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01:48

국동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국차서(國次書), 국호남(鞠湖南), 국치원(鞠致元)
찬서(贊書)
본관 담양 국씨[1]
출생 1867년 2월 17일
전라도 장성도호부 읍서면 가마리
(현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안평리)
사망 1909년 9월 10일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헌병대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94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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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국동완은 1867년 2월 17일 전라도 장성도호부 읍서면 가마리(현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안평리)에서 아버지 국제련(鞠濟連, 1846. 5. 5 ~ 1909. 4. 9)과 어머니 김해 김씨(? ~ 1919. 12. 9)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5살 때 전라도 순창군(현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반월리로 이주했다.

1907년 정미7조약에 의해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그는 1907년 11월 의병 40명을 규합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이후 1908년 1월 장성군 황룡면 탐정리에서 일본 헌병 10명을 사살했으며, 2월 19일에는 광산군 비아면 비아리에서 일본군 5명을 사살했으며, 3월 7일 흥덕군 후포리에 있는 일본인의 집을 습격해 200원과 엽전 100냥을 빼앗아 군자금으로 삼았다. 또 3월 13일 고부군 서부면 중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리품을 획득했으며, 1909년 음력 4월 20일 부하 약 10명과 함께 무장하고 흥덕군 은곡리 민가에서 군자금 1백냥을 얻어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29일에는 봇짐장사하던 문판석이 부하로 가담하여서 국동완 의진의 이동과 군수품을 조달하는데 협력하였다.

이즈음 이들은 전북 부안, 고부, 흥덕 등의 지역을 휩쓸었으며, 40명으로 구성된 소부대로서 총기 약 20정을 휴대한 기동성이 있는 유격부대의 성격을 띠었다. 이들은 대체로 등짐장수 상인 등의 신분이 비교적 낮은 계층의 인물들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월 30일엔 박춘집(朴春楫), 최동이 등 8명에게 등짐장수로 가장해 전북 고부군 거마면 평교리에 있는 일본인 오오모리 고로우((大森五郞)의 집에 가서 총 6정, 칼 1자루, 양산 1, 탄약 70발을 탈취하여 의병운동의 군수품으로 사용하게 했다.

그러나 1909년 9월 6일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인해 체포되었고 고창헌병대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영광헌병대로 이송되어 9월 1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국동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9년 7월 6일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반월리 선영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했다.


[1] 장성-선전공파 31세 동(東)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