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06:05:15

결의론


1. 개요2. 상세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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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개 사람들은 도덕적 원리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고 있어도, 그 밑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개별적 사례를 숙지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에 따른 각각의 사례들에서 그 도덕적 옳고 그름을 미리 법률조문식으로 규정해 놓는 것을 결의론이라고 한다.

2. 상세

영어로는 casuistry, '사례'를 의미하는 라틴어 casus에 유래했다. 14, 15세기 가톨릭 교회에서 기독교의 참회서를 기초로 하여 결의론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외적 죄악에 대한 벌만을 구체적인 상황과 케이스에 따라 규정하고 있었지만, 후에는 양심에 관련되는 것도 세세하게 규정을 만들어서 신자들의 양심지도를 하였다.

16세기 신학자들은 신의 섭리를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게 강조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너무도 경시하였는데, 이에 반발하여 교황을 등에 엎은 예수회는 개인의 공덕, 선행, 의지를 강조하였다. 결의론도 이에 맞게 발전하게 된다. 개인의 의지와 신념으로는 어떤 것이 참이고 어떤 것은 거짓이라는 식의 확실한 지식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예수회는 어떤 행동이 죄가 될지 아닐지 모를 때, '더 가능성 있는 것이나 더 확실한 것'(개연성)을 기준으로 결의론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개연성을 어디에 어떻게 갖다 붙이느냐에 따라서 구체적 상황에 대한 해석도 달라지기 때문에, 결의론은 예수회의 편의에 따라서 범죄도 범죄가 아닌 것으로 해석되기 일쑤었고, 그래서 파스칼은 이를 격렬히 비난했다. 예컨대 교회에서는 결투를 허용하지 않지만, "누군가 자신을 공격할 때 방어하는 것은 악한 행동이 아니므로" 이런 '의도' 하에서 결투는 허용된다.[1] 고리대금업도 교회에서 허용하지 않는 것이지만, "감사의 표현으로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돈을 빌려 간 사람들에게서 이익을 취하는 게 아니다.[2]

또, 돈을 주고 성직을 얻으려는 것은 교회에서 허용하지 않지만, "성직을 주게끔 성직록 수여자의 의지를 이끄는 동기로서 돈을 주는 것"이라면, 비록 성직록 수여자가 돈을 중요한 목적으로 간주하고 기대한다 해도 그것은 허용된다.[3] 마찬가지로 따귀를 맞았을 때 복수하는 것은 교회에서 허용하는 행동이 아니지만,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즉시 적을 쫓아가 칼을 휘둘러도 된다."[4]

이렇게 예수회가 상식의 기준에서 터무니없는 견해들도 '개연성'이라는 논리로 허용하자, 파스칼은 이를 신랄하게 비난했던 것이었고, 결국 파스칼의 지적이 당대에 널리 알려지게 되므로써 이후 결의론은 교회에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3. 여담

  • 니체는 자신의 책 『이 사람을 보라』에서 '결의론'을 오히려 칭찬하는데, 심지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할 덕목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5] 왜냐하면 세상의 불합리에 맞서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선 예수회 식의 '개연성'으로 자신의 심리를 '합리화'하는 방식이 필요한데, 이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삶의 비참함'[6]을 '자신이 만든 법(결의론)'으로 '합리화'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7]

[1] 나남출판사의 파스칼 저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곱 번째 편지> p.114~116[2] 나남출판사의 파스칼 저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의 <여덟 번째 편지> p.133~134[3] 나남출판사의 파스칼 저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의 <여섯 번째 편지> p.99[4] 나남출판사의 파스칼 저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의 <열세 번째 편지> p.232[5] 누군가 질문을 던질 것이다. 즉 도대체 왜 나는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전혀 관심거리도 되지 못하는 이런 사소한 것들을 이야기하는가라고. 더군다나 내가 위대한 과제를 수행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면, 그렇게 사소한 것들에 신경을 쓰는 것으로 나 자신을 해치는 것은 아닌가라고. 나는 이렇게 답한다. 사소한 것들 ㅡ 영양, 장소, 기후, 휴식, 자기애의 결의론(Casuistik) 전체 ㅡ 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중요하다고 여겨왔던 그 어떤 것보다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배우는 것을 시작해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101)[6] 파스칼과 쇼펜하우어가 말한 '삶의 비참함'을 말한다.[7] 이것이 니체가 생각하는 비극의 원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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