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02 18:51:36

제3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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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정부총통 선거
1954년 3월 21일 1960년 3월 21일 1966년 3월 21일
제2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 제3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 제4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
파일:1960년총통취임.jpg
3대 총통에 당선된 후 장제스와 천청

1. 개요2. 배경3. 전개
3.1. 개헌운동3.2. 정부총통 선거3.3. 자유중국 사건
4. 결과5. 참고문헌

1. 개요

1960년 3월 21일 거행된 대만 3대 정부총통 선거.

2. 배경

1958년 진먼 포격전 이후 그해 겨울부터 국민당 내부에는 개헌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중화민국 헌법 47조에 따르면 총통부총통은 한번만 연임할 수 있었는데 이미 한번 연임한 장제스가 총통에 다시 출마하는 것은 법리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헌법 29조에 따라 1958년 2월 20일에 국민대회가 소집되어 새로운 총통 후보를 지명해야만 했다. 당내 서열상으로는 부총통 천청이 총통 후보로 출마해야 했으나 장제스장징궈는 이를 당연히 바라지 않았다. 이에 따라 장제스는 CC단의 잔여세력과 친위세력을 동원하여 헌법 개정 운동을 벌여 자신의 3선을 가능하게 하고자 했다.

하지만 자유중국 사건 등을 일으켰던 중화민국 내부의 자유파 인사들은 장제스의 3선을 비판하며 후스천청이 3대 총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헌법 개정에 대해 극렬히 반대했다. 특히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70세가 넘은 사람은 공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한 발언을 인용하며 장제스가 스스로 물러날 것을 촉구하였다. 심지어 뇌진은 1959년 12월 17일, 후스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중앙연구원안 연회에서 마오쩌둥이 1959년에 국가주석에서 사퇴한 일을 인용하며 장제스도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3. 전개

3.1. 개헌운동

1959년 12월 23일, 장제스는 광복대륙설계연구위원회 회의를 소집, 국민당과 정부를 대표하여 선법을 수정할 의사가 없으며 헌법 수정에 대해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리고 헌법은 반공복국의 유력한 무기이므로 반드시 헌법을 존중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자유파 인사들은 크게 고무되었으며 미국 역시 장제스가 이제 총통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간주하고 천청이 그를 승계할 것이라 분석했다. 12월 24일, 후스는 광복대륙설계위원회에서 위원회 주임 천청을 크게 칭찬하였는데 이 역시 장제스가 사퇴한 후 천청이 승계할 것이라는 분석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헌법을 개정하지 않겠다고 했지 연임을 안하겠다는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장제스는 대법관회의를 통한 법해석, 혹은 임시규정을 통해 헌법의 제한 규정을 무력화함으로 연임을 할 계획이었다. 이에 개헌파는 <국민대회대표연의회>를 조직하여 임시규정을 수정하거나 개헌하여 장제스를 연임시켜야 한다는 전단을 배포하였고 호헌파는 <반공은 반드시 호헌>, <자유중국은 워싱턴을 필요로 한다>는 글과 후스를 칭찬하는 글을 모은 세권의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함으로 맞섰다.

3.2. 정부총통 선거

개헌파와 호헌파의 싸움이 고조되자 장제스는 슬슬 연임 의사를 비추며 임시 규정을 고쳐 연임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에 호헌파와 개헌파는 임시 규정의 개정이 개헌이냐 아니냐의 해석을 두고 싸우게 되었다. 1960년 2월 17일 중국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수정하여 국가의 영도 중심을 공고히 하자는 안건>을 통과시켰고 2월 20일, 1기 3차 국민대회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3월 11일, 임시조관의 규정을 근거로 동원감란시기 총통과 부총통은 연임할 수 있으며 그 기간 동안 헌법 47조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을 결의하였다. 장제스는 이 결의에 대해 한번 예의상 사양하였으나 국민당은 국가의 안위와 반공수복의 대업을 실현시키기 위해 장제스가 연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장제스의 출마를 호소하였고 장제스는 이를 못이기는 척 수락하였다.

3월 12일, 중국 국민당 8기 중앙위원회는 임시 전체대표대회를 소집하여 장제스와 천청을 각각 총통과 부총통 후보로 지명하였다. 이에 중국 청년당중국 민주사회당은 분노하여 더 이상 국민당의 들러리가 되지 않겠다는 이유로 총통과 부총통 후보 지명을 거부했다. 이에 3월 21일, 국민당만 후보를 출마시킨 상태에서 정부총통 선거가 실시되었다. 1509명의 대표가 출석한 가운데 장제스는 1481표를 획득하여 3대 총통에 당선되었으며 3월 22일, 천청은 1505명이 출석한 가운데 1381표를 얻어 3대 부총통에 당선되었다.

3월 25일, 장제스는 국민대회 페막식에서 차기 6년의 임기 안에 반공대업을 완수할 것이며 삼민주의 신중국을 건립하겠다고 공약하였다. 그리고 대륙동포의 합법적 권익을 보장하며 대륙의 풍족한 경제생활을보장한다고 발표했다. 1960년 5월 20일, 장제스와 천청은 총통과 부총통에 취임하였다.

3.3. 자유중국 사건

결국 뇌진을 비롯한 자유파들은 격분하여 장제스의 3선을 대해 격렬히 반대하였다. 자유중국지는 조덕선, 부정, 양금호, 뇌진, 좌순생 등 자유파 인사들의 비판 기고문을 잇달아 게재하였고 장제스는 이를 매우 못마땅해했으나 한동안은 묵인했는데 뇌진이 아예 국민당 내부에서 신당을 창당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자유중국 사건을 일으켜 뇌진을 체포하였다.

4. 결과

1960년 9월,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 8기 3중전회를 소집, <반공건국요강>과 <반공애국인사단결합작촉진결의>를 통과시켜 민주가 승리하며 자유가 노예를 이길 것이라고 발표, 10월 2일에 3중전회를 폐막하며 스스로 믿음을 높이고 서로 믿으며 당덕을 발전시키고 당의 기강을 바로잡아 함께 살고 죽으며 어려움을 함께 하자고 호소하며 반공구국의 시기가 곧 올 것이니 준비하라고 연설하였다.

1962년 11월 12일부터 15일까지 8기 5중전회가 소집, 복국건국의 방향과 실천이 보고되었으며 대륙광복이 추진되었으나 결국 실행되지는 않았다.

5. 참고문헌

  • 신승하, 中國當代 40年史 : 1949 - 1989(서울: 고려원, 1993)
  • 장성구, 대만현대정치사 상(서울: 지영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