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5 22:43:30

혜선옹주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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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식 후궁 첩지가 있는 사람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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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의 후궁
혜선옹주 홍씨 | 惠善翁主 洪氏
관명 가희아(可喜兒)
출생 미상
사망 미상
본관 미상
배우자 태종
자녀 없음
1. 개요2. 생애
2.1. 스캔들2.2. 후궁 책봉2.3. 뇌물 수수 의혹2.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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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태종의 후궁. 보천(甫川)[1]기생 출신으로 가무를 잘하여서 태종의 총애를 얻어 후궁이 되었다.[2]

2. 생애

2.1. 스캔들

혜선옹주는 본래 기생 출신으로 가무에 재능이 뛰어나 궁중에서도 항상 부르는 기생이었다. 이런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들이 많았는지 스캔들을 일으켰는데, 1407년(태종 7) 가희아 때문에 군사까지 동원해 싸우는 큰일이 벌어졌다.

대호군 황상이 먼저 그녀를 기첩[3]으로 삼았다. 그러자 총제 김우는 기병과 보병을 동원해 황상의 집을 포위하고 집안에 들어가 가희아를 빼앗으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집안에서 가희아를 찾을 수 없었다. 다음날 다시 가희아를 빼앗으려고 시도했는데, 황상도 이 소식을 듣고 군사 20여명을 데리고 김우의 군사들과 서로 싸우게 한 것이다.[4] 단지 여자 한 명때문에 관리들끼리 군사를 동원해 싸우는 일이 벌어진 셈.[5] 태종은 황상은 파직하고, 가희아에게는 곤장 80대를 선고하되 수속(收贖), 즉 진짜로 매를 때리진 않고 그에 상당하는 벌금을 내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게 하고, 김우는 공신이라는 이유로 일단 처벌하지 않았다[6]

2.2. 후궁 책봉

그런데 이 '가희아'라는 이름이 몇 년이 지나 다시 《태종실록》에서 등장한다. 1413년(태종 13) 태종은 한성부 관리들이 쓰는 의막을 가희아에게 하사하였고[7], 다음해에는 가희아를 혜선옹주로 책봉하였다.
임금이 상소한 말 가운데 불경(不敬)한 말이 있다 하여, 조계생과 집의(執義) 안숭선(安崇善)·장령(掌令) 송포(宋褒)·조서강(趙瑞康)·지평(持平) 김경(金俓) 등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 소(疏) 가운데 말한바 김우와 다툰 첩이란 바로 창기(娼妓) 가이(加伊)이니, 그는 뒤에 태종이 노래를 잘한다 하여 궁중에 들이어 총애한 바 있고 드디어 옹주(翁主)로 봉하였는데, 그것을 말하여 ‘더러운 이름이 중외에 자자하게 들리어 식자들이 수치스럽게 여겼다.’ 하여, 신하로서 휘피(諱避)해야 할 의리에 어김이 있다 하여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10년 10월 20일

이와 같은 기록을 보면 황상과 김우가 다툰 기생 가희아가 태종의 후궁 혜선옹주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3. 뇌물 수수 의혹

한편, 1415년(태종 15)에 혜선옹주는 뇌물을 받았다는 구설수에 오르는 일도 있었다. 전 황주목사 염치용이 노비 소송에서 패하자 민무회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할 말과 못 할 말을 가리지 못한 것이다. 염치용이 한 말은 자신의 부리는 종 서철 등이 큰 부자인데, 혜선옹주와 영의정 하륜에게 뇌물을 주어 태종에게 좋은 말을 하게 하여 내섬시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말을 민무회가 충녕대군에게 전하고, 충녕대군은 다시 아버지 태종에게 전하면서 태종이 크게 화를 냈다. "그럼 내가 대신과 시첩의 말을 듣고 부당하게 처리했다는 말이냐"고 하면서 근거없는 말을 옮기고 다닌 염치용, 민무회 등을 하옥시켰다.[8]

2.4. 기타

대중매체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용의 눈물의 원작인 월탄 박종화의 세종대왕에서 꽤 비중있게 등장한다. 강계 출신의 기생으로 이숙번이 태종에게 바치는데, 이후 엉뚱하게도 경녕군(...)을 낳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세자의 비행을 드러내려 갖은 공작을 가한다. 결국 폐세자가 결정되면서 세자의 어머니가 될 생각에 설레발을 치지만 충녕대군이 새 세자로 결정되면서 닭쫓던 개 신세가 된 후 등장이 없다.

웹소설 신녕궁주전에서는 홍가히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후궁이 된 후 은근히 신녕옹주 아지를 도와주며, 태종 사후에 소리소문도 없이 대궐을 떠나 사라진다.
[1]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2]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 초기에는 기생 출신이라도 얼마든지 후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태종 이후에는 기생 출신 후궁은 찾아볼 수 없다.[3] 기생 출신 첩실[4]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12월 2일 신사 1번째기사. #[5] 게다가 기록에 의하면 백성들이 그걸 보고 있었다.[6] 오히려 가희아는 관리들에게 휘둘린 피해자였음에도 공식적인 벌을 받고 정작 가만히 있던 가희아를 납치하려던 김우는 공신이라는 이유로 벌을 면한것이다[7]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1월 7일 정해 3번째기사. #[8]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4월 9일 병자 1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