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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대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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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서부전선
3.1. 에니그마를 해독하지 못했다면?3.2.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군이 승리했다면?3.3.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실패했다면?3.4. 독일이 아르덴 대공세를 성공했다면?
4. 동부전선(독소전쟁)5. 아시아-태평양 전선(중일전쟁,태평양 전쟁)6. 기타
6.1. 2차 세계대전 불발(不發)6.2. 미국무기대여법이 없었다면?6.3. 독일 혹은 독일 국방군이나 무장친위대인종차별과 그에 기반한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6.4. 히틀러가 군사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뗐더라면?6.5. 뮌헨 협정이 결렬되었다면?6.6.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성공했다면?6.7. 독일이 연합국보다 먼저 핵을 개발했다면?6.8. 독일이 항복한 직후 영미연합에 합류하여 소련과 충돌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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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파생되는 여러 대체역사 시나리오들을 논하는 문서.

2. 특징

제2차 세계 대전 자체가 사악한 악의 축이라 할 수 있을 나치 독일, 일본 제국추축국과 대결한 연합국, 2차대전 중에 세계의 역사를 바꾼 천하삼분지계합종연횡을 방불케 하는 극적인 전세와 국제적 정세변화, 크고 아름다운 군사 작전들, 홀로코스트 등 전례없는 대량학살들이 대거 등장했고, 이로 인해 결정된 국제 정세가 현재까지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가지는 영향력까지 포함해서 역사학자나 역사 밀리터리 매니아, 팬덤들 사이에서도 진지하게 의논되는 경우가 많은, 언제나 식지 않는 주제이다.[1]

전쟁 자체가 단순한 숫자놀음으로 끝나지만은 않기 때문에 전쟁 시작 시점에서 한 쪽이 일방적으로 불리하다고 해도 불리한 측이 무조건 패배하기만 하는건 아니며 경우에 따라 반대로 대역전승을 거두는 사례도 많다. 당장 2차 세계 대전 자체가 폴란드 침공때 영프가 독일의 태도에 겁먹고 버로우타지만 않았어도 2차 세계대전이 유럽내를 벗어나 세계적인 파급력을 가져오진 않았을 것이라는 말도 나올 정도였다.[2]

반대로 항상 독일이 소련에게 승리한다는 것이 아닌 이미 독일이 밀리기 시작한 후에서의 국제 정세에 관한 시나리오들도 빼놓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독일이 방어전으로 나왔다든가, 티토를 암살했다든가, 반대로 소련이 선공을 가했더라든지 하는 것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경우들도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라서 학자들 사이에서도 꽤나 진지하게 토의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3. 서부전선

3.1. 에니그마를 해독하지 못했다면?

연합군이 만약 독일의 암호였던 에니그마를 해독하지 못했었다면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성공을 거둠으로써 결국엔 미, 영, 소 삼국을 협상 테이블에 앉게 하는 결말을 불려왔을 수도 있다. 단순한 상상력만이 아닌 게, 영국으로 향하는 보급선을 죄다 격침함으로써 섬나라인 영국은 엄청난 물자난에 시달렸을 것이고 결국엔 독일과 강화했을 수 있다. 이 시나리오로 간다면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에게 연료 및 필요 물자들을 보급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이집트에 진입해 카이로와 이라크 바그다드를 거쳐 히틀러가 추축국에 동조시키려 안달이었던 친독성향의 중립국인 튀르키예, 에스파냐를 가입, 동부전선에서도 연합군의 에니그마 해독불가로 소련 측에 정보공유 불가로 인해 바르바로사 작전의 기존 목표를 진행해 캅카스의 바쿠유전, 스탈린그라드까지 가게 됨으로써 소련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 가능하며 비록 유보트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이란이나 태평양 루트로의 렌드리스를 받을 수는 있겠으나, 장거리로 인해 보급이 늦어지는 약점이 생기며 영국이 결국 독일과 강화하여 전쟁에서 발을 뺀다면, 원래대로 미국, 영국과 상대했을 나머지 서부전선의 독일군 전력들이 죄다 동부전선에 투입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고 그만큼 소련의 부담도 가중되었을 것이다. 렌드리스야 어차피 독일 해군이 현실적으로 건드리기 어려운 루트로 운영되기도 하였으니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불리한 것은 확실하며 소련과 독일의 단독 싸움에서 독일이 소련을 압도하기는 힘들었겠지만 굉장히 유리한 상황에서 협상을 맺을 정도가 되었을 수 있다.

3.2.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군이 승리했다면?

서부전선의 결정적 전환점 중 하나,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군이 승리했다면 곧바로 바다사자 작전이 시행되었을 것이며, 일단,독일 공군이 상륙작전에 방해가 되는 방해물들 그중에서도 제1순위 목표인 영국 공군과 영국 해군을 무력화 되었을 것이며, 해군은 각종 구축함, 순양함, 전함 등등으로 영국 함대를 파괴시켰을 것이다.

특히 그라프 체펠린급 항공모함이 1940년 하반기에 완성되어 배치되었다면, 이야기가 크게 달라지는데, 함재기인 Bf109T와 Ju87의 성능에 힘입어 영국 해군에게 상당히 위협을 가했을 것이며, 이 시점에서 영국 항공모함들의 전투기는 페어리 풀머 같은 괴작이거나 아예 없이 뇌격기만 배치된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공군의 작전범위 바깥에서 대응할 수단이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영국 항공모함들의 작전에 제약을 걸어 본토에서 출격하는 독일군 폭격기, 전투기들이 영국 공군을 쉽게 제압했을 것이며, 많은 수의 항공기들을 손실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다.

3.3.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실패했다면?

우선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전 상황을 알아야한다. 소련이 벨라루스~폴란드 전선까지 피를 뿌리며 전진했지만 독일이 재정비를 하고 방어를 하자 도저히 밀 각이 안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스탈린은 영국 미국한테 이제 그만 몸 눕히고 나올 때 되지 않았냐고 여러번 말을 한다.

이 상황에서 연합원정군 최고사령부는 당연히 만전에 만전을 기하고 유타-오마하-골드-주노-소드 해안에 약 100km의 해변에 상륙작전을 펼치는 계획을 입안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aval_Bombardments_on_D-Day.png

연합국의 대부분을 때려박은 상륙작전으로 이 상륙작전이 실패 또는 상륙은 성공했지만 대부분의 군인들이 전사 or 부상자들이 된 전략적 실패 상황이라면 참담해진다. 자세한 배치 병력과 연합국 병력을 보려면 노르망디 상륙작전 문서로 가자.

이 작전이 실패하려면 여러 전제가 필요한데.
1. 연합군 머리가 단체로 이상해졌거나.
2. 독일이 연합국의 암호를 해독하고 노르망디가 상륙지점인 것을 알아내 우주방어를 했거나

1번은 우선 가능성이 굉장히 희박하다. 1944년 중반이면 루프트바페는 곧 죽는 노약자나 다름이 없어서 미국-영국은 나치 독일 영공을 자기 집 안방마냥 드나들며 폭격을 하고 항공정찰을 했다. 노르망디가 상륙지점임을 숨기기위해서 많이 찍지는 않았겠지만 노르망디가 대충 어느 상황인지는 훤히 아는 상태였다. 이 상황에 연합국 명장 아이젠하워던가 몽고메리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노르망디에 이상한 상륙을 꼴아박을 확률은 없다.

2번은 훨씬 더 희박하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단단히 화난 히틀러가 아프베어의 수장 빌헬름 카나리스의 모가지를 짜르고 사실상 정보기관이 있으나 마나가 됐다. 그 이전에도 영국 첩보부는 그냥 독일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는 수준이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인데 대장급 되는 인물이 나치 독일 괴뢰국인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에서 죽는데 그 사전 징후를 독일 내에서 아무도 몰랐다. 이런 상황인데 나치 독일이 연합국 암호를 해독해 상륙작전의 지점과 일시를 알아낸다?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리고 설령 알아냈다 하더라도 노르망디 작전 수립부터 실행일까지의 시간은 고작 한 달이었다. 이 시간 동안 저 길다란 라인에다가 우주방어용 진지를 깔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나마 가능한 방법을 꼽으라면 근처에 있는 군 부대를 모조리 이 지역으로 이동시켜서 독일군도 수십만 정도의 병력을 대기시키는 것 정도인데, 만약 독일군이 이런 짓을 했다면 연합군의 정찰기가 이런 움직임을 탐지 못할 리가 없으니, 그냥 작전을 취소하고 다른 지역을 물색해버리면 그만인 일이다.

막 울펜슈타인 시리즈 마냥 초월적인 기술력은 아니어도 독일의 서부집단군 사령관 롬멜이 재빠르게 상황을 판단해 노르망디의 연합군들에게 후퇴던가 피 흘릴 것을 가정한다면 상륙작전 시작 전 교란과 게릴라 목적으로 투하된 미-영-캐나다 군 공수부대 약 2만명은 당연히 전멸하고 칼레를 지키던 수비군이 당장 노르망디로 뛰어올 것이며 근처에 놀고 있던, 파리 주둔군이나 프랑스 북부-벨기에 상륙방어군까지 끌고와 피해를 강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짜 만에 하나의 일이 일어나 독일군이 정말 잘싸우던가, 연합군이 아주 못싸우던가 해서 연합군 156,000명이 전멸을 했어도 나치 독일의 패망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한참 물오른 소련이 동유럽에서 열심히 밀고 들어오고 있으니 미국,영국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또 다른 곳에 상륙을 해 프랑스와 베네룩스3국은 공산화를 막아야 했을 것이다.

결과론 적으로 나치 독일의 패망은 최대 1946년까지는 미뤄졌겠지만 패망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3.4. 독일이 아르덴 대공세를 성공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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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부전선(독소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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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시아-태평양 전선(중일전쟁,태평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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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타

6.1. 2차 세계대전 불발(不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은 시나리오를 다룬다.

의외로 전쟁을 막을 기회는 차고 넘치게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독일의 경우 히틀러만 없었어도 원 역사만큼 거대한 무언가를 터트릴 가능성이 0에 가깝게 떨어진다. 신흥 식민제국과 기성 강대국의 싸움인지라 발발 이유가 비교적 간단하게 설명되는 태평양 전쟁도 따지고 보면 일본군부 폭주의 시발점이 된 만주 사변점을 쳐서(...) 결정되었을 정도로 충동적인 사건이었다. 심지어 중일전쟁 발발 직후의 파나이 호 사건 때까지만 해도 일본 제국미국과 싸울 생각이 별로 없었다.

유럽은 전쟁이 발발하지 않더라도 1차 세계대전의 앙금이 아직 남은 탓에 냉전에 준하는 긴장감이 족히 수십년 이상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치 독일이 집권하지 않았다 쳐도 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서 잃은 영토를 다시 확보하고 싶은 야심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동유럽을 두고 소련 등과 충돌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제국프랑스 침공이 없었으니 현실적으로 동남아시아 를 칠 수가 없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등 전 세계의 열강들과 한번에 싸울 생각이 아닌 이상 중일전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전 세계와 척을 진 상태이고 미국이 순순히 다시 기름을 팔아줄 생각도 아니었기 때문에 한동안은 굉장히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동남아시아를 못 먹으니 시베리아를 치자는 심정으로 소련과 충돌하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시점부터 이미 상당히 맛이 간 상태였기 때문에 21세기가 오기 전 마치 소련처럼 제국이 해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시아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은 훨씬 오랫동안 식민 지배 상태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유럽 국가들은 독일과 한바탕 붙은 탓에 국력을 완전히 소진했고, 아시아의 식민지들도 일본 제국이 거하게 때려부숴놓은 탓에 더 이상 경영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에 다다랐다. 게다가 세계 최강국으로 떠오른 미국이 (3차 세계대전은 피하고 싶으니) 식민주의 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표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열강들은 어쩔 수 없이 10~20년 내로 대부분의 식민지들을 독립시켰다. 그러나 이정도 규모의 전쟁이 없었다면 당연히 유럽의 열강들이 국력을 그 정도로 소진할 이유도 없고, 미국이 반식민주의 노선을 밀어붙일 명분도 딱히 없게 된다. 그러므로 식민주의의 종식까지는 시간이 훨씬 더 걸리게 된다.

6.2. 미국무기대여법이 없었다면?

소련 학자들과 군인들도 인정한 부분인데 미국의 무기대여법에 따른 무지막지한 원조가 없었더라면 소련은 도저히 독일을 몰아낼 방법이 없었다.[3][4] 1963년에 한 대화에서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는 원조가 없었다면 소련이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했다. 도청된 그 대화 내용은 30년이 지난 다음에야 해제되었다.[5] 이렇듯 무기대여법은 많은 역할을 하였다.[6] 일단 산업 시설들이 시베리아로 이동되었기에 각종 무기류만이라면 소련도 충분히 생산이 가능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곡창 지대는 이미 상실한 상황이었기에 이대로는 군인 민간인 너나할 거 없이 사이좋게 굶어죽어가다 평화협정을 맺을 지경이었고, 소련 자체의 능력으로는 무기를 만들더라도 전선까지 보급할 수송력도 없었다. 미국이 운송수단과 식량을 우선적으로 보내준 것도 이 때문이다. 소련이 민간부문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고, 군수물자 생산에만 집중하여 엄청난 물량을 뽑아낸 것은 무기대여법 덕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특히 500,000대가 넘는 차량은 독일 본토로 진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물론 1944년 하반기 이전까지 유럽 대부분의 공업지대를 차지하고 헝가리, 루마니아, 등 동맹국의 지원과 스웨덴, 스페인 등 우호적인 중립국의 지하자원을 수입하는 등 총력전을 하는데 소련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전쟁패배로 이어진 독일보다 더욱 돋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여간 미국 정치권의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 소련에 대해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면 실제 역사에서처럼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까지 도착한 뒤 뻘짓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소련은 현상유지면 모를까 독일군을 몰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양상이 전개된 것이 이란-이라크 전쟁이었다. 이란이 이라크보다 훨씬 막강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미국과 서방의 무기 금수제재와 혁명으로 인한 이란군의 전반적 전투력 약화가 겹쳐서 이란군의 공세 능력은 전쟁 후반기에 극도로 약화되었다. 거기다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란군의 주요 장비들의 가동률도 악화 일색이었고 혁명수비대를 비롯한 이란군 병사들은 보급품 부족으로 그저 소총만 든 채 맨몸으로 돌진해야 했다. 심지어 소년병까지 총알받이로 동원되었다. 그렇기에 끝내 서방과 아랍 국가의 지원으로 가동되는 강력한 기계화부대로 무장한 이라크군을 밀어내지 못하고 막대한 희생자만 배출한 채 티그리스 강 장악은 커녕 전쟁 이전 영토만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6.3. 독일 혹은 독일 국방군이나 무장친위대인종차별과 그에 기반한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독일로서는 매우 희망적인 가정이지만,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었던 경우. 만일 나치 독일이 인종차별과 학살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자제하고 소련 치하의 민족들의 국가 설립을 막지 않았다면 600만여 명에 달하는 유대인과, 집시, 슬라브인들은 독일군에 징병되는 건 물론, 핵 개발의 주요 인물들의 미국 망명이 없었거나, 조국에 다시 귀국하면서 미국의 맨해튼 계획이 시작도 안 되거나 매우 늦춰지는 결과가 있었을 수 있다. 또한 전쟁 초반에 독일군을 해방자로서 반긴 점령지의 수많은 슬라브족 인구가 독일군에게 적극 협조하고, 병력이 되어 소련군과 싸우면서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이랬을 경우 독일군의 병력은 소련군과 동등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성립 이념을 생각해보면 이런 인종차별과 전쟁범죄가 없을 수가 없었다. 만일 나치 지도부가 개전 이후 타민족의 협력을 얻기 위해 인종차별 정책을 철폐했다면 인종주의에 기반한 나치 이념과 충돌을 일으켜 모순을 이뤘을 것이다.

6.4. 히틀러가 군사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뗐더라면?

현실성은 있으나 나치 독일에게 부정적이면 부정적이었지 긍정적일 수는 없는 시나리오이다. 히틀러가 군사적으로 벌인 실책은 많았지만 그가 나치 독일의 군사적 역량에 끼친 긍정적 영향은 훨씬 더 컸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 당시 만슈타인이 제안했던 낫질 작전의 진가를 알아보고 채택한 장본인이 히틀러이며, 다수의 장성이 반대하는데도 키예프 공격을 강행하여 중부집단군의 생명, 나아가 나치 독일의 생명을 수년 이상 연장시킨 것도 히틀러였고[7] 나아가 서방군의 유럽 본토 상륙작전 당시 모든 장성이 칼레를 1순위로 지목할 때 노르망디를 의심한 유일한 장성 이상급 인물 역시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결코 문민통제를 자신들의 자유도에 대한 침해로 여기는 좌충우돌의 지휘관들이 주장했던 것과 같은 무능하면서도 명령하기만 좋아하는 전쟁놀이 마니아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그는 (적어도 노이로제와 약물로 인해 글자 그대로의 정신병자가 되기 전인 1943년 중반까지는) 나치 독일의 최고 권력자이자 전쟁의 총책임자로서 당시 그가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리고 그가 내린 판단은 다른 장성들이 내린 것보다 나으면 나았지 나쁘지 않았다. 히틀러는 엄연히 부사관 경력이 있고 실전 경험이 있는 군인이고 군사학을 공부한 인물이었으며, 나치 독일 최고의 참모진을 거느리고 있었고 모든 정보는 그에게 집중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다른 사령관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 나치 독일 내부의 경제와 사회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그가 내리는 결정은 그런 것이 없거나 부족한 현장 지휘관이나 전선사령관이 내리는 그것보다 훨씬 더 전략적이었고 더 큰 판을 두는 결정이었으며, (누차 강조하지만 1943년 이전의) 히틀러가 내린 대부분의 "군사적으로 옳지 못한 똥별 같은 결정"은 나치 독일 내부의 경제, 사회 사정을 본다면 "정신머리 똑바로 박힌 인간이라면 내릴 수밖에 없는 결정"에 가깝다.

물론 1943년 이후의 히틀러는 "퇴각 금지 명령"이나 "제트전투기를 폭격기로 개조 명령" 등 분명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도저히 이해가 안 될 지경의 어리석은 수를 수없이 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해본다면, 과연 1943년까지 와서 히틀러 하나 빠진다고 나치가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나치가 과연 그 상황에서 전략적으로 퇴각했다면 소련군을 다시 격퇴할 수 있거나, 방어선을 강화할 수 있었을까? 제트전투기를 이용하여 제공권을 다시 장악할 수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절대 아니다. 전략적 관점에서 나치 독일은 모스크바에 도달하기 전에 공세종말점이 와버린 바로 그 순간에 이미 패망한 것이다. 나치 독일이라는 국가가 낼 수 있는 퍼텐셜을 다 소비했고[8] 이제 더 이상의 전쟁은 불가능하고 점령지를 운영하며 내정으로 버티기만 가능한 상황이 된 것인데, 여전히 소련은 그 군세와 전력이 건재했고 자원이 풍부했으며 미국이라는 든든한 동맹이 있었으므로 이 시점에 나치 독일의 운명은 결정지어졌다. 따라서 1943년 이후에는 히틀러가 군사 문제에서 손을 뗀다 한들, 물론 아주 소소한 전술적 이점을 가질 가능성은 있겠으나 그것이 나치 독일의 최후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6.5. 뮌헨 협정이 결렬되었다면?

세계대전과 이에 따른 독소전쟁을 피할수없었다고 가정하면 나치 독일입장에선 셋째로 희망적인 IF다. 회담이 결렬되고 독일의 선공으로 전쟁이 일어났다면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진격하더라도 마른 강 유역에서 막히고[9] 나아가 루마니아를 통과하여 체코로 진입한 소련군[10]이 전쟁의 진행을 완전히 바꿔 놓았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소련군은 스탈린의 숙청으로 제 상태가 아니었고 폴란드가 있었으므로 히틀러가 소련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이후로의 진행 과정을 보면 1차 대전 재탕(?)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히틀러에게는 이대로 마른 강에서와 폴란드-루마니아-북우크라이나로 이어지는 동부전선에서 모스크바로 진격해 소련과 독소전쟁을 계속하다가 밀려나서 베를린 공방전이나 치루고 패망하든지 아니면 점령지를 죄다 토해내는 것으로 유럽 각국과 강화를 하든지 이렇게 2가지 선택만이 남았을 것이다. 그래도 현실과 비교하면 소련을 제외하면 독일을 포함한 전 유럽인들과 독일 군부에게도 그리고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 그 자신에게도 해피 엔딩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였다면 독일은 그냥 제1차 세계 대전이 규모가 살짝 커진것에 불과할 뿐(?)이고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초대형 전쟁도, 홀로코스트도 폭주하지 않은채 히틀러와 나치당도 독일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권좌에서 쫓겨나 기껏해야 추방, 망명 내지는 감옥에 가는 정도로 제거됨과 동시에 나치 독일독일 제국 MK-2급 독일 제2 제국으로 재탄생했을 테고, 히틀러는 흔한(?) 독재자 정도로 평가받고 있을 것이다.

6.6.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성공했다면?

쿠데타가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히틀러를 암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 암살을 성공했다면 쿠데타가 실패하더라도 히틀러가 이리저리 꼬아놓아 막장이 된 독일군 지휘체계만큼은 일시적으로 마비되면 이 틈을 타서 히틀러가 그렇게 꺼리던 협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히틀러 암살에 성공했더라도 쿠데타가 성공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발키리 작전이 실행될 때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인 그로스도이칠란트(Großdeutschland), 즉 대독일사단 소속 수도경비대대의 특성에 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군사반란 발발시 즉시 진압에 투입할 정예 수도 방위 부대를 모체로 한 베를린 경비연대를 기반으로 창설된 정예 부대였다. 진압 부대가 역으로 반란 모의에 적극 동참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게다가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육군 최정예 부대로 주력 부대는 막대한 전과를 올리면서 동부전선 곳곳에서 맹활약 중이었고 쿠데타 측이 동원할 수 있었던 베를린 내 주둔군은 고작 4개 중대 뿐이었다. 그렇다면 부대를 직접 통솔하게 될, 그 4개 중대 내의 중간급 간부들을 포섭해야 했는데 그 많은 수의 간부들을 포섭하는 것은 쿠데타 사전 발각의 위험이 너무 컸다.

결국 쿠데타 측은 SS가 히틀러를 암살하고 군사반란을 시작했다는 거짓 정보를 발표하고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간부급 장교들을 쿠데타에 포섭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발키리 작전을 따라 부대를 통솔해 작전을 계시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히틀러의 생존과 SS의 연락이 닿으면서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이것이 쿠데타였음을 인지하고 이 작전은 실패하게 된다.

또한, 알베르트 슈페어의 자서전에 따르면[11] 나치당내의 주요인사들을 체포하거나, 정보교환을 차단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살해하는 등 이러한 행동으로 쿠데타 성공 확률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동들은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쿠데타 당시 괴벨스는 슈페어와 같이 있었고, 이들의 무장은 그들이 각자 소유하던 권총뿐이었다. 1개 소대도 아니고 1개 분대만이라도 이들을 해하려 시도했다면 이들은 결코 무사할 수 없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방송국을 점령해서 독일 전역에 유언비어를 퍼트려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 수 있었으나, 이들은 위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쿠데타 계획을 세웠으면서도 자신들의 집권 방법은 도덕적이어야 하고 나치에 대한 단죄는 합법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신념 아래 나치 고관을 암살하지 않고 그냥 체포해서 후에 법정에 세운다는 아마추어적인 생각 때문에 이렇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쿠데타 계획을 세운 군인들이 전쟁을 잘 알 뿐 정치적인 공작에는 서툴렀고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특성을 고려해서 반히틀러 쿠데타라는 점을 숨긴 채로 일을 진행하려고 했다는 쪽이 사실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이 계획에서 군부를 대표한 루트비히 베크에 대해서 구데리안은 자기 회고록에서 쿠데타에 가담하라고 권유가 있었으나 주모자가 루트비히 베크인 것을 알고 그렇게 결단력 없는 인물이 성공할 리 없다고 생각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구데리안이 주모자가 베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담했을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쿠데타는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특성상 '완벽한 계획'을 만드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렵다. 실제로 역사상 성공한 쿠데타들도 계획 자체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진압을 해야 하는 정권 측의 실수가 겹치거나 뜻하지 않은 행운을 통해 성공한 사례가 많다. 무엇보다 쿠데타 계획이 허술했다 하더라도 쿠데타 측의 반히틀러 저항 정신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계획이 허술했건 아니건 이들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걸고 한 것이다.

당시 쿠데타 측의 계획은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 파울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힘러, 마르틴 보어만 등을 비롯한 나치당 수뇌부를 제거하고 독일 제국 시절과 같은 군주국을 세운 뒤 연합국과 강화하고 그들과 함께 소련에 맞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미 독일의 패망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연합군 수뇌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설령 그들이 히틀러 암살에 성공하고 주요 인사들을 제거한다 치더라도 힘러의 경우 테러가 일어났을 땐 저 혼자서 멀리 떨어진 채 SS 호위 병력의 경호를 받으면서 무장 열차 안에 있었고 힘러가 쿠데타 진압을 명령한 뒤 자신이 독일의 총통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12] 파울 하우서요제프 디트리히 등 SS 소속 장성들은 힘러를 싫어하며 오로지 히틀러에게 충성하였으나 이들도 쿠데타 측을 그냥 보고 있었을 리도 만무하다. 결국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지적한 데로 쿠데타 측과 SS의 충돌로 내전이 벌어졌을 것이고 전선이 붕괴되어 연합국이 1944년 12월 크리스마스 전에 베를린에 입성하는 꼴로 끝났을 것이다. 진짜 많이 잘해서 쿠데타 측이 힘러까지도 제압하고 SS의 진압도 물리친 후 신정부를 세웠다고 쳐도 이미 독일 내부의 혼란으로 전선의 붕괴는 더 빠르게 이루어졌을 테고 신정부가 협상을 시도할 즈음엔 연합군은 이미 지크프리트동프로이센까지 밀려오고 있었을 것이고 강화는 결렬, 신정부 측은 좋든 싫든 계속 전쟁을 해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전선 붕괴 없이 방어전에 어찌어찌 성공하고 점령지 대부분에서 철수한다는 조건으로 처칠, 루스벨트와 강화했다고 치더라도 독일 혼자만의 여력으로 소련군을 막기는 힘들 것이 확실. 게다가 병사들의 사기도 쭉쭉 내려가고 국민들의 신뢰도 내려간 마당에 소련군에 쳐발리는 독일 군부표 신정부에 불만을 품은 세력에 의해 제2, 제3의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도 없다. 이 점은 안네의 일기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즉, 쿠데타 측이 암살과 신정부 수립에 성공했어도 독일의 패망은 정부만 바뀌었을 뿐 이루어졌을 일이고 더욱이 이들은 총통을 죽이고 나라를 망하게 한 매국노들로 후대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렇게 되면 철저한 탈나치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다시 한 번 배후중상설이 돌며 독일 내의 전체주의, 군국주의화를 다시 불러왔을것이며, 제3제국으로의 회귀하거나, 나치 독일 그 이상으로 맛이 간 제4제국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설령 민주화가 됐더라도 현재 일본마냥 과거사 문제로 폴란드와 체코, 네덜란드 등 이웃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가 매우 시끄럽게 지내고 있을 것이다.

6.7. 독일이 연합국보다 먼저 핵을 개발했다면?

이쪽은 가능성이 낮다. 대전 말기 원자로 가동도 하지 못한 상태를 감안하였을 때,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은 힘들었을 듯.[13] 핵이 개발되어도 독일은 핵 공격을 할 만할 초대형 전략 폭격기의 생산이 어려웠다. 핵 투발용 특수 전략 폭격기의 생산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 핵폭탄을 제작한 주요 인물들 중 일부는 추축국 출신이다. 그들은 망명할 계획 없이 잘 살다가 나치가 집권하고 인종차별을 시작하면서 망명했다. 거기에 입국을 거부하고 입국했으면 사형선고를 때릴 정도로 무차별적인 인종청소가 만연했다. 1945년에는 이미 루프트바페보텐플라테 작전 등의 삽질을 통해 갈가리 찢겨 핵 폭격기 호위기도 부족한 상황이고. 이 한 방에 모든 것을 걸어 보았자 광활한 시베리아를 전부 점령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나마 V2 개량이라는 묘수가 있긴 했으나 핵무기가 올라갈 플랫폼 수준으로 개량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핵 공격은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독일은 핵무기 대신 생화학 무기를 V2에 탑재해서 미국으로 날리는 게 더 빠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만약 독일이 핵을 1940년이나 1941년에 개발하였더라면 동시에 로켓 개발이 빠르게 이루어져 V2, V3 개발을 완료했다면 런던레닌그라드, 모스크바는 지도에서 증발하고 핵으로 초토화된 유럽은 제3제국으로 통합되었을 것이다. 전쟁 중후반에 미국과 독일이 비슷한 시기에 핵개발을 했다면 끔찍한 상황이 될텐데 당시에는 매우 강력한 폭탄 정도로 알고있기에 어느 누구도 방사능 피폭 등 핵무기의 폐해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진행중인 전쟁에 거리낌없이 사용했을테니 핵무기가 만들어지는대로 죄다 적국 주요 도시와 전선에 뿌려버렸을 것이며 수많은 핵공격이 일어나는 진정한 의미의 핵전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6.8. 독일이 항복한 직후 영미연합에 합류하여 소련과 충돌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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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하나의 선택지만으로 전쟁의 국면이 송두리째 바뀌는 일은 별로 없었다. 군사적으로만 본다면 언뜻 하나의 선택으로 갈아엎어진 경우가 많았으나, 실제로 정치적, 행정적,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 시점에 그들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의 범위가 원래 그 선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경우가 많으며, 다르게 선택했다 하더라도 역사적인 요소들이 원래 벌어져야 했을 일을 일어나도록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다시 말해, 어떠한 요소로 인해 일본이 미국에게 빨리 항복하여 한국이 분단되지 않은 채 독립할 가능성은 있으나, 결국 언젠가는 소련의 개입으로 분단되거나 내전에 휘말렸으리라는 뜻이다.[2] 다만 현실적으로 따져볼 때 영프 쪽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긴 했다. 현대에 각국의 사료를 비교해봤을 때 군수물자로나 병력으로나 병장기의 질로나 폴란드 침공 시점에선 영프가 합친 게 독일측보다 우세하긴 했지만 작정하고 전쟁준비를 해놨던 독일에 비해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전쟁을 한다는 생각 자체를 안하고 있었다. 애초에 어딘가로 공세를 간다는 생각 자체를 빼놓고 있던지라 보급수단 정비는 물론이요 편제나 작계 같은 기본적인 구성도 안되어 있었다. 즉 이 때 영프가 말없이 버로우를 탔던건 독일을 과대평가한 면도 없잖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자기네들 체계가 잡혀있지도 않았던게 컸다. 전쟁에서 위험한 것 중 하나가 체계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벌이는 전쟁이라는걸 고려하면 영프는 이 시점(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자기들은 전쟁준비가 1도 안된 상태)에서는 그나마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3] 니키타 흐루쇼프는 자기 회고록에 이용한 녹음 인터뷰에서 서구가 소련의 전쟁 수행 노력에 원조한 보급 물자들의 중요성을 인정했지만, 다음과 같은 부분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간행되었다. "나는 스탈린이 주위 측근에게만 (무기대여법을) 인정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그는 우리 공업의 대부분을 잃었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독일과 1대 1로 대결했었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4] 흔히 말하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무기대여법 효과도 받지 않고 승리를 거뒀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독일군을 밀어낼 여력이 되지 못했다.[5]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268p[6]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냐는 식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 조차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군의 보급 능력이 예상보다 덜떨어진것으로 밝혀진 이후 랜드리스 빨로 이긴 거 아니냐는 의견으로 선회하고 있다. 그 원인 역시 우크라이나가 잘 싸워서 그런게 아닌, 우크라이나 역시 소련 처럼 서방권이 랜드리스를 전쟁 전 밀어넣어준 결과 방어에 성공하고, 이후 랜드리스를 본격적으로 미친듯이 밀어넣으면서 장기전으로 고착되었기 때문이다.[7] 상술한 "모스크바에 먼저 진공했더라면" 문단 참조. 이때의 히틀러가 내린 키예프 진격의 판단만으로도 그가 저지른 군사적 실책에 몽땅 면죄부를 줄 수 있을 정도의 탁월한 선택이었다.[8] 공세종말점은 어떤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 경제적, 행정적인 면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며, 여기서는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크다. 다시 말해, 나치 독일이라는 국가의 경제는 더 이상 전시경제의 운용이 불가능해졌다는 이야기이다. 전쟁특수를 통해 가릴 수 있는 국가경제의 적자량이 임계점을 돌파, 이제부터는 전쟁을 치르면 치를수록 제 살 깎아먹기에 진입하는 시점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더 국가의 역량을 쥐어짜다가 나치 독일보다 훨씬 더 처절하게 폭망한 케이스가 일본 제국이다. 독일 제국 역시 그 행정력을 통해 국가의 모든 자원과 인력을 빨아먹으면서 전쟁을 하다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되어버린 전 독일의 노동자들의 반란으로 망해버렸다.[9] 애초에 뮌헨 협정 당시 프랑스와 폴란드 국경에 배치된 독일군이 몇개 사단씩 밖에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프랑스와 폴란드가 빨리 참전하기만 했으면 여기까지 밀릴 일도 없었을 것이고 되려 독일이 국경 인근의 라인란트와 슐레지엔을 순식간에 잃었을 것이다. 다만 가짜 전쟁 당시에도 프랑스군이 전면적인 공세를 꺼렸던 것을 감안하면 서부 전선의 급격한 동진까지는 글쎄...[10] 다만 루마니아는 당시 소련군의 국경 통과를 거부하고 있었고, 소련도 일단은 프랑스가 참전해야 참전한다는 조건을 걸어놓았기에 그렇게 순조롭진 않았을 것이다.[11] 정확히는 괴벨스가 한 말을 자서전에 작성한 것이다.[12] 진압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외국으로 망명할 수 있는 조건까지 충분히 갖추어진 상태였다.[13] 애초에 대전 내내 물자부족에 머리를 싸매던 나치 독일의 역량으로는 핵은 이론적 완성은 몰라도 실제 개발 배치는 거의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보면 알겠지만 쇼미더머니를 갈기던 미국 기준으로도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바람에 미국 하원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만큼의 자금이 꿀꺽 사라진 거냐'며 당장 예산 장부를 공개하라고 강력히 요구하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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