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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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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창작물3. 영화4. 도서5. 관련 문서

1. 개요

1570 ~ 1652년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 동 말 동 하여라

조선 중기의 문신.

서울 출생.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靑陰), 석실산인(石室山人)[1], 서간노인(西磵老人)[2]. 본관은 안동 김씨

김극효(金克孝)의 4남으로, 어릴 때 김극효의 형 현감 김대효(金大孝)의 양자가 되었다. 어머니 동래 정씨는 정유길(鄭惟吉)의 딸로, 김상헌의 이모광해군장모인 봉원부부인 정씨이다. 즉, 광해군의 왕비인 문성군부인 류씨와 김상헌은 이종사촌간. 그래서인지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이 인조반정으로 역적으로 참수되자 김상헌이 시신을 거두어줬다고 한다. 모두들 김상헌의 이런 행위를 걱정했지만 "역적은 역적이고 친척으로서의 도리는 다해야 한다"면서 의연하게 시신을 수습해주고 문상을 했다고 한다.
큰형은 김상용으로서 병자호란 때 76세의 노구를 이끌고 강화도에서 민회빈 강씨봉림대군을 따라 종군했으나 청군이 들이닥치자 화약으로 자폭해 순절하였다. 김상용의 외손녀가 효종인선왕후 장씨. 인조는 김상용의 순절에 회의적이라 실수로 그런거 아니냐고 했지만 김상용의 자제들과 당시 근처에 있던 이들의 증언까지 나오자 마지못해 조제를 허가했다.


광해군 ~ 인조 시기의 정치인으로 서인 내에서 강경파로 분류되는 인물로 광해군 시절에는 동부승지로 있었는데 광해군 3년 오현종사에 반발한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의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라는 상소를 비판해 요직에서 멀어졌다.회퇴변척소란 '회퇴'를 '변척'(배척)하는 '상소'라는 뜻. 회퇴란 이언적의 호인 회재(晦齋)와 이황의 호인 퇴계(退溪)에서 각각 앞글자를 따서 두 사람을 지칭한 말이다.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며 쓴 상소가 바로 이것이다. 정인홍은 이 소에서 "이언적은 사류라면서 을사사화 때 아무것도 한 게 없고(선조,이이 모두 깠다. 단 이언적도 아무것도 안한게 아니라 어찌저찌 막아보려 했지만 실패한것), 이황은 어중간하게 출사와 사직을 반복하며 일관되게 처사로 살았던 스승 조식을 심하게 헐뜯었다."면서 두 사람에게는 사류의 자격이 없다고 깠다.

인조 시절 반정 실세들이 실리를 우선시하던 노선과 달리 명분 우선, 선악의 명백함을 주장하던 인물이였다. 때문에 인조정권 초기엔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김상헌은 청나라와의 외교에서 타협을 거부하는 강경파였으며 화친파인 최명길과는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다. 실제로 병자호란 당시 홍타이지가 내린 글에 대해서 김상헌은 "그냥 이걸 병사들에게 보여줘서 사기를 격양시킵시다." 라고 하자 최명길이 "와신상담도 살아남아야 할 수 있는겁니다!" 라고 반박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출성 항복을 하면 나라가 보존된 예가 없다"고 하면서 최후까지 반대했다.

말 자체는 틀린게 아니라 출성 항복이란 바로 "우리 나라를 너님에게 넘겨주겠음" 이라는 의미와 같아서 생사를 건 도박과 같았다. 다만, 당시 국제정세까지 파악하고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지는데 당시 청나라는 이미 중원을 통일한 상황이 아니라 명나라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명나라가 호란 중인 조선에 구원병조차 보낼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상황이었지만, 청 역시 오삼계가 지키고 있던 산해관을 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명의 무역제재 등의 경제로 인해 보급이 부족해서 청 역시 전쟁을 장기간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즉, 청 역시 조선의 멸망을 목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는 김상헌 역시 알고 있었는데 병자호란을 전후해서 여전히 명나라가 명목상 건재함을 지적하고, 만에 하나 명나라가 조선에게 보복할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우려하고 있었다.

항복이 결정되자 목을 매 자살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 호란이 끝난 다음에도 청나라를 도와 명나라를 공격하는 출병에 반대하여, 이 때문에 청나라에 압송되어 최명길과 함께 심문을 받기도 했다. 야사에 의하면, 둘은 심양의 감방에서 정 반대의 시야를 가지고 있던 서로를 마침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항복 조건으로 척화신 세 사람을 보낼 것을 요구하자, 이조참판 정온과 함께 오랑캐 진영에 보내 죽게 해달라는 청을 올린다. 정온은 이후 항복이 결정되자 할복했으나 죽지 않고 살았다.

병자호란 직후 항복하러 출성하는 왕을 따르지 않고 바로 낙향해버려 반대파에서 두고두고 씹히게 되었다. 김상헌은 이에 대해서 "신하는 군주의 뜻에 충성하는 거지, 군주에게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건 내시나 아녀자들의 충성이지, 사대부의 충성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3] 게다가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 김상헌은 정작 적들이 남한산성을 포위해서 위험할 때는 몇십리나 달려와 합류하였고 정작 안전해진 삼전도의 굴욕 당시에 낙향한 것이니 까기도 구차하다. 물론 당시에 삼전도의 굴욕 때 함께 있던 대신들이 깐다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김상헌이 굴욕의 순간은 함께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들 대다수는 김상헌을 옹호했다. 심지어 인조 말년, 김상헌이 탄핵을 당하자 옹호한 것도 바로 이들이다. 다만 당시 조정 대신들과 사대부 대다수의 입장이 주화가 아니라 척화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신들과 입장이 같은 김상헌을 두둔하고 주화파인 최명길을 까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즉 당시 대신들의 입장은 김상헌을 변호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자살을 했다는 사실로 인해 최명길을 필두로 "자살 시도도 정치적 쇼가 아니냐"는 비난도 많았지만, 이것 역시도 자신이 대들보에 목을 매 숨이 끊어진다면 시신을 거두기 위해 친족들을 밖에 대기시켰던 것이였다. 실제로 그가 자살하지 못하도록 막은 사람은 그의 가족이 아닌 군량미를 관리하던 나만갑이란 관료였다고 한다. 또한, 김상헌은 자살 시도 직전에 6일간을 굶으며 지냈다고 하니 거짓으로 자살했다고 보기엔 어려울 듯.

여하튼 그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김상헌은 대사헌 등을 지냈을 정도로 성격이 강직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당대부터 받아왔고, 병자호란 이후에도 청을 도와서는 안 된다는 상소를 올린 것 때문에 심양으로 끌려갔음에도 불구하고 우물쭈물하지 않고 당당한 모습에 청나라 관리들도 예사로운 사람은 아니라고 평가했고, 나중에 최명길과 같이 풀려날 때 청 황제가 죄를 사해 주었으니 황제가 있는 곳으로 향해 절을 하라고 해서 최명길은 절을 했지만 김상헌은 끝까지 거부하였다.[4] 야사에 의하면 최명길과 김상헌이 심양 감옥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실록에는 별반 기록은 없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찬하는 시를 지은 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80이 넘게 장수했는데 효종이 즉위 한 이후 찾아와 효종에게 인사를 올리기도 했고 김자점이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청나라의 조선통인 정명수에게 청해 지원을 요청하던 즈음 청의 섭정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은 "김상헌이 조정의 반청파를 움직여 김자점을 비롯한 친청파를 숙청하고 반청 정책을 주도한 것이 아니냐"고 추궁했지만 조선 미녀를 아내를 맞이하고 싶어서 벌인 뻘짓이었고, 조선에서 미녀를 보내자 금방 태도를 풀고 김자점을 버린다.(...) 이후 정명수도 청나라에서 숙청당한다.[5]

김상헌은 서인 노론의 집권 이후 충절과 절개의 화신으로 남았다.[6] 공교롭게도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은 노론의 영수가 되었고[7],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소론의 영수가 되어서 두 집안은 다시 대립하게 되었다.

이후 그 후손들은 번창해서 순조 시절부터 권력을 잡게 된다. 그렇다. 김상헌의 그 후손들이 바로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벌인 안동 김씨들이다. 정확히는 서울 출신 (신) 안동 김씨. 장동 김씨이다. 김구 등으로 대표되는 구 안동 김씨와 신 안동 김씨는 혈연적 관계가 없고 안동 김씨 세도 정치도 장동 김씨 위주였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다. 여기에는 김상헌의 묘 뿐만 아니라 김상헌 집안의 조상들도 함께 묻혀 있다.

2. 창작물

3. 영화

4. 도서

대체역사소설 천윤의 비사에서는 작품 속에서 인간말종 겸 간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5. 관련 문서



[1] 양주에 숨어 있을 때 쓰던 호[2] 말년 즈음 안동에 내려갔을 때 쓰던 호.[3] 사실 유교 정치는 왕이 최고 권력자라고 해서 신하들이 무조건 왕을 따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생각했을 때 왕이 올바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이에 대해 죽음을 각오해서라도 간언하고 바로잡는 것이 옳은 행동이라고 가르친다. 무조건적인 예스맨은 오히려 간신이거나 진정한 충을 행하지 않는다고 나쁜 평가를 내린다.[4]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비록 한계가 있지만 책임질 줄 아는 절개와 책임질 수 있는 현실주의가 함께 계승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전자는 김상헌 후자는 최명길을 두고 한 말이다.[5] 정작 최명길은 돌아오고 몇 년 되지 않아서 죽었는데, 심지어 최명길은 김상헌보다 더 어리다.[6] 1905년 장지연시일야방성대곡 에서도 "김청음(김상헌의 호)처럼 찢지는 못할망정..."이라고 나올 정도.[7] 백부의 양자로 간 김상헌은 본인도 후사가 없어 생가 친형(법적으로는 사촌형) 김상관의 아들 김광찬을 양자로 들였다. 즉 김상헌의 후손들은 실제로는 김상관의 후손들이다.[8] 배우 주용만 씨의 아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