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3 20:59:06

겔리우스 에그나티우스

이름 가이우스 폰티우스
(Gaius Pontius)
출생 미상
사망 기원전 295년
직위 삼니움 지휘관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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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니움 장군. 센티눔 전투에서 전사했다.

2. 행적

기원전 296년 삼니움 지휘관으로 선임된 그는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삼니움 각지를 황폐화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는 다른 장군들에게 오로지 요새에 틀어박혀 수비에 전념하라고 지시한 뒤 자신은 특별히 차출된 정예병을 이끌고 에트루리아로 이동해 에트루리아인들에게 힘을 합쳐 로마를 대적하자고 호소했다.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이 로마군의 기세를 두려워해 동맹 제의를 거절하자, 에그나티우스는 직접 에트루리아 의회에 참석해 에트루리아와 삼니움이 힘을 합쳐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삼니움 스스로 로마를 이길 수 없지만, 강인한 삼니움인과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에트루리아인이 힘을 합친다면 주변 국가들을 학대하는 호전적인 로마인들을 응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논변에 설득된 거의 모든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이 에그나티우스를 지원하기로 했고, 로마의 강한 압박을 받고 있던 움브리아인 역시 그를 돕기로 했다. 에그나티우스는 여기에 더해 켈트인을 용병으로 고용하려 했다. 에그나티우스는 이렇게 확보한 연합군을 이끌고 카이쿠스의 로마군을 몰아붙였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카이쿠스는 에그나티우스에게 연전연패해 군대의 신뢰를 잃었다고 한다.

이 무렵, 비올렌스는 삼니움에서 3개 요새를 공략한 뒤 루카니아 평민들의 소동을 진압하기 위해 룰리아누스를 루카니아 쪽으로 파견하고 무스에게 삼니움의 농촌 지역을 계속 약탈하게 했다. 그러던 중 동료 집정관이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에트루리아 전선으로 향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일부 연대기에는 카이쿠스가 비올렌스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나중에 그런 적 없다고 잡아뗐다고 한다. 하지만 리비우스 본인은 카이쿠스가 실제로 편지를 보낸 적이 없다고 여겼다.

카이쿠스는 비올렌스가 자신을 돕기 위해 오자 열등감을 느끼고 삼니움으로 되돌려 보내려 했다. 비올렌스가 그와 함께 연합군을 물리치겠다고 밝히자, 카이쿠스는 동료 집정관의 임페리움을 탐낸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다가 적군이 로마 진영 가까이에 이르자, 군인들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적에 맞서 싸우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결국 카이쿠스는 뜻을 접어야 했다.[1] 이후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에트루리아-삼니움 연합군은 7,900명이 전사하고 2,010명이 생포되는 패배를 당했다고 한다.

기원전 296년 말, 삼니움-에트루리아-움브리아인들이 대군을 편성했고 켈트계 종족인 세노네스족까지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다. 로마는 지금껏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네 개 종족 연합군과 맞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마인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가장 뛰어난 군사령관으로 인정받고 있던 룰리아누스를 기원전 295년도 집정관에 재선임하고, 이례적으로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 에트루리아 전선으로 낙점했다. 여기에 비올렌스를 집정관에 재선시켜서 룰리아누스와 함께 하도록 했다. 하지만 룰리아누스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 한 동지인 무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고, 그 대신 비올렌스의 임페리움을 1년 연장해 삼니움에서 작전을 계속 수행하게 했다.

그러나 룰리아누스가 로마에 가 있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카메리눔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이 세노네스족의 습격으로 궤멸되었다.(카메리눔 전투)[2] 룰리아누스는 생존병들을 수습한 뒤 무스의 군단과 합세했다. 이후 센티눔에 주둔하고 있는 연합군을 향해 진군하던 중 연합군 진영에서 탈영한 3명의 병사가 룰리아누스를 찾아와서 연합군의 계획을 보고했다. 삼니움족과 세노네스족이 로마군과 정면 대결하는 동안, 에트루리아인과 움브리아인은 로마군의 측면과 후방을 요격하는 동시에 로마 진영을 공략한다는 것이었다. 룰리아누스는 그 계획이 실행된다면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켄투말루스와 메겔루스에게 전령을 보내 에트루리아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하라고 지시했다. 두 장군이 이에 따르자, 에트루리아인들은 자국의 시민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움브리아인들을 데리고 그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센티눔 평원에서 마주친 양군은 언덕에 숙영지를 세우고 대치했다. 에그나티우스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세노네스족 지휘관은 에트루리아인과 움브리아인이 돌아올 때까지 전투를 미루려 했다. 그러나 가능한 한 빨리 승부를 보고 싶었던 로마군이 기병대를 지속적으로 보내 도발하자, 삼니움과 세노네스족은 당장 전투를 벌이자고 강권했다. 결국 지휘관들은 로마군과 대치한 지 사흘째 되었을 때 언덕에서 내려와 전투 대형을 형성했고, 룰리아누스와 무스의 로마군 역시 전투 대형을 갖췄다. 이리하여 발발한 센티눔 전투에서 참패한 뒤 진영까지 공략하려는 로마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1] 다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카이쿠스가 동료 집정관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그와 함께 싸우려 하지 않았다는 이 기록은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카이쿠스 본인을 질시한 경쟁 귀족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한다.[2] 리비우스의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카메리눔의 식량 채집원들이 움브리아족의 습격을 받아 패퇴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