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13 14:12:42

구스타브 화이트헤드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구스타브 화이트헤드
Gustave Whitehead, Gustave Albin Whitehead
파일:Gustave_Whitehead.png
본명 구스타브 앨빈 바이스코프
Gustav Albin Weisskopf
출생 1874년 1월 1일
바이에른 왕국 로이터스하우젠
사망 1927년 10월 10일 (향년 53세)
코네티컷 브리지포트
가족 아버지 칼 바이스코프
어머니 바베타
배우자 루이스 튜바 화이트헤드
국적
#!if 행정구 == null && 속령 == null
[[독일|{{{#!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독일 국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독일}}}{{{#!if 출력 != null
}}}}}}]]
#!if 국명 == null && 속령 == null
[[틀:국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 특별행정구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행정구}}}{{{#!if 출력 != null
}}}}}}]]
#!if 국명 == null && 행정구 == null
[[틀:국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 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속령}}}{{{#!if 출력 != null
}}}}}}]]
|
#!if 행정구 == null && 속령 == null
[[미국|{{{#!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미국 국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미국}}}{{{#!if 출력 != null
}}}}}}]]
#!if 국명 == null && 속령 == null
[[틀:국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 특별행정구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행정구}}}{{{#!if 출력 != null
}}}}}}]]
#!if 국명 == null && 행정구 == null
[[틀:국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 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속령}}}{{{#!if 출력 != null
}}}}}}]]
(복수국적)[1]
직업 발명가
기계공
승무원[2]

1. 개요2. 생애3. 최초의 동력 비행
3.1. 왜 알려지지 못했는가?3.2. 인류 최초 비행가의 진실
4. 기타

1. 개요

라이트 형제가 1903년에 최초의 동력 비행을 했다고 알려진 것보다 2년이나 앞선 1901년 8월 14일에 최초의 동력 비행을 한 장본인이다.

2. 생애

1874년 바이에른 왕국의 로이터스하우젠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비행에 관심이 많아 을 가지고 놀았다.[3]
어릴 때인 1886년, 1887년에 부모가 모두 별세했고 기계공으로 훈련을 받고 함부르크로 떠나 범선의 승무원이 되었다. 1년 후에는 다시 독일로 귀국해 가족과[4] 브라질로 여행을 떠나 비행에 대해 더 연구하였다.

1893년에 미국에 입국했고 자신의 성인 바이스코프를 화이트헤드로 바꿨다.[5] 그는 어느 정도 비행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때문에 뉴욕의 장난감 제조업체인 EJ Horsman에서 그를 연과 글라이더 장난감 제작을 목적으로 고용하였다.

1896년에 보스턴항공학회[6]의 기계공으로 고용되었고 동료인 앨버트와 함께 릴리엔탈 글라이더오니솝터를 제작, 글라이더는 비행에 성공하였으나 오니솝터는 실패하였다.

3. 최초의 동력 비행

파일:Gustave_proof.jpg
WHITEHEAD'S FLYING MACHINE SOARING ABOVE THE TREES[7]
브리지포트 헤럴드≫에 실린 삽화

1901년 8월 14일 ≪브리지포트 헤럴드≫ 신문에 구스타브가 직접 제작한 비행기를 탄 채로 무려 라이트 형제의 최고기록인 260m의 약 3배인 800m를 비행했다는 기사[8]와 삽화가 있고,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기사에도 구스타브의 비행기 설계와 실험이 기록되어 있고 1904년의 산업발전에 관한 책에도 그의 비행기 발명이 언급되어 있으며 목격자도 있다. 이런 신문 같은 경우 개인이 조작하거나 왜곡할 수 없기에 더욱 신뢰성이 높은 증거이다. 하지만...

3.1. 왜 알려지지 못했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자본과 증거 때문이다. 물론 전술했던 기사라는 증거가 있으나, 라이트 형제는 그보다 뚜렷한 비행 당시 영상이 증거로 남아있었고, 구스타브는 애초에 이 발명품을 상업화할 생각이 없어 사진으로도 남기지 않고 후에 자본이 떨어져 작업도 그만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3.2. 인류 최초 비행가의 진실



<1901년> 화이트헤드는 코네티컷주 브리지포트로 이사를 가게 된 후 새 비행기 제작을 위해 투자금을 확보하고 디자인 개발에 몰두한다. 새 비행기는 오토 릴리엔탈식 글라이더의 단점을 보완하고 크기를 확대한 후 이착륙 장치와 2개의 프로펠러를 추가 해 만든 형태였다. 그리고 21번째로 만들었다고 해서 비행기 이름도 21호기였다.

한편, 같은 시기 라이트 형제는 무동력 글라이더 실험을 계속하고 있었고 이들이 비행기에 엔진을 부착한 건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였다.

<1901년 8월 14일> 화이트헤드의 첫 비행 현장에는 브리지포트 선데이 헤럴드 지의 리처드 하월 기자와 조수 2명이 같이 있었고 기사에 의하면 비행에 성공해 800m를 날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날의 비행 성공을 보도한 기사는 4개의 지방 신문 기사를 비롯해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300개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는 화이트헤드의 서로 다른 7차례의 비행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1902년> 화이트헤드는 산업용 비행기 제작을 위해 돈을 빌려야 했다. 라이트 형제[9]와 달리 그에게는 사업 운이 없었고 투자자는 얼마 안 가 돈을 회수해 버렸다. 일할 곳마저 빼앗긴 그는 다시는 재기에 성공하지 못하고 역사에서 점점 사라지고 만다.

<1903년 12월 17일> 라이트 형제는 네 번째 비행에서 59초간 260미터를 날아 비행에 성공한다.[10]

<1904년> 비행 성공 이후 5개월 뒤 라이트 형제는 기자들을 불러 새 비행기의 시연회를 가졌지만,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시연회는 엉망으로 끝난다.

<1905년> 에 이르러 라이트 형제는 변형된 형태의 비행기로 공중을 순회하는 데 성공한다.

<1908년> 라이트 형제의 비행 영상이 최초로 촬영된다. [11] 이 무렵 형제는 항공 제어시스템에 관한 특허를 통해 이미 상당한 수익을 거두고 있었다. 그리고 형제는 항공업계를 장악하고 싶어 했고 비행료로 10퍼센트의 로열티까지 챙겼다. 결국에는 소송 분쟁에만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해야 했고 소송을 주재했던 판사는 그들의 선구자적 지위를 생각해 우호적 판결을 내려줬다. 형제는 더는 비행기 개발에 애쓰지 않았고 자신들이 모은 돈을 오로지 경쟁자들을 고소하는데 쏟아붙는다.

<1920년대> 에 오빌 라이트는 자신과 죽은 형[12]을 주인공으로 삼아 항공 역사에 관한 책을 저술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간다.

<1927년> 화이트헤드는 무명인 체로 눈을 감았고 허름한 묘지에 안장된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는 라이트 형제의 이야기만이 남게 된다.

<1934년> 기자 겸 작가였던 스텔라 란돌프는 1901년 뉴욕 신문에 실린 코네티컷주 브리지포트에서 행해진 독일인 비행가 구스타브 화이트헤드의 비행 기사를 접하고 화이트헤드에 관한 조사를 시작한다. 그가 최초의 비행사임을 입증하려면 더 많은 증거가 필요 했고 증인을 찾아 브리지포트로 간 그녀는 30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일부는 그의 비행을 수차례나 목격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스텔라는 모든 증인에게 공증받은 선서진술서를 요구하여 11개의 진술서를 받아냈고 그 진술서는 양도 많았고 출처가 다양했기 때문에 보통 상식으로는 매우 분명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었다.[13] 그리고 조사 한 내용을 바탕으로 <구스타브 화이트헤드의 잃어버린 비행>이라는 책을 출판하게 된다.

책이 출판되자 오빌 라이트는 그간의 명성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당장 진화에 나선다. 영향력 있는 항공 잡지에 <의심스러운 화이트헤드의 비행>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게재하기도 하고 화이트헤드의 비행을 부인하기 위한 증인을 찾고 평판에 치명타를 입히기도 한다.[14] 이러한 오빌 라이트의 악의적인 기사가 위력을 발휘해 라이트 형제의 아성을 위협하는 독일인 비행사의 등장을 가로막게 된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고 독일인이 미국인보다 비행에 먼저 성공했다는 걸 입증하려는 스텔라의 노력은 환영받기 어려웠다.[15] 그리고 그녀가 제시한 증거들은 묵살 당한다.

<1948년> 스미스소니언 재단과 미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라이트 형제를 세계 최초의 비행사라고 발표한다. 이때부터 오늘날까지 라이트 형제의 1903년 비행기는 스미스소니언 항공전시관의 대표 전시장이자 주력 상품이 되어왔다.

''그렇다면 스미스소니언 측은 왜 화이트헤드를 항공 분야의 선구자로 인정하지 않는 걸까?
1948년 스미스소니언과 라이트 재단이 은밀하게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 내용은 '스미스소니언 측은 1903년 이전의 어떤 동력 비행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다.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미국국립박물관이 라이트 형제보다 앞선 비행사에 관해 말을 못 하게 막아 놓은 것이다. 이제는 박물관의 간판이 되어버린 라이트 비행기를 지키려면 스미스소니언 측은 꼼짝없이 계약 내용을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이 계약은 왜 생겨났을까?
과거 스미스소니언은 40년 동안이나 이 전 회장이었던 새뮤얼 랭글리의 비행기를 최초의 비행기라며 지지했다. 오빌 라이트는 그 기록을 수정할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했고 마침내 스미스소니언이 굴복하면서 양측간의 계약이 성립된 것이다. [16]''

<2013년> 미국 코네티컷주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항공 잡지인 제인스사는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에 성공한 인물로 구스타브 화이트헤드를 인정한다.


구스타브 화이트헤드가 남긴 이 말은 결국 예언이 됐다.
오래지 않아, 자동차만큼 비행기가 흔한 세상이 올 것입니다.
오래지 않아, 자동차나 배가 아니라 비행기로 여행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4. 기타

  • 사망하기 12년 전인 1915년부터 인지도가 떨어지더니 결국은 1927년에 향년 53세의 나이에 무명 상태로 사망했다.
  • 이례적으로 이름이 아닌 성을 개명하였다.
  • 비행 당시 탑승했던 비행기는 Whitehead No.21으로 자신이 설계, 제작한 비행기이다. 구스타브 고향인 로이터스하우젠 마을의 구스타브 바이스코프 박물관에 실제 크기로 복제된 비행기가 전시되어 있다.

[1]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2] 1889년 이후 그만둠.[3] 그 때문에 새가 어떻게 나는지 궁금해해 친구와 함께 새를 잡아 묶어서 관찰했는데 경찰이 이를 제지시켰다.[4]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전에 사망했으므로 이때 가족이 가리키는 대상은 결혼 후의 가족이다.[5]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은 칼 바이스코프이지만 후에 결혼한 부인은 루이스 튜바 화이트헤드이다.[6] 독일 글라이더 제작자인 오토 릴리엔탈의 미국 내 공식대표부와 같은 곳이다. 그리고 구스타브는 후일 있을 비행기 제작에 오토 릴리엔탈의 글라이더에서 영감을 받는다.[7] 화이트헤드의 나는 기계 나무 위로 날아오르다[8] 기자가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후 작성.[9] 1890년대 무렵 자전거 제작과 대여 사업의 성공으로 많은 돈을 벌게 된다.[10] 참고로 이날 비행 사진은 5년이 지난 후에 공개되었고 항공 디자인 성능 분석가 조 불머의 말에 의하면 삼각법과 기하학을 적용해 보면 라이트 형제의 말과는 달리 비행거리는 고작해야 90 ~ 100m이고 사진상의 비행기는 1903년 식이 아니라 1908년 식 비행기와 더 일치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사진이 진짜 1903년 사진인지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라이트 형제가 첫 비행에 성공했다고 하는 비행기와 똑같은 비행기를 만들어 비행해서 260m 기록에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최고 기록은 40m. 심지어 상당수가 비행 도중 부상당했고 사망자도 둘이나 나왔다.[11] 형제의 비행 모습이 화면에 등장한 순간부터 우리는 1903년 라이트 형제에 의해 최초의 비행이 시작됐다는 얘기를 역사로 받아들이게 된다.[12] 1912년 형인 윌버 라이트 사망[13] 그 이후 1960년대 무렵까지 화이트헤드의 비행을 목격했다는 증인이 17명으로 늘어났다.[14] 1945년 기사에도 오빌 라이트는 "화이트헤드는 어떤 비행에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괴팍하고 공상가이며 자신이 그저 상상한 것을 실제라고 믿는 몽상가일 뿐입니다."라고 폄하하기도 한다[15] 1989년 사망할 때까지도 스텔라는 화이트헤드의 선도적 지휘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16] 라이트 재단은 최초 비행이라는 기록을 영원히 지켜가고 스미스소니언은 그 비행에 사용된 비행기를 전시하는 이득을 얻게 된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