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19:40:42

일론 머스크/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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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생애
1.1. 유년기1.2. 청소년기1.3. 북미로의 이민
1.3.1. 캐나다1.3.2. 미국
2. 창업 및 경영3. 둘러보기

1. 초기 생애

1.1. 유년기

197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프리토리아에서 엔지니어인 부친 에롤 머스크와 모델 겸 영양사인 모친 메이 머스크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으로 이민했던 백인 가정의 후손들 중 다수가 재산이 많았던 것도 있고, 아버지인 에롤이 남아공에서 최연소로 기술사 자격을 취득한 우수한 전기 기술자여서 어린 시절 머스크 일가는 상당히 부유했다고 한다. 에롤은 젊은 시절 에메랄드 광산 채굴권을 헐값에 구입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디펜던트지#에 의하면 에롤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당시 우리는 매우 부유했습니다. 돈이 너무 많아서 금고의 문을 닫을 수도 없었습니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애슐리 반스가 쓴 《일론 머스크:미래의 설계자》에 따르면 "어린 시절 머스크 일가의 집은 프리토리아에서 가장 큰 집 중 하나였고 에롤은 가족들과 자주 해외여행을 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2]

컴퓨터에 흥미를 가졌던 10살 때 코모도어 VIC-20 컴퓨터를 살 수 있었다.[3]

그러나 이러한 능력적인 부분과는 별개로 일론은 에롤과의 사이가 매우 나쁘다. 일론의 부모는 그가 10대일 때 이혼했는데, 어머니와 산지 2년만에 아버지와 같이 살겠다고 했던 것을 훗날 매우 후회했다. 평전의 인터뷰에서 그는 아버지에 대한 인터뷰를 아예 거부했다. 한 인터뷰에선 아예 "내 아버지는 악마이자 끔찍한 인간 말종이다. 당신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악행과 범죄를 다 저질러본 사람이다."고 말하면서 인터뷰 도중에 울기까지 했다. 이에 에롤이 "철 좀 들어라"고 다시 아들을 공격하는 등 부자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걸로 보인다.[4][5]

1.2. 청소년기

남아공에서의 학창 시절, 그는 몸이 허약한 데다 내성적이며 직설적인 성격, 독특한 성씨 때문에 학우들로부터 따돌림과 더불어 폭행까지 종종 당했다고 한다. 9학년 때는 계단에서 밀려 굴러떨어진 뒤 의식을 잃을 때까지 맞았다고 한다. 이때 코의 재건 수술을 했으며 후유증이 지금도 남아있어 호흡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 더불어 상술한 부모님의 이혼에다 같이 살던 부친과의 불화로 인하여 일론은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의문을 갖고 우울함을 겪은 후 하루종일 책을 읽으며 독서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공상에 자주 잠기는 성격이였으며 이런 성향 때문에 모친 메이 머스크에 의하면, 운동에 그다지 소질이 없었고 또래에게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일론 머스크는 프로그래밍에도 흥미를 가졌다. 1984년 만 12세 일때 코모도어 VIC-20와 IBM PC XT를 구입하고 BASIC을 독학해 Blastar[6]라는 이름의 슈팅 게임을 동생과 함께 만들고 이를 게임 잡지에 500달러(현재 가치로 1,200달러)에 판매했다. 우주선을 쏴대는 슈팅게임이다. 이로 인해 167줄의 소스코드가 <PC와 사무 기술>이라는 출판물에 실리며 1984년, 그의 이름이 대중 앞에 처음 공개된다.[7] 이후 같은 잡지사에 두 개의 게임 코드도 팔았다고 한다.

또한 엔지니어였던 부친이 기술을 전수해준 덕에 모형 로켓을 만드는 데도 취미가 있어 가솔린과 각종 화학 약품을 혼합하여 로켓 연료를 만들곤 그걸 자작 로켓에 넣어 발사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 외에도 모친은 그가 어린 시절에 했던 활동들이 너무 다양해서 하나를 콕 짚어 말하기가 힘들다고 언급했다. 이웃에 부활절 달걀 팔기, 오토바이, 공기총 놀이, 비디오 게임방 사업 등이 있다고 한다.

다만, 학교 시스템에 회의를 느꼈고 물리학, 수학, 컴퓨터과학 등 특정 과목만을 편애했기 때문에 전반적인 학업 성적이 우수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특히 종교와 언어 수업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1.3. 북미로의 이민

1.3.1. 캐나다

10대 초반부터 부친에게 미국으로 이민을 가자고 계속 졸랐으며 이후 청소년 시기를 거쳐 냉전이 끝난 90년대는 세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확신해서 미국에서 유학하고 정착하는 걸 목표로 삼는다. 그런데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징병제를 시행 중이었고, 남아공 국적자였던 머스크도 입영 대상자였다. 머스크는 아파르트헤이트 등 인종갈등이 만연한 남아공 사회에 경멸감을 느꼈기 때문에 국가를 위하여 군 복무를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8]

그가 17세가 됐을 때 부모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시민자이면, 자녀에게 캐나다 시민권을 줄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된 덕분에 미국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캐나다는 미국과 지리와 문화적으로 근접한 데다가 미국 영주권 혹은 시민권을 취득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9] 머스크는 입대를 미루고 캐나다 이민 성공을 위해서 실제로 학업은 게을리했지만, 서류상 강점을 갖기 위해 남아공에서 프리토리아 대학교를 다니며 1년간의 절차를 거쳐서 새로운 법에 따른 절차를 준비했고 캐나다 당국으로부터 입국을 허가받는다. 그러나 1989년 6월에 캐나다로 떠난 17세의 머스크는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된다. 머스크가 에롤과 멀어지고 난 후 어머니인 메이 쪽은 돈이 별로 없어서 타국으로 떠나는 머스크에게 돈을 대줄 수가 없었고 종조부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던 몬트리올의 집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알고보니 몬트리올의 친척들은 머스크가 오기도 전에 캐나다에서 미국 미네소타로 이민갔던 것이었다. 때문에 1년 가량 캐나다 전역을 방랑자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농장에서 밭일을 하고 제재소의 유독한 보일러 폐기물을 치우거나 전기톱으로 통나무를 자르는 등 인력시장의 궂은일을 하며 살았다.

일론이 1년동안 캐나다 전역을 도는 동안, 모친인 메이를 비롯하여 동생 둘도 캐나다 이민에 성공하면서 토론토에서 가족이 재회하게 된다.[10] 가족이 모인 덕분에 온타리오에 위치한 퀸스 대학교(캐나다)[11]에 진학한다. 대학 생활이 체질에 잘 맞아서, 이 때부터 사회성이 늘기 시작했다고 한다.[12] 한편으로는 무작정 노바스코샤뱅크에 전화를 걸어 점심식사 요청을 하였다가 임원인 피터 니콜슨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이를 통하여 여름 인턴쉽에도 참여하여 시급 14달러를 받아가며 전략기획팀에서 개발도상국 포트폴리오 검토 관련 업무를 맡은 적이 있다고 한다.[13][14]

1.3.2. 미국

미국 진출이라는 당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퀸스에서 학업에 충실했던 덕에, 1993년 여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스쿨로 편입하는 데 성공한다. 입학 후 모교 내에서 무면허로 주류를 밀매하는 클럽하우스 사업을 했다고 한다.[15] 이 와중에 1994년 여름, 실리콘밸리에 건너가서 낮에는 피더클 연구소에서 슈퍼축전기 연구를, 야간인턴으로는 로켓 사이언스라는 게임 제작사에서 잠깐 일하기도 했다. 이 회사가 만든 Loadstar와 Rocket Jockey 등의 게임 크레딧에 실제로 머스크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신생 업체이다 보니, 인턴임에도 임베디드와 드라이버 등 저수준 단의 핵심 기술 개발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비디오 게임 사업을 고려했지만, 인류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하기 위해서 대학에서는 경제학물리학을 공부하였다. 특히 졸업 직전인 1994년 12월에는 태양열 발전을 주제로 첫 번째 논문를 작성했으며 그 외에도 슈퍼축전기와 데이터베이스, 로켓 관련해서 연구하고 논문을 집필했다고 한다.[16]

결국 재미는 있었지만 그의 범지구적 공상에는 미치지 못했던 비디오 게임쪽 진로를 접고 본전공을 이어 고체물리학 슈퍼축전기 분야로 1995년 스탠퍼드 대학교 재료공학 박사과정에 합격한다. 하지만, 야후넷스케이프 등을 통해 발전해가는 포털과 웹 브라우저인터넷 산업의 풍부한 잠재성에 매료되어 창업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정하면서 실리콘밸리로 이주하여 입학도 채 하기 전에 합격 통지만 받고 휴학을 신청했는데, 이후 등록을 하지 않아 자동 제적되었다.[17][18]

그는 창업하기 전에 본인에게 얼마 정도가 필요한지 알아보기 위한 일종의 실험을 했다. 이른 바 ‘일론 머스크의 욕구 실험’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하루를 1달러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창업을 앞두고 혹시나 실패했을 때 뒤따를 가난을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1달러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일론은 대형마트에서 냉동 핫도그와 오렌지 30달러 어치를 사서 컴퓨터를 끼고 한 달 동안 매일 그것들만 먹고 생활을 했다. 돈이 없는 삶이 어떠한지를 직접 체험해 본 것이다. 한 달을 지내보니 살만했다고 한다.[19] `어떻게 되든 (망해도) 한 달에 30달러는 벌겠지'라고 생각한 그는,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이후 곧바로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2. 창업 및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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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스크의 외할아버지는 미국에서 태어난 캐나다인으로 척추 교정의였다. 할머니는 영국독일계 혈통이다.[2] 당시 남아공은 백인 사이에서도 빈부격차가 엄청 나 해외여행이라 해도 레소토, 에스와티니(당시에는 스와질란드)를 가는 정도 였다.[3] 다만 코모도어 VIC-20은 3년전 나온 8비트 컴퓨터인 애플 2나 TRS-80보다 훨씬 저렴한 299달러였고 이런 가격과 소매점 대규모 유통으로 85년 단종까지 약 250만대가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부잣집만 살수있던 대단히 비싼 물건은 아니다.[4] 동생인 킴벌의 말에 따르면 부친이 감정적인 억압과 폭언을 일삼아, 유복했던 외면과는 다르게 내면은 찢어 문드러져서 비참했다고 한다. 애초에 일론이 자기 부친에 대해 자세한 언급조차 거부한건 부친의 장남에 대한 억압과 폭언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일론이 지금까지도 입에 담기조차 싫어해서 그랬던 것이다.[5] 에롤은 자기 의붓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지기도 했는데 아이를 가질 당시 그의 나이는 72살이 넘었고 이 의붓딸의 친모인 전 부인과는 현재 이혼 상태이며, 친딸은 아니라곤 하나 기혼이었을 적에는 4살 때부터 자기가 키웠던 딸이었다. 또한 에롤은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자신의 집에 침입한 3명의 사람들을 총으로 살해한 뒤 정당방위를 선고받은 적도 있다.[6] 같은 해에 Blaster라는 게임이 다른 사람에게서 만들어지기도 해서 종종 헷갈리기도 한다. Blastar라고 검색해야 제대로 나오니 참고하자.[7] 8비트 컴퓨터 시절의 컴퓨터는 운영체제라고 할만한 개념이 없었고 베이식 언어 인터프리티를 내장한 ROM을 탑재한 장비나 다름없었다. 디스크 오퍼레이팅도 각종 사무프로그램도 이런 베이식 언어로 코딩한걸 실행하는게 일상이였고, 각종 컴퓨터 잡지들이나 컴퓨터 안에 든 사용 설명서에 이런 예제 코드들을 첨부하여 구독자를 끌어모았다.[8] 머스크는 중년이 된 최근에도 남아공의 군대에 입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양심적이고 좋은 선택이었다고 회상한다.[9] 캐나다 국적자에게는 미국에서 취업할 수 있는 TN 비자가 사실상 아무 조건 없이 나온다.[10] 메이가 캐나다 집을 알아보기 위해 잠시 떠난 사이에, 남아공에 남아있던 일론의 여동생 토스카가 몰래 집을 부동산에 내놓고 차량과 가구까지 전부 팔며 필사적으로 남아공을 탈출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11] 워털루 대학교와 고민하다가, 캠퍼스에 가보고 너드들만 있어서 예쁜 여학생이 많은 퀸스에 진학했다고 한다.[12] 첫 번째 아내인 저스틴 머스크가 이 시기 만난 같은 대학교 동기였다.[13] 훗날 창업할 페이팔의 아이디어가 여기서 착안된다. 미국이 개발도상국의 부채들 덜어주기 위해 만든 브래디 채권이 1달러 당 50센트를 지원해주는 반면, 실제 채권은 1달러 당 25센트라는 가격에 거래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채를 모으기만 하면, 큰 이득을 볼 수 있었지만 윗선에서 별 시덥지 않은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훗날 인터넷 금융 업체를 창업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14] 남미 부채를 이미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인턴의 말을 들어가며 헷징했던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성이 떨어지긴 한다.[15] 덕분에 돈을 그래도 꽤 번 것인지, 20년된 BMW 320i를 끌고 다녔다고 한다.[16] 2017년 샘 올트먼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학창 시절 로켓, 유전학, 인공지능, 인터넷 외에도 전기자동차를 비롯한 '지속 가능한 에너지'에 관심이 있었고,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수십년째 성능 향상이 더뎠던 리튬 이온 배터리를 대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슈퍼축전기를 통해 레이저 총과 미사일 등 무기 관련해서도 진지하게 가능성에 대해 고찰했다고 한다.[17] 담당교수는 재료과학과의 윌리엄 닉스.#[18] 2023년 7월 X.AI 관련 트위터 스페이스 대화 내용에 따르면, 물리학으로 진로를 정하면 충돌기 실험을 하려고 했는데 이는 규제 당국에 의해 언제든 막힐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급부상하던 인터넷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19] 정황상 생활비 전체가 아니라 식비만 1달러를 쓰기로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