 직후인 1945년 사망하였다. 사망 일자는 『자유신문』에 9월 12일, 다른 문서에는 10월 10일로 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3. 대중매체

4. 여담


[1] 손후익의 차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