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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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민주 공화국 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ს დემოკრატიული რესპუბლიკა sakartvelos demokratiuli respublika | |||
국기 | 국장 | ||
지도 | |||
1920년 조지아 민주 공화국이 주장한 강역 | |||
1918년 5월 26일 ~ 1921년 2월 25일 | |||
국가 | 찬양 | ||
수도 | 티플리스 | ||
면적 | 107,600 ㎢ | ||
정치체제 | 공화제 | ||
언어 | 조지아어 | ||
인구 | 2,677,000명 | ||
통화 | 조지아 마네티 | ||
역사 | • 건국: 1918년 5월 26일 • 멸망: 1921년 2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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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아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공화국. 여성 참정권을 부여한 유럽 최초의 국가 중 하나였고, 멘셰비키들이 주가 되어 민주주의와 다원주의를 채택한, 오늘날 조지아의 전신인 나라였다.2. 역사
2.1. 러시아 혁명과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 시기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된 후, 대부분의 권력은 남캅카스 위원회에 의해 장악되었다.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은 볼셰비키 러시아의 지원 하에 임시정부를 조직한 조지아 사회민주당에 의해 확고히 통제되었다. 동년 11월 14일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정치인들은 캅카스 위원회라고 알려진 통일된 지역 위원회를 만들도록 강요했고, 후에 입법부인 세임도 만들었다. 이후 1918년 4월 22일,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을 건국했다.19세기 후반의 다른 지식인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많은 조지아인들은 조지아의 독립을 주장했다. 그리고 조지아 정교회의 자치권 회복과 트빌리시 국립 대학교 설립으로 문화적 민족주의가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조지아 멘셰비키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볼셰비키 혁명에 대항하는 일시적인 조치로 간주했고, 조지아의 독립에 대한 요구를 고려했다.
그러나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의 결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까운 지역이란 이유만으로 서로 이질적인 고만고만한 3개 공화국을 뭉쳐놨기 때문이다. 1918년 5월 26일 조지아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연방은 붕괴되었고, 이틀 후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도 독립을 선언했다.
2.2. 독일 제국의 지원, 영국의 주둔기
조지아의 독립은 독일 제국과 오스만 제국에 의해 즉시 인정받았다. 조지아는 독일 제국의 보호국이 되어야 했고, 바투미, 아르다한, 아르트빈, 아할치케, 아할칼라키 등을 오스만 정부에게 양도해야 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의 지원으로 조지아인들은 압하지야로부터 볼셰비키의 위협을 물리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배한 후, 영국군이 조지아 정부의 허락을 받아 도착했다. 영국인과 현지인 사이의 관계는 독일인들과의 관계보다 더 긴박했으며, 영국령 바투미는 1920년까지 조지아의 통제권 밖에 있었다. 1918년 12월에는 트빌리시에도 영국군이 배치되었다.조지아의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는 불안했다. 아르메니아, 안톤 데니킨의 남러시아 정부,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분쟁은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아르메니아는 역사적으로 아르메니아인이 절대다수지만 조지아계 국가가 통치한 조지아 남부 지방의 영유권을 주장하였으며 이후 아르메니아-조지아 전쟁에서 로리 지방을 잃었다. 영국의 군사 사절단은 이 지역의 모든 반볼셰비키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러한 분쟁을 중재하려고 시도했다. 영국군 사령관은 남러시아군이 신생국을 침공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데니킨에게 캅카스 산맥을 가로질러 침공하지 말라고 경고했고,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 모두에게 일시적으로 구호물자를 주었다. 영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남러시아군이 침공하겠다고 위협하자 1919년 6월 16일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상호 방위 동맹을 체결했다.
2.3. 소비에트 러시아의 위협과 전쟁
1919년 2월 14일 조지아는 81.5%의 득표율로 조지아 사회민주당이 승리하는 선거를 치렀다. 3월 21일부터 볼셰비키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지역 볼셰비키 세력과 압하스인, 오세트인 등 소수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큰 문제로 떠올랐다.그러나 사민당 정부는 최종적으로 토지 개혁 문제를 잘 처리했고, 볼셰비키가 세운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는 뚜렷이 대비되는 다당제 체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사법제도 및 지방자치 개혁을 실시했다. 이 개혁으로 압하지야는 자치권이 부여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오세트인을 중심으로 한 소수민족 문제는 계속 문제가 되었다.
1920년은 볼셰비키의 위협이 증가한 해였다. 남러시아군의 패배와 붉은 군대의 캅카스 진격으로 공화국의 정세는 극도로 긴장되었다. 그리고 동년 1월, 볼셰비키 지도부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에게 남러시아와 캅카스의 백군에 대항하는 동맹을 제안했다. 조지아 정부는 중립과 불간섭 정책을 언급하며 어떠한 군사 동맹 가입도 거부했지만, 러시아 SFSR에게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 양국간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을 제안했다. 지역 볼셰비키들은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조직하려는 시도를 여러번 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1920년 4월, 붉은 군대 제11군은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하여 점령했고, 조지아 볼셰비키 세르고 오르조니키제는 러시아 SFSR에 조지아로 진격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비록 레닌과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장관회의의 명시적인 동의는 없었지만, 지역 볼셰비키는 1920년 5월 3일 쿠데타의 예비로 트빌리시 군사학교를 점령하려고 시도했다. 조지아군 총사령관 기오르기 크비니타제 장군이 이 시도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그 결과로 조지아 정부는 동원령을 선포했고, 볼셰비키는 간자에서 일어난 아제르바이잔인의 반란에 관한 대응으로 조지아 영토에 침입하려고 시도했지만, 짧은 충돌 끝에 국경에서 크비니타제에게 격퇴당했다.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 모스크바에서 평화 회담이 재개되었다. 5월 7일 모스크바 평화 조약에 따라, 조지아의 독립은 볼셰비키 조직의 합법화와 조지아의 땅에 외국 군대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대가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동년 12월 16일 국제 연맹에서 조지아에 가입하는 것에 대한 투표가 열렸고, 결의안은 부결되었다.
2.4. 주변국들의 소비에트화, 쇠퇴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붉은 군대에 의해 소비에트화된 후, 조지아는 적대적인 소비에트 공화국들에 둘러싸였다. 게다가 영국은 이미 캅카스에서 철군했기 때문에 조지아는 완전히 고립되어 어떠한 외국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볼셰비키 러시아는 조지아 측의 평화조약 위반, 볼셰비키 재체포, 아르메니아로 가는 호송대 방해, 북캅카스의 반볼셰비키 반군 원조 등을 명분으로 삼아 조지아를 위협했다. 반대로 조지아도 볼셰비키 러시아 정부가 자국 여러 지역에서 반정부 폭동을 선동하고,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과 분쟁 중인 자가탈라(Zaqatala) 지역에서 국경 사건을 일으킨다고 비난했다.[1]2.5. 멸망
1921년 2월 25일 붉은 군대의 재침공으로 멸망했다. 민주 공화국 정부는 해외로 망명했고, 조지아는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편입된다.[1] 자가탈라는 결국 아제르바이잔의 영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