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7 19:37:03

강문범

파일:강문범.jpg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1910년 8월 18일
전라남도 제주군 좌면 상예리
(現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상예동)[1]
사망 1948년 12월 4일
제주도 서귀포시 천제연
본관 진주 강씨
부모 아버지 강형규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문범은 1910년 8월 18일 제주도 제주군 좌면 상예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강형규(姜衡奎)의 장남으로, 중문리의 진수의숙(進修義塾)에서 4년간 공부한 뒤 1926년 제주공립농업학교 1학년을 수료하고 1929년 7월 전남공립사범학교 2학년에 재학 중 독서회 중앙본부 산하 전남사범학교 독서회에 가입하고 동지들과 함께 사회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 창립 멤버 14명 중 강문범, 이신형(李信珩), 신휴근(愼休根) 등 3명은 제주 출신이었다.

독서회는 1929년 9월 중순 광주형무소 뒷산에서 모임을 갖고 조직을 개편했는데, 강문범은 조직교양부 위원에 선임되어 조직 강화에 힘썼다. 그러던 1929년 11월 3일 광주역 앞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 학생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300명과 전남 공립사범학교 학생 및 광주 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은 연합해 광주 시내 곳곳에서 항일 구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전개했다. 이에 학교 측은 다음날인 1929년 11월 4일부터 11일까지 휴교한 후 12일에 개교했다.

강문범은 개교일인 11월 12일에 동지를 규합해 광주 시내를 행진하며 시위 활동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30년 10월 18일 광주지법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을 언도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해 항소했고,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학생들의 항일 비밀결사인 혁우동맹(革友同盟)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관계자들이 대거 체포될 때, 그 역시 연루되어 몇달간 구금되었다가 1933년 2월 28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그해 4월 목포지청으로부터 불법 구금에 대한 보상을 청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강문범은 1940년 가파도의 개량 서당인 신유의숙(辛酉義塾)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가파도 주민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이 서당에서 교사로 활동한 이들은 대개 공산주의 성향의 청년들이었다. 그 후 1945년 8.15 광복이 도래하자 제주도로 돌아와 청년 운동을 전개했지만, 1948년 4.3 사건에 연루되어 서귀포 경찰서 중문지서에 구금되었고 그해 12월 4일 천제연에서 총살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강문범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인근의 회수동·하원동과 함께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