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1 22:29:01

존 F. 케네디 주니어

<colbgcolor=#000><colcolor=#fff> 존 F. 케네디 주니어
John F. Kennedy Jr.
파일:JFK Jr.webp
본명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주니어
John Fitzgerald Kennedy Jr.
출생 1960년 11월 25일
미국 워싱턴 D.C
사망 1999년 7월 16일 (향년 38세)
미국 매사추세츠 주 근방 대서양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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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캐롤린 버셋[1] (1996년 결혼–1999년 사망)
아버지 존 F. 케네디(1917년생~1963년 사망)
어머니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1929년생~1994년 사망)
직업 기자, 변호사, 잡지 발행인
학력 브라운 대학교 (미국학 / 학사)
뉴욕 대학교 (법학 / J.D.)
신체 185cm, O형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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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4명의 자식 중 셋째. 요절하기까지 연극인, 변호사, 잡지 발행인 등 여러 직업을 거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당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연예인인 마돈나대릴 해나[2] 등 여러 미인이 꼬이고, 현존하는 남성 중 제일 섹시하다는 평을 받은 적도 있다. 정계에서는 케네디의 유일한 아들인 그를 탐냈으나, 그가 정치계에 발을 들이는 일은 없었다.

2. 생애

파일:external/assets.nydailynews.com/john-f-kennedy-jr.jpg

태어나고 3년을 3일차로 채우지 못한 1963년 11월 22일, 아버지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에 있는 사람이 본인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천진난만하게 경례를 하는 모습이 전 미국에 방송되어 사람들의 눈물을 짓게 했다. 그 후 어머니 재클린 케네디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틀 소크라티스 오나시스와 1968년 재혼하면서 1975년 오나시스가 사망할 때까지 오나시스 소유의 개인섬 스콜피오스와 뉴욕을 오가는 삶을 살았다.

1982년 브라운 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극에 관심을 가져, 1985년 8월 위너스라는 공연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 재클린 케네디의 만류로 연극에 대한 관심을 접고 1986년에 뉴욕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 1989년 8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맨해튼의 지방검찰청 검사사무실에서 1993년까지 일하면서 맡은 6건을 모두 승소한다. 숙부인 테드 케네디(Edward Moore Kennedy)와 JFK의 장녀인 캐럴라인 케네디(Caroline Bouvier Kennedy) 등 케네디 가문에서 하버드 졸업은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데 브라운 대학교와 뉴욕 대학교 졸업은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보다 앞선 1988년에는 민주당 대통령 선거 경선에 출마한 숙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을 위해 전당대회에서 찬조연설을 하기도 했다.[3] 그는 "저의 부친께서는 20여년 전 이 자리에서 우리 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셨습니다!"라고 말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8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연설하는 존 F 케네디 주니어. 미남으로 유명한 아버지와 우아한 어머니를 둔 28살의 잘생긴 청년이다.

주변 사람들은 "아버지의 대를 이을 엄청난 재목"이라며 정치에 입문하기를 권했으나, 어머니인 재클린 케네디의 만류로 생전 38세까지 정계에 발을 들이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행보로 봤을 때, 정치 입문은 시간 문제라는 시각이 많았는데 변호사로서 10년 정도 경험을 쌓은 전도유망한 유력 가문의 후계자였던 것이다. 당시의 대중 여론도 한 명의 셀레브리티로 '미국의 왕자님'과 같은 시각에서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가졌으며 따라서 정치 데뷰에 대한 기대감이나 잠재력도 상당한 인물이었다. 젊고 매력적이며 이지적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의 웨일스 공 윌리엄 포지션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의 DNA에 새겨진 정치에 대한 욕망은 1995년 정치평론지인 조지의 발간으로 이어지면서 정계 진출의 가능성을 열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이름에서 딴 제목이었는데, 당시 인기 절정을 누리고 있던 슈퍼모델 신디 크로퍼드에게 조지 워싱턴 복장을 입힌 창간호 표지가 화제가 되었으며 월 50만부를 찍을 정도로 인기있는 평론지였다고 한다.

파일:JFK jr GEORGE.jpg

2.1. 사망

1996년 캐롤린 베셋 케네디(Carolyn Jeanne Bessette-Kennedy, 1966년 1월 7일 생)[4]와 6개월 간의 교제 후 결혼하였으나, 3년 후인 1999년 7월 16일, 로리 케네디[5]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내, 처형인 로렌 버셋과 함께 단발 엔진 경비행기[6]를 타고 매사추세츠주 마서스비니어드로 향하다 추락한다. 향년 38세. 자녀를 남기지 못한 채 죽어서 가문의 수장 자리는 막내숙부인 에드워드 케네디와 죽은 삼촌 로버트 케네디의 자녀들인 사촌들이 이어받았다. 케네디 주니어의 비행기 사고로 로리 케네디의 결혼식은 일단 취소됐다가 이듬해에 해외에서 단촐하게 거행되었고, 그가 창간한 조지는 그의 사망의 여파로 약 1년 반 후인 2001년 1월에 폐간된다.

사고 원인은 좋지 않은 기상과 조종 미숙. 뉴욕 에섹스에서 이륙할 때 안개와 구름으로 인해 가시거리는 8마일 정도로 제한되었으며 근처를 비행하던 비행기는 수평선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케네디 주니어는 해당 기체를 매입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으며 IFR 면허가 없어 VFR로 무모한 비행을 감행해 공간 감각을 상실한 것이 원인으로 밝혀졌다. 비행 경험이 부족한 케네디 주니어가 가시거리가 확보되지 않은 심야에 수면 위를 날다가 계기를 믿지 않고 본인의 감각으로 평행을 유지한다고 착각해 실속했고 이것이 추락 사고로 이어졌다는 것. 심지어 당시에 사고 8주 전에 케네디 주니어는 패러글레이딩을 하다 왼쪽 발목이 골절되어 깁스까지 했다가 깁스를 막 풀은 상태였다. 주치의나 가까운 친구 모두 그 발목으로는 경비행기를 조종하기 어렵다고 만류했으나 케네디 주니어가 비행을 강행한 것 역시 사고의 한 원인으로 거론됐다.

사망 당시 케네디 주니어는 재정난과 파경 위기 등으로 스트레스가 심했다는 사실을 언론에서 보도하기도 했다. 케네디 주니어가 야심차게 내놓은 '조지'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창간한 잡지라는 평을 받았고 케네디 주니어도 직접 기사 작성, 편집, 방송 출연을 통한 홍보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갈수록 혹평받고 판매부수도 저조해졌다. 출간하고 있는 잡지가 폐간될 위기에 놓이자 보그 등을 출간하고 있는 유력 출판사에 접촉해 잡지를 매각하려 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내인 캐롤린 버셋과 자녀계획 때문에 다툼이 잦아서 이혼 직전이라고 가까운 친구들에게 하소연했다고. 그의 사후 케네디 일가와 친분이 있다는 언론인은 케네디가를 다룬 본인의 저서에서 캐롤린 버셋이 결혼 이후 파파라치의 타겟이 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마약에 손을 댔고, 전 남자친구와 만났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캐롤린 버셋이 사고 당일에 패디큐어를 받느라 2시간이나 지각해 케네디 주니어가 늦은 시각에 이륙할 수밖에 없었다는 보도가 났다. 이에 발목이 다친 데다가 비행 경험이 미숙한 케네디 주니어가 밤에 비행기를 몰게 돼서 사고가 났다며 캐롤린 버셋에 대한 비난 여론이 있었다. 비난 여론과 별개로 캐롤린 버셋의 부모는 케네디 주니어의 조종 미숙으로 딸들을 잃었기 때문에 소송을 걸어 200만 달러를 배상받았다[7].

그의 장례식은 뉴욕 맨해튼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세인트 토머스 성당에서 거행 됐으며, 빌 클린턴 대통령 부부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고, 미국 언론이 보도 경쟁을 벌였다. 실질적인 가문의 적통[8]었던 그의 사망으로 케네디가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은 사그러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기타

  • 아버지의 섹스 어필을 물려받았는지 언론 화제기사란에 종종 등장했고, 다음은 언론에서 그에게 붙인 별명이다.
    세계에서 제일 섹시한 남성(피플,1996)

    신비한 케네디의 후계자

    마돈나, 대릴 해나 등 유명 연예인과 데이트를 즐긴 젊은 잡지 발행인

    자가용 비행기를 직접 조종하며 유람하는 제트족[9]
  • 당시 잘생기고 섹시한 이미지로 여성층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그 예로 초대박을 친 미드 〈프렌즈〉 시즌 3 에피소드 5에서 주인공 레이첼이 '같이 자고 싶은 스타'로 존 F.케네디 주니어를 언급한다.
  •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불과 수개월 전인 1999년 2월, 한국을 방문했다. 방한 당시 연세대에서 초청 강연을 갖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비교적 작은 세미나실에서 개최하려던 것을 방청객이 많아지면서 더 큰 강당으로 옮겨 진행했다.
  • 그가 죽기 전 공항까지 타고 갔던 차가 당시 친분이 있던 정몽준 의원이 선물한 현대 티뷰론 컨버터블이었다고 하며 그의 경비행기가 추락한 곳은 에드워드 케네디가 차파퀴딕 사건을 일으킨 마서스 비니야드 섬의 대서양 상공이라고 한다.
  • 미국 현지시각 2021년 11월 2일, 또 QAnon들이 존 F. 케네디 주니어가 부활(?)해서 트럼프 대통령을 복위 시켜줄거라는 믿음으로 존 F. 케네디가 사망한 델라스의 Dealey Plaza에 모였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 1966년 1월생으로 결혼하기 전까지 캘빈 클라인(의류 브랜드)에서 홍보 담당자로 근무했다. 비행기 사고로 동승 중이던 남편, 언니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2] 블레이드 러너레플리칸트 여인 프리스 스트래턴, 스플래시인어, 킬 빌엘 드라이버로 유명하다.[3] 당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는 매사추세츠 주지사 마이클 두카키스가 선출되었지만, 공화당 후보였던 부통령 조지 H. W. 부시의 네거티브 선거전략에 휘말려 낙선했다.[4] 뉴욕주 웨스트체스터의 화이트플레인스 출신으로, 보스턴 대학교를 졸업했다.[5] 로버트 F. 케네디의 딸이며, 존 F. 케네디 주니어에게는 사촌동생이 된다.[6] 사라토가 파이퍼 계열 6인승 프로펠러기였다.[7] 캐롤린 버셋의 지각 여부와 별개로 이륙 결정은 케네디 주니어가 했다. 그리고 사고 기종이 케네디 주니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기종이기도 했고, 케네디 주니어의 비행시간이 적어 보험도 못 든 상태였다. 그래서 캐롤린 버셋은 생전에 절대 남편이 모는 비행기에 안 타겠다 했지만 이혼 직전인 여동생 부부를 돕기 위해 로렌 버셋까지 나서서 로리 케네디의 결혼식에 같이 가자고 한 바람에 탔고 결국 사망했다.[8] 귀족 문화가 이어진 유럽권, 그리고 이를 선망하는 미국에서 의외로 가문은 대중들에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트럼프 가문이나 부시 가문에 대한 관심에서 이러한 사실이 드러난다.[9] 제트족이란 제트기를 타고 세계 각국을 유람 다니던 부유층을 가리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