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강희중 姜熙重 | |
출생 | 1926년 10월 11일 |
전라북도 익산 | |
사망 | 1950년 9월 3일 |
경상북도 경주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최종계급 | 육군 일등상사 |
복무 기간 | 1947~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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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희중(姜熙重, 1926년 10월 11일 ~ 1950년 9월 3일)은 대한민국의 6.25전쟁 참전 군인이다.2. 생애 및 군 경력
초기 생애 및 해군 입대강희중은 1926년 10월 11일, 전라북도 익산에서 출생하였다.
1947년 4월, 조선경비대에 입대하여 군 경력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대한민국 육군 제18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 선임하사로 복무하였다.
6.25 전쟁 참전
낙동강 방어선 전투 및 기계 전투 (1950년 8월 18일 ~ 9월 3일)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서울이 6월 28일 함락되고, 대전마저 7월 20일 북한군에게 점령되었다.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낙동강 방어선에서는 다부동 전투, 포항 전투, 기계 전투, 영천 전투 등 마지막 저항선이 형성되었으며,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국군은 결사항전을 전개하였다.
그중에서도 기계 지역은 포항과 안강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이를 상실하면 동부전선 전체가 위태로워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강희중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18연대 1중대는 1950년 8월 18일, 북한군에게 빼앗긴 기계 일대를 탈환하기 위한 전투에 돌입하였다.
그는 주도면밀한 공격 작전으로 적진에 침투하여 요지를 점령하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적군을 섬멸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기계 전투의 치열한 공방
기계 부근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공격과 역습이 반복되었으며, 고지는 수차례 주인이 바뀌는 혈전이 벌어졌다.
그 결과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전장은 처참한 광경을 이루었다.
그러나 강희중 일등중사와 제1중대의 결사적인 항전 덕분에 북한군의 부산 진출 계획이 저지되었으며, 이 전투에서 국군은 적군 1,245명을 사살하고, 17명을 포로로 잡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 직접 장병들의 공을 치하하였으며, 미군 역시 기계 전투를 6.25 전쟁 최고의 전투 중 하나로 평가하였다.
최후의 전투 및 전사 (1950년 9월 3일)
1950년 9월 3일, 강희중 일등중사는 2차 안강-기계 전투에서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였으나, 적의 총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의 용맹한 희생 덕분에 국군은 기계 지역을 사수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강희중 일등상사의 희생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50년 12월 30일,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하였으며, 그를 일등중사에서 일등상사로 1계급 특진하였다.
또한 2014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그를 "8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3. 공훈
화랑무공훈장 (1950년 12월 30일, 사후 추서)육군 일등상사 1계급 특진 (1950년, 사후 추서)
국가보훈처 이달의 6.25전쟁영웅(2014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