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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성

대만어, 대만 중국어: 臺北城, 臺北府城
영어: Walls of Taipei

1. 개요2. 역사
2.1. 번외: 타이베이성 북문
3. 관련 문서

1. 개요

대만 타이베이시에 있는 청대(대만청치시기) 후기에 지어진 성곽요새이다. 현재는 대부분이 철거되고 일부 성문만이 남아 있다.

"대북성", "타이베이 부성(臺北府城)"이라고도 부른다.

2. 역사

대만에서 중화제국 시기에 지어진 주요 중 하나이다.[1] 1876년 타이완 섬에 세워진 행정구역 중 하나인 대북부(臺北府)가 나타난 후 3년 만인 1879년 대북부에 성을 세울 계획을 세웠다. 사실 이전부터 일본 제국류큐 왕국을 병합하여 타이완 섬 일대가 일본으로부터 가까워진 점, 그리고 모란사 사건으로 인하여 청과 일본 사이에 갈등이 더 커진 점으로 인해 타이베이 일대에 성을 세우게 된 것이다.

1884년(광서 10년)에 건축이 완성되었으며, 이후에도 성을 더 보수하기도 했었다. "타이베이"라는 도시명도 타이베이가 설립된 이후 본격적으로 이 곳에 세워진 성 이름에서 총칭되었다.

성곽 둘레는 1506장(丈)[2]으로 그 당시 푸젠성에서 12번째로 큰 도시였고, 2개의 주요 행정기관들[3]이 이곳에 있었다. 그 외 북문, 남문과 소남문, 동문, 서문 등의 성문들을 세웠다.

1884년에는 청불전쟁이 발발했는데 이 때 타이완 섬이 프랑스로부터 위협을 받았으나 청군은 프랑스군을 격퇴했다.

청일전쟁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인해 대만은 일본에 할양되었고, 대만의 청나라 관료들과 일부 대만인들은 1895년 5월 23일에 타이베이성에서 대만민주국을 수립해 일본에 저항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6월 4일에 일본군지룽을 점령하자, 대만민주국의 주요 인사들은 6월 6일에 단수이를 경유해 대륙으로 도망쳤다. 관료들이 도망치고 남은 타이베이의 유력 인사들은 일본의 통치를 수용하기로 했고, 그 결과 타이베이성은 6월 11일에 너무 쉽게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후 대만총독부는 1897년 도시개발을 위해 성곽을 해체할 것을 발표하였으며, 1899년부터 성곽 일부를 제거하기 시작하며, 1900년에는 해자가 매립되었고 그 외 해자와 성벽 사이의 공간을 공원으로 만들거나 성벽을 통과하는 도로를 지었다. 1904년 때는 대규모로 철거하여 세워진지 30년만에 성곽과 해자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일부 허물어진 성벽들은 타이베이 형무소 둘레를 이루는 벽으로 지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타이베이성은 4개의 성문만 남아있으며 일부 남아있는 성벽들은 다른 건물에 쓰이게 되었다.

2.1. 번외: 타이베이성 북문

성문의 경우 현재는 북문, 남문과 소남문, 동문 4개의 성문들과 일부 성곽이 있는 흔적지대만 남아있다. 1900년 성벽들을 통과하는 도로 공사를 지었는데 서문은 이 때 철거되어 사라졌다. 나머지 북문, 남문, 소남문, 동문은 그대로 남았으나, 일부는 2차대전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손상을 입었다.

1966년 대만(중화민국) 정부는 손상을 입은 채 방치되었던 타이베이성 남문, 동문, 소남문의 복원을 시작한다. 복원할 때 베이징 궁전 건축 양식대로 누각을 짓는 바람에 북문 이외의 성문들은 누각의 형태가 원형과 다르다. 이렇게 된 것은 모르고 그런 게 아니라 의도된 것으로, 이 때의 복원은 문화재 보존의 차원이라기보다는 국민당의 대륙 수복 의지를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까지는 청천백일이 그려진 국민당 당휘가 문에 내걸렸을 정도인데 국민당 일당체제가 무너지고 나서 하나 둘 철거되었다.

북문은 타이베이부성 북문(北門, 베이먼) 또는 승은문(承恩門, 청언먼)이라고도 불리며 5개의 성문들 가운데 그래도 상대적으로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성문 밑, 아치 부분은 회색 벽돌로 지어졌고, 윗부분은 붉은 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게 특징이다. 원래 성문 밖에는 옹성(甕城)[4]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현재는 이러한 구조가 남아있지 않다. 1966년 복원이 시작되긴 하였으나 당국의 관심에서 멀어져 동문, 남문, 소남문과 같은 마개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타이베이역 방면 중샤오(忠孝)로와 연결될 단수이강(淡水河)을 건너는 다리 신축 과정에서 이 둘을 직결할 고가도로 계획이 세워지면서 철거 위기에 닥친다. 신설 예정이었던 고가도로 선형이 정확히 북문이 있는 자리를 관통하는지라 철거가 불가피하였으나, 학계와 시민사회의 반대로 북문은 철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철거만 피했을 뿐이지 북문은 고가도로 본선과 남쪽 진출 램프에 완전히 끼어있는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사진1 사진2 여기에 간선철로인 종관선이 북문에 거의 붙어서 지나가기에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사실 고가도로도 북문을 둘러싼 원형교차로를 관통하는 철로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해당 철로에 관한 내용은 베이먼역 참고.

1989년 종관선이 지하화되면서 사람들도 서서히 북문 완전 복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95년 교통 흐름에 방해 요인이 되었던 고가도로 진출 램프가 우선 철거된다. 2016년 북문 보존에 방해가 되는 고가도로는 철거되었고, 2017년 8월 3일에는 베이먼 광장이 설립되어 북문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베이먼 광장을 만들면서 북문 주변에 위치한 식민지 시기 타이베이 우체국 청사, 대만총독부 교통국 철도부 청사, 미쓰이 창고 등도 복원하여 박물관으로 개조하였다.

현재 북문은 타이베이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 및 문화재이자 대만의 국가 기념물이기도 하다.

3. 관련 문서



[1] 역대 중화제국 중 청나라만 유일하게 대만을 정복하여 지배했다보니 중화풍의 성곽 및 성으로서는 청나라 때 지어진 성곽들이 많다.[2] 1척의 10배를 나타내는 척관법 단위로, 약 3미터에 해당한다.[3] 대만순무아문(臺灣巡撫衙門)과 대만포정사사아문(臺灣布政使司衙門)등[4] 성문 주변을 둥글게 또는 네모 모양처럼 두른 성곽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