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7 00:21:22

게리 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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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쿠니
Gerry Cooney
<colbgcolor=#000000><colcolor=#aa9872,#8c7a55> 본명 제럴드 아서 쿠니
Gerald Arthur Cooney
출생 1956년 8월 24일 ([age(1956-08-24)]세)
미국 뉴욕주 맨해튼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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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
전적
31전 28승(24KO) 3패(3KO)
신장/리치 198cm / 206cm
체급 헤비급
스탠스 오서독스
링네임 Gentleman

1. 개요2. 전적3. 커리어4. 파이팅 스타일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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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권투 선수.

2. 전적

3. 커리어

쿠니는 알콜 중독자였던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으며 자랐고, 그가 복싱에 입문하게 된 계기도 10대 시절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서였다.

롱아일랜드의 헌팅턴 애슬레틱 클럽에서 트레이너 존 카포비안코 시니어에게 훈련을 받았다.

1973년 래리 데릭을 3라운드 만에 물리치고 뉴욕 골든 글러브 서브노비스 미들급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같은 해 쿠니의 형인 톰 쿠니는 서브노비스 헤비급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에릭 조지에게 패배했다. 1975년 라이트 헤비급 오픈 디비전 결승에 진출했지만, 조니 데이비스에게 패배했다. 그 다음 해 얼러스 트립을 제치고 헤비급 오픈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아마추어 전적 55승 3패를 기록한 후 1977년 프로로 전향했다.

1980년 5월에 지미 영을 상대로 4라운드 TKO승을 거두었는데, 이때 영은 오른쪽 눈 위에 난 커팅으로 인해 온얼굴에 피칠갑을 한 상태였다. 5개월 후 다음 경기에서 론 라일을 1라운드 만에 KO시켰고, 1981년 켄 노턴과의 경기에서도 경기가 시작한 지 54초 만에 노턴을 KO로 꺾었다.

1981년 10월 22일, WBA 헤비급 랭킹 1위에 오른 쿠니는 챔피언 마이크 위버를 상대로 타이틀전을 치르기로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WBA는 위버의 다음 상대로 랭킹 3위였던 제임스 틸리스를 지명했고, 그렇지 않으면 타이틀을 박탈하겠다고 전하여 위버와의 경기가 어이없이 무산되었다.

이후 WBC 헤비급 챔피언 래리 홈즈와의 타이틀전이 잡혔고, 각 선수는 1,000만 달러의 대전료를 보장받았다. 원래 1982년 3월 15일에 시저스 팰리스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쿠니의 어깨 부상으로 인해 6월 11일로 연기되었다. 그리고 이 경기는 전세계의 폐쇄회로 방송 및 PPV로 생중계되며 경기가 끝나면 일주일 후에 HBOABC에서 차례로 재방송되기로 예정되었다.

당시 헤비급에는 22년의 세월 동안 백인 챔피언이 없었기 때문에 홈즈와 쿠니의 경기는 엄청난 주목을 받았으며, 이 경기는 1910년 잭 존슨이 제임스 J. 제프리스와 싸운 이래 복싱에서 가장 인종적 색채가 강한 이벤트 중 하나였다. 이에 프로모터 돈 킹은 "이것은 백인과 흑인의 싸움입니다."라는 말까지 하며 경기를 홍보했다.

라스베이거스에는 29,284명의 관중이 모여 7,293,600달러의 라이브 게이트 기록을 세웠으며, 경기장에는 조 디마지오, 파라 포셋, 라이언 오닐, 웨인 그레츠키, 잭 니콜슨 등 많은 유명인들도 참석했다. 심지어 쿠니의 탈의실에만 특별히 핫라인이 설치되어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과 직접 통화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경기에서 쿠니는 수많은 백인들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홈즈에게 압도적인 기량차로 밀리며 완패하고 말았다. 경기 후 쿠니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거듭 사과를 했고,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며 자책하였다.

이후 부상과 약물 남용 문제로 인해 쿠니는 2년 동안 다시 싸우지 못했고, 1984년에 치른 두 번의 경기에서 모두 승리하며 은퇴를 선언했다가 1986년에 복귀전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1987년에 마이클 스핑크스를 상대로 두 번째 타이틀전을 치렀는데, 스핑크스는 이 경기 전에 지명 도전자였던 토니 터커와의 경기를 거부하는 대신 쿠니와 경기를 택하여 IBF 타이틀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다른 18개 주 위원회와 링매거진은 이 경기를 세계 헤비급 타이틀전으로 인정했다. 8:5의 언더독이었던 스핑크스는 쿠니를 두 번이나 다운시키며 5라운드 TKO승을 거두었다.

1990년에 다시 한 번 링으로 복귀하며 조지 포먼과 맞붙었지만, 2라운드 만에 TKO패를 당했다 .

은퇴 후 위기청소년들과 함께 일했고, 은퇴한 권투 선수들을 돕는 조직인 FIST(Fighters' Initiative for Support and Training)를 설립했다.

4. 파이팅 스타일

실생활은 왼손잡이지만 오서독스로 서는 다른손잡이 복서다. 그로 인해 앞손 위주의 경기운영을 주로 하였고, 왼손 잽과 훅이 상당히 빠르고 강력했다.[1] 리치도 길어 잽싸움에 이점을 가져가기도 했다. 머리뿐만 아니라 바디로 펀치를 심는데에도 능했다.

단점은 다른 손잡이다보니 앞손은 능하지만 뒷손인 오른손의 활용도가 미숙했다.

5. 여담

1976년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했다.

1987년에 권투 역사가 허버트 골드먼은 쿠니를 역대 최고의 헤비급 선수 20위로 선정했다.

1997년 11월 13일, 뉴저지 주 복싱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2003년에 링매거진은 쿠니를 역대 최고의 하드펀처 53위로 선정했다.

2014년 3월 30일, 뉴욕 주 복싱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1] 조지 포먼은 자신이 맞아본 강력한 펀치는 쿠니, 론 라일, 클리블랜드 윌리엄스를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