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그라니우스 리키니아누스 (라틴어: Granius Licinianus)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직위 | 역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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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2세기의 역사가.2. 행적
그라니우스 리키니아누스라는 역사가는 마크로비우스의 <세투르날리아>와 가이우스 율리우스 솔리누스의 <세계의 경이로움>, 마리우스 세르비우스 호노라투스의 <베르길리우스 주석>에 "역사가들 중 한 사람"으로 언급될 뿐, 그의 생애 전반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역사서 역시 19세기 중반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던 1853년, 런던 대영 박물관에 보관된 12개의 팔림프세스트(Palimpsest: 원래 기록되어 있던 글을 갈아내거나 씻어 지운 후에, 다른 내용을 그 위에 덮어 기록한 양피지 사본)에서 그가 기술한 로마 역사 단편이 발견되었다. 초기 연구가들은 그가 기원전 1세기에 활동했을 거라고 추정했지만,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를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세 때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에서 일하던 인물로 추정한다.그의 로마 연대기는 36권 이상의 책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26권, 28권, 33권, 35권 및 36권이 앞서 언급한 팔림프세스트에 보존되었다. 그러나 1855년 게오르크 하인리히 페르츠와 아들 카를이 해독을 목적으로 양피지 시트를 화학적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양피지에 적힌 글을 읽을 수 없게 되었고, 현재는 페르츠의 필사본으로만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리하여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역사 기록은 기원전 164년 안티오코스 4세의 사망부터 킴브리 전쟁과 아라우시오 전투의 참패,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부상, 동맹시 전쟁,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로마 진군 사건, 술라의 동방 원정, 그리고 술라의 내전을 통해 승리한 술라가 독재관이 되었다가 은퇴할 때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는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로마사>를 상당히 의존했던 것으로 보이나, 역시 로마 공화국 말기의 혼란상을 다룬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에 대해서는 "역사가가 아니라 웅변가"라고 간주하고 참고하지 않았다. 그는 고대 역사가들의 흔한 기법인 "등장 인물이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긴 연설을 한 것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으며, 정치적 배경에 대한 해석이나 개인적 판단을 지양하고 오로지 사건 자체만을 건조하게 기술했다.
한편, 그는 고대의 문헌을 수집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담은 케나에 수애(Cenae Suae: 나의 만찬회)를 집필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라틴 문학 작가이자 역시 문헌 수집가였던 아울루스 겔리우스와의 가상 담화에서 자신이 수집한 고대 문헌을 자랑했다. 이 작품은 현존하지 않으나, 마리우스 세르비우스 호노라투스의 '베르길리우스 주석'에 요약본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