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10 03:11:07

검은 수요일

1. 개요2. 배경과 진행
2.1. 유럽 환율 메커니즘2.2. 파운드화 약세와 영란은행의 패배
3. 기타

1. 개요

Black Wednesday

영국이 파운드 공매도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ERM을 탈퇴한 사건이 벌어진 1992년 9월 16일 수요일을 지칭하는 용어. 이 때 비슷하게 이탈리아 리라도 ERM을 탈퇴하였다. 영국은 이후 현재까지 유로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탈리아는 유로존 창립 멤버로 복귀하게 된다.

2. 배경과 진행

2.1. 유럽 환율 메커니즘

European Exchange Rate Mechanism (ERM)

유럽 경제의 완전한 통합과 이를 위한 유로존 출범을 위한 사전 작업의 일환으로 유럽 각국은 ECU(European Currency Unit)라는 유로화의 전신에 해당하는 거래 단위(unit of account)를 도입한다 [1]. ECU는 실제로 통용되는 화폐가 아닌 환율 안정을 위한 장부상의 화폐로 유로화의 전신격이지만 동전이나 지폐는 존재하지 않는다. ERM 제도는 ERM 참여국의 통화를 ECU에 페그시키고 환율이 일정 범주 안에서만 움직이도록 조정하는 일종의 고정 환율제도이다. ECU는 참여 국가들이 출자한 통화를 바탕으로 산정하며, 독일 마르크가 ECU 바스킷에서 항상 30프로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 강력한 구심점이었다[2]. ECU에 페그된 자국 통화의 가치가 지나치게 높거나 낮아지면, 각국 중앙은행이 환율에 개입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지나치게 높거나 낮아지면'의 범주는 하루 변동폭 2.25%였으나 영국 파운드, 이탈리아 리라, 스페인 페세타, 포르투갈 에스쿠도의 경우 6퍼센트였다. 유로화 출범을 위해서 각국 통화의 환율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사전 작업의 일환이다.

ERM은 유로 출범 전 초창기의 ERM I과 유로 출범 이후의 (즉, 1999년 1월에 시행된) ERM II가 있는데 본 문서에서 설명하는 상황은 1992년이기 때문에 ERM I이다. ERM II는 유로존에 가입하기 위한 조건 또는 유로화 그 자체라고 보면 된다. ERM I 상황에서 각국 통화가 ECU에 페그 되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ECU의 중추 역할을 하며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입김이 가장 센 독일의 마르크화에 각국 통화를 페그했다고 보면 된다. 브레튼우드 체제에서의 달러화 처럼 유로화 출범을 위해 마크르가 달러 같은 구심점 역할을 한것이다. ERM II 역시 유로 문서에 나오듯, "유로존 가입을 원하는 국가는 2년간 유럽의 환율 변동을 조정하고 통화 안정성을 확보한다는 목적 아래 유럽환율 메커니즘(ERM Ⅱ)에 참여해야 한다. ERM Ⅱ는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3% 이하 등 5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재정적자 외에 이자율, 환율, 정부부채, 인플레이션 수준이 적합해야 유로존에 가입할 수 있는 것이다." ERM I이나 ERM II나 목적은 단일 경제권과 단일 통화를 위해서 경제 상황과 환율을 동기화 시키는 것이다.

영국은 최초에 ERM I에 가입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 재무장관이었던 노동당의 데니스 힐리는 ERM이 ERM 내에서 독일에 비해서 작은 경제를 가진 국가들을 희생하여 독일 마르크화의 절상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힐리는 이를 통해 독일이 부당한 이득을 본다고 여겼다.[3] 하지만 그의 후임자들인 보수당의 제프리 하우와 존 메이저는 당시 여론 등을 고려하여 결국 ERM I에 찬성하고 가입하게 된다.

2.2. 파운드화 약세와 영란은행의 패배

문제는 ERM I 상황에서 당시 동서 통일 이후 구 동독 지역 부흥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풀어버린 독일이었다. 독일은 막대하게 투입된 (즉, 찍어낸) 마르크화들[4]에 의한 인플레이션 방어를 위해 금리를 엄청나게 인상하였다. 이 때문에 ECU의 실질적 구심점인 마르크화에 페그된 유럽 각국의 화폐가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되고 이는 ERM 원칙에 의하여 각국 중앙은행의 개입을 일으키게 된다.

조지 소로스 항목에도 나오듯, 영국은 파운드화의 약세를 막기 위해 파운드화를 매입하고 동시에 금리를 인상하지만, 이는 안그래도 상대적으로 허약한 영국 경제를 더욱 침체로 몰아넣게 된다. 허약한 영국 경제와 파운드화가 파운드 약세의 대세를 거스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환투기 세력은 조지 소로스를 위시하여 영국 파운드화에 엄청난 공매도 포지션을 구축하고 결국 1992년 9월 16일 수요일에 일이 터지고 만다. 이 날 아침 8시 30분 전에만 총 6억 파운드에 달하는 파운드화 매도 물량을 영란은행은 방어하지만 시장의 압력이 너무 강해서 무려 두시간 만에 금리를 10프로에서 12프로 까지 올린다고 선언한다! 결국 영란은행은 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금리를 15프로 (...) 까지 올리겠다고 공언하지만, 공매도 세력은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영국은 ERM에서 탈퇴한다. 이로 인해 영국은 유로화 통용국에서도 제외된다.

3. 기타

아무도 신경 안썼지만 이탈리아와 스페인도 피를 보았다. 이탈리아 역시 ERM을 탈퇴하였지만 영국과는 다르게 몇 년 후 다시 유로존으로 컴백하게 되어 유로존 창립멤버가 된다.

ERM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유로화 사태를 참조하면 좋다.


[1] 실제 화폐는 아니고 장부상으로 각국의 환율 조정을 위한다는 점에서 케인즈의 방코르(bancor)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2] 유로 문서 기타 항목에도 나오듯이 마르크화는 실질적인 유로화의 전신이다.[3] 이는 유로화 사태 때 그리스의 선박제조 산업 붕괴와도 같은 맥락이다. 독일과 그리스가 같은 화폐(유로)를 쓰기 시작하니 독일의 경상수지 흑자로 고평가된 유로화가 드라크마를 썼을 때 보다 그리스의 수출 경쟁력을 깎아 먹은 것이다. 거꾸로 독일 입장에서는 그리스 같은 약체 경제 편입으로 유로가 마르크를 썼을 때 보다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었기 때문에 수출 경쟁력에서 우위를 가진다. 즉, 그리스의 경제를 희생하여 독일이 살아난다는 해석.[4] 재정 확대 등 많은 요소가 있지만, 단적인 예로 가치가 낮은 동독 마르크를 동독 안정화와 정치적 이유로 서독 마르크와 1:1로 교환해주었다. 정상적이라면 (즉, 암시장에서) 동독 마르크는 서독 마르크의 약 1/3 가치를 가졌다고 한다. 서독이 부작용을 모르고 막무가내로 1:1 교환을 해준건 아니고 곧이 곧대로 시장 환율을 적용해서 동독 주민들을 가난하게 만들면 통일 후 동독 지역이 공동화 되고 당연히 통일에 대한 불만이 강해질테니 어찌 보면 울며 겨자먹기로 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