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1-28 15:07:52

경상남도 진주시

압재마을의 탄생과 역사

압재 의성김씨 문절공(文節公 諱 用超 시조로부터 13세)께서 조선 태종 때 경기도 용인에서 성주군 내기에 처음으로 자리 잡으시고 증손 교위공 계손께서 성주군 사월리로 옳긴 후 600여 년 동안 후손들이 살아오고 있다. 선조 묘소(墓所)와 유적이 있으며, 청천서원과 문정공 동강 선조의 종택(宗宅)과 가묘(家廟)가 있다.

조선 숙종조에 통덕랑(通德郞 택호 우무실 시조로부터 24세)공이 경북 성주 사월리를 떠나서 의령 정곡으로 이사하여 몇 해를 사시다가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아들 회보공이 통덕랑 사후 의령 정곡에서 처가 곳 승산으로 이사하였다가 1720년대(조선 숙종)에 다시 압재로 이사하여 터를 잡은 후 오늘날까지 300여 년간 자리 잡고 있다.

압재 혹은 압현이라는 지명이 조선 전기의 역사의 기록에는 찾을 수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회보공(諱 文粹)이 승산에서 이곳으로 이사와서 자리잡고 살면서 비로소 압재라는 짐여이 탄생하고 의성김씨의 세거지로 알려져, 압재하면 의성김씨를, 의성김씨를 하면 압재를 떠올리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명의 유래는 마을 앞 늪 아호(鵝湖)[1]의 주변 들판이 갈대숲과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라 겨울 철새 오리들이 많이 서식하여 압장(鴨庄)이라 불렀는데, 그 서식지 옆 산 아래 마을이라는 표시로 압재(鴨-) 즉 오리들이 많이 서식하는 들 주변 산 아래 마을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다.

압장이라는 표현은 고려 말 자헌대부를 지내고 사봉면 상사리 우곡으로 낙향하여 사신 정온이란 분이 쓴 월아산유기에서 지수면 승산의 지리를 말한 것으로 <진양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해(金海)에서 배 띄우니 허다(許多)한 용선이요( 표현은 고려 말 자헌대부를 지내고 사봉면 상사리 우곡으로 낙향하여 사신 정온이란 분이 쓴 월아산유기에서 지수면 승산의 지리를 말한 것으로 <진양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해(金海)에서 배 띄우니 허다(許多)한 용선이요(김해 허씨)
금산(金山)에서 꽃이 피니 만화(萬花)가 다 함께 피도다(능주 구씨))
의수(義水)에서 금이나니 굳센 소리 압장(鴨庄)에서 나는 도다.(의성 김씨)"
훗날 許, 具, 金 삼성(三姓)이 자리 잡고 번성하여 문중을 이루고 살 것을 예측하였는데 이때는 1390년대로 추정된다.

1910년 우리나라를 강제 합방한 일본이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설립하여 일본어와 서양 문물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림들은 이에 저항하여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서원을 복원하는 한편 서당을 세워 일본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맞서기 시작하였고, 압재에도 사림들이 출연하여 굉정각(閎精閣)과 용강서당(龍江書堂)을 건립하였다.

용강서당은 사림들이 용강서원으로 편액하였고 매년 음력 3월 10일 향례를 지내고 있다.


[1]아호 : 압재 동네 앞에서 말구리 앞까지 길게 자리 잡고 있던 늪인데 2차에 걸친 경지 정리를 하면서 주변 언덕을 허물어 매립하여 논으로 만들었다. 현재 배수로가 그 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