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0 19:02:22

이구(서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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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李矩
(? ~ 325)

서진동진의 인물로 자는 세회(世迴). 유주 평양군(平陽郡)[1] 평양현(平陽縣) 출신으로, 영가의 난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장수이다.

2. 생애

어린 시절, 아이들이 서로 무리를 지어 놀 때 항상 나서서 무엇을 할 지 이끌었고 행동이 어른스러웠다고 한다. 이후 장성하자 평양현의 관리로 임용되었고, 얼마 뒤에 평양현령이 퇴직 보고를 위해 장안(長安)으로 향할 때 그를 호송했다. 이때 정서장군 양왕(梁王) 사마융은 이구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는 그를 발탁해 자신의 아문(牙門)으로 삼았다.

원강 9년(299년), 저족 제만년의 난 토벌에 공을 세운 것이 인정받아 동명정후(東明亭侯)에 봉해졌다. 이구는 평양군의 독호(督護)에 임명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평양태수 송주(宋胄)는 자신의 친척인 오기(吳畿)를 이구 대신 독호에 임명하고 싶어 했다. 이를 눈치챈 이구는 병을 핑계로 스스로 직위를 내려놓고 떠났다. 그럼에도 오기는 행여나 이구가 다시 돌아올 것이 두려워 자객을 보내 그를 암살하려 했다. 이구는 죽을 뻔했지만 다행히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영가 원년(307년), 흉노의 대선우 유원해의 무리가 평양군을 침략했다. 평양군 각 지역의 백성들은 난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으나, 이구가 거주하던 마을의 백성들은 평소 신망이 높았던 이구를 오주(塢主)로 추대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 자위대를 구성했다. 이구는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 형양(滎陽)에 주둔했다가 신정(新鄭)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이구는 천성이 용감하고 의연했으며 권략도 많아, 나라가 위태로운 이 시기에 공을 세울 뜻을 품었다. 동해왕 사마월이 이구를 여음태수에 임명하고 명을 내려 낙양의 천금알(千金堨)을 축조하도록 했다. 이구는 여남태수 원부(袁孚)와 함께 사마월의 명을 이행하여 조운이 이롭게 했다.

영가 5년(311년) 6월 11일, 전조의 시안왕 유요가 낙양을 함락하고 회제를 유폐시켰다. 사공 순번(荀籓)은 양성(陽城)으로 도망치고, 위장군 화회(華薈)는 성고(成皋)로 도망쳤다. 당시 대기근이 들어 도적 후도(侯都) 등은 매번 사람을 납치해 잡아먹었는데, 순번과 화회의 무리들도 이들의 공격을 받아 많이 잡아먹혔다. 이구는 후도 등을 쳐 멸하고 순번과 화회의 무리를 구출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각각 집을 지어주고 곡식과 같이 먹을 것도 공급해주었다. 순번 등은 밀(密) 땅에 행대(行臺)를 건설하고 승제하여 이구를 형양태수에 임명했다.

순번이 행대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하남윤 위준이 밀을 방문했다. 평소 위준의 명성을 흠모하던 이구는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야밤에 그를 만나려 하니, 그의 부하가 위준은 믿을 수 없다며 밤에 가지 말라고 조언했다. 이에 이구가 말했다.
"충신은 항상 마음을 같이 하는데, 무슨 의심이 있겠는가."
그리고는 위준과 면회했고, 위준은 먼저 와있던 다른 손님들과 함께 이구를 반갑게 맞이해 친분을 맺었다. 행사가 끝나고 이구는 여음으로 돌아와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으니,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 그에게 의지했다.

영가 5년(311년) 10월, 전조의 장수 석륵이 예주의 여러 군(郡)들을 공략했다. 석륵의 군대가 갈피(葛陂)에 주둔하고 여음군까지 공격하자, 이구는 신속히 노약자들을 산으로 대피시킨 뒤, 좌우에 명해 말과 소를 풀어놓고 인근에 매복하여 적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석륵의 병사들은 말과 소를 약탈하면서 서로 다투기 시작하니, 매복해있던 이구의 병사들은 지시를 받고 산골짜기가 울릴 만큼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석륵군을 향해 돌격했다. 이구는 적군을 대파해 수많은 적병을 사살했고 큰 피해를 입은 석륵은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태위 순번은 진동대장군 사마예에게 표를 올려 이구에게 관군장군을 더하도록 하고, 영하동·평양태수를 겸하게 했다. 또, 초차(軺車)와 당개(幢蓋)가 하사품으로 내려졌으며, 양무현후(陽武縣侯)로 진봉되었다.

대기근은 아직 현재진행형이었고 역병까지 돌아 전대륙이 흉흉했으나, 이구는 온마음을 다해 백성들을 구휼한 덕에 그가 다스리는 지역만은 평안했다. 그때 동쪽에서 도적 무리가 내려와 함부로 약탈하려 들자 이구는 부장을 보내 도적을 격파하고 그들이 약탈한 부녀자 수천 여명을 구출했다. 이구 휘하의 장수들은 여기서 구출한 부녀자들은 우리와 상관없는 타지인이니 이곳에 내버려두고 돌아가고자 했다. 이에 이구가 말했다.
"이들은 모두 국가의 신첩(臣妾)이거늘, 어찌 그리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부녀자들을 모두 거두어 영지로 돌아왔다.

건흥 2년(314년), 대장군 유곤이 임시로 임명한 하내태수 곽묵은 전조의 핍박을 피해 이구에게 의탁하려 했다. 이구는 조카 조카 곽송(郭誦)을 보내 곽묵을 영접하고자 했으나 도각부(屠各部)[2] 흉노족 부대에게 진군이 막혀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일찍이 유곤은 참군 장조(張肇)로 하여금 선비족 범승(范勝) 등 500여 기병을 이끌고 장안으로 가게 했는데, 곽묵이 전조에게 포위당하면서 길이 막히는 바람에 말머리를 돌려 소속이 지키는 염차(厭次)로 향하고 있었었다. 장조의 부대가 이구의 병영을 지날 때, 이구가 나와 장조에게 말을 걸었다.
"곽묵도 유공(劉公)의 지시에 따르고 있어, 같은 집안의 일이나 마찬가지니 함께 해주시오."
도각부의 흉노족은 선비족 기병을 매우 두려워했기에, 장조의 선비족 부대가 이구를 돕자 과연 도각부는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겁에 질려 도망쳤다. 곽송은 작은 배에 결사대를 태워서 회성으로 보냈다. 그리고 야밤에 회성을 포위한 유요의 진영을 급습하게 하니, 유요는 크게 패배하여 돌아갔다. 마침 성에 식량도 떨어져 굶어죽을 뻔하던 곽묵은 전조군이 격파당한 틈을 타 회성을 버리고 이구에게 귀부했다.

건무 원년(317년) 2월, 전조 소무제 유총이 사촌동생 유창(劉暢)에게 보•기 30,000명을 주고 형양을 공격하게 했다. 이구는 한왕고루(韓王故壘)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유창이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 두 진영 간 거리가 7리 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게 빨리 대치하게 될 줄 몰랐던 이구는 전투 준비를 마치지 못한 상태라, 유창의 진영으로 사자를 보내 술과 소고기를 바치며 시간을 벌기 위한 항복을 청했다. 그러나 유창은 진의를 의심하여 사신을 보내 이구의 진영을 살피게 했다. 이구가 정예병을 모두 숨기고 노약자들만 보여주니, 돌아온 사신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유창은 그제서야 안심하고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다.

유창은 싸우지도 않고 승리한 것을 축하하며 성대한 잔치를 열어 장병들을 배불리 먹이니 취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구는 그 틈을 타 전조의 군영을 야습하고자 했는데, 사람들은 전조군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모두 두려워했다. 이구는 곽송에게 장수와 병사들을 거느리고 정자산사(鄭子產祠)에 기도를 올리게 했다.
"그대는 과거 정나라의 재상을 지낼 적에 '악한 새는 울지 않는다'라 하였습니다. 헌데 흉악한 오랑캐와 냄새나는 갈족이 뜰을 지나는 것을 어찌 그냥 두고 볼 수 있습니까!"
곽송의 기도가 끝나자 사전에 이구의 부탁을 받은 정자산사의 무당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신령님께서 가르침을 내리시길, '너희가 나아가 싸우면 내 신병(神兵)을 보내 도우리라' 하셨다."
이를 들은 이구의 장수와 병사들은 용기가 충만해져 앞다투어 진격하고자 했다. 이구는 그 자리에서 양장(楊璋) 등 용감한 자 1,000명을 선발하여 곽송과 함께 유창의 진영을 야습했고, 술에 취해 있던 전조군은 제대로 된 반격도 못해보고 격파되었다. 이구는 적군 수천 명을 참살하고 수많은 개마(鎧馬)를 노획했다. 겨우 목숨을 구한 전조군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졌으며, 유창은 목숨만 건져 홀로 도주했다. 곽묵은 이구가 공격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 곽지(郭芝)를 보내 돕게 했지만, 곽지가 도착하기도 전에 유창은 이미 이구에게 격파당한 상태였다. 이구는 기왕에 도착한 곽지에게 군마 500필을 주고, 그와 함께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눠서 도망친 전조군 잔당을 추격해 전멸시키고 돌아왔다.

유창이 군영에 남기고 간 물품들을 정리하던 이구는 전조의 황제 유총이 유창에게 내린 조서를 발견했다. 내용인 즉, "이구를 이기면 잠시 낙양에 들러 하남태수 조고를 참살하고 장사 주진(周振)으로 하여금 그를 대신케 하라."는 명령이었다. 당시 조고와 주진은 모두 전조의 장수였으나 낙양에서 권력 다툼을 하고 있었고, 유총은 주진의 참소문을 믿어 조고를 숙청하려 했던 것. 이구가 유총의 조서를 조고에게 보내자, 조고는 주진과 그 아들을 참수하고 기병 1,000명을 이끌고 낙양을 들어 이구에게 투항했다. 이구는 조고에게 그대로 낙양을 지키라 명했다.

건무 원년(317년) 12월, 곽묵과 조고에게 명을 내려 전조를 정벌케 했다. 곽묵과 조고의 군대는 하동군을 침범해 당시 전조의 수도인 평양(平陽) 인근에 이르렀다. 평양 서쪽에 거주하던 백성 30,000여 명이 곽묵과 조고의 군영을 향해 도망치자 전조의 장수 유훈(劉勳)이 기병으로 그 뒤를 쫓아 백성 10,000여 명을 학살했다. 조고와 곽묵은 살아남은 백성만 간신히 추스려서 퇴각했다.

대흥 원년(318년) 3월, 전조의 태자 유찬, 장수 유아생(劉雅生) 등이 보•기 100,000명을 이끌고 맹진(孟津)에 주둔해 낙양을 공격하자, 조고는 낙양을 잃고 양성산(陽城山)으로 도주했다. 이구는 곽송과 곽묵을 보내 조고를 구원하게 하니, 곽송은 낙구(洛口)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상황을 살피던 곽송이 장수 경치(耿稚), 장혁(張皮)에게 정예병 1,000명을 주고 야밤에 황하를 건너서 전조군 진영을 기습하게 했다. 전조의 패구왕(貝丘王) 유익광(劉益光)이 정찰병으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 받고 유찬에게 대비하라 했으나 유찬은 듣지 않았다. 이윽고 황하를 다 건넌 경치와 장혁이 10갈래로 전조의 군영을 야습하자 전조군은 순식간에 붕괴했고 죽은 이가 반이 넘었다. 이때 경치가 노획한 병장기와 군수품이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유찬은 양향(陽鄉)으로 달아났다가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경치 등의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패잔병들을 수습해 반격을 개시했다. 유총도 태위 범융(范隆)에게 기병을 주어 유찬을 돕게 하니, 경치와 장혁은 혈전을 벌여가며 20일을 버텼다. 이구와 곽묵은 황하에 배를 띄워 군사 3,000명으로 경치 등을 지원하려 했으나, 전조군이 이미 황하 건너편을 철통같이 방비하고 있어 상륙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구는 야밤에 부장들을 강에 잠수시켜 적군 몰래 경치 등의 진영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구의 지시를 전달받은 경치는 정예 기병 1,000명을 선발하고, 남은 소와 말을 전부 찔러 죽였으며, 노획한 물자들을 모두 불태운 뒤, 포위망을 뚫고 호뢰(虎牢)로 도망쳤다. 동진의 원제 사마예는 이구에게 공이 있다 하여, 도독하남삼군군사(都督河南三郡軍事), 안서장군, 형양태수로 삼고 수무현후(脩武縣侯)에 봉했다.

대흥 원년(318년) 8월, 유총의 뒤를 이어 전조의 황제에 오른 효은제 유찬은 학정이 심했다. 이에 전조의 장수 근준은 난을 일으켜 유찬을 살해하고 이구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유연은 도각(屠各)의 작은 우두머리이며 진나라에 변란이 일어난 것을 틈타 유주와 병주에서 난을 일으켜 천명을 멋대로 들먹이고 를 유폐하여 오랑캐의 조정에서 시해하는 데 이르렀소. 항상 군사를 이끌고 재궁을 도울 것이니 이로 인해 이를 들어달라고 청하오.」
이구는 이 사실을 동진의 원제 사마예에게 알렸고, 사마예는 이 틈을 타서 태상 한윤(韓胤) 등을 보내 유총에게 피살된 회제 사마치와 민제 사마업의 재궁(梓宮)을 봉영해 오도록 했다. 그러나 한윤 일행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근준은 유요와 석륵에게 토벌당했다. 이구는 병력이 적고 힘이 약해 이렇게 번번이 큰 공을 세울 기회를 놓쳐야만 하는 현실에 개탄했다. 이후 도독사주제군사(都督司州諸軍事), 사주자사(司州刺史)에 임명되고 평양현후(平陽縣侯)에 봉해졌으며, 장군직은 이전과 같았다.

대흥 3년(320년) 2월, 전조의 홍농태수 윤안(尹安), 진위장군 송시(宋始) 등 낙양을 지키던 4명의 장수들은 각기 의심이 많고 굳은 뜻이 없었다. 이들은 전조를 배반하고 후조에 투항했지만 얼마 안가 이구에게 서신을 보내 투항 의사를 전달하니, 이구와 곽묵은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낙양으로 향했다. 하지만 석생이 기병 5,000명을 이끌고 그들보다 먼저 낙양에 도착하는 바람에 4명의 장수들은 후조에게 다시 항복했고, 이구와 곽묵은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4명의 장수들이 다시 서신을 보내 이구에게 또 투항을 청하자, 이구는 곽묵에게 보병 500명을 주고 낙양을 접수하도록 했다. 석생은 4명의 장수들이 계속 배반하는 것을 보고 낙양에 있다가는 자신도 위험해질 것이라 여겼다. 이에 송시를 겁박해 그를 인질로 삼고 다시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돌아갔다. 석생이 떠나자 낙양의 백성들은 이구에게 귀부하기 위해 남쪽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성이 텅 비었다. 졸지에 낙양의 백성들과 합류한 곽묵은 낙양성을 포기하고 백성들을 인도해 이구에게로 돌아갔다. 이구는 표를 올려 조카 곽송을 양무장군, 양적령으로 삼고 저수(阻水) 인근에 보루를 세워 둔전을 시행했다.

태녕 2년(324년) 정월, 후조의 사주자사 석생은 여러 차례 군대를 보내 하남군을 침략했지만 번번이 곽송에게 막혀 얻은 것이 없었다. 이에 석생은 분노하여 몸소 4,000여 기병을 거느리고 여러 현들에 약탈을 시도하면서 곽송이 저수에 세워둔 보루를 공격했다. 곽송이 군사를 이끌고 후조군을 요격하자 석생은 패배해 악판(堮阪)으로 퇴각했다. 하지만 곽송은 용맹한 자 500명을 선발하여 석생을 추격했고 반지고정(磐脂故亭)에서 석생의 군대를 또 대파했다. 겨우 살아남은 석생은 강성(康城)으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이구는 표를 올려 곽송의 공이 큼을 칭찬하고 길양정후(吉陽亭侯)에 봉해줄 것을 청했다.

석륵은 자신의 양자인 급군내사 석총(石悤)을 보내 궁지에 몰린 석생을 돕게 했다. 석총이 이구의 장수 곽묵을 격파하니, 곽묵은 두려워 참군 정웅(鄭雄)을 보내 전조에 항복하자 설득했지만 이구가 불허했다. 석륵은 장수 석랑(石良)에게 정예병 5,000명을 주고 이구를 다시 공격했다. 이구는 군대를 거느리고 후조군에 맞서 싸웠지만 패했고, 곽송의 아우 곽원이 후조군에게 사로잡혔다. 석랑은 이구에게 서신을 보내 곽원 석방의 조건으로 항복을 요구했다.
「작년에 우리 폐하께선 동으로는 조억(曹嶷)을 평정하셨고, 서로는 탁발의로를 평정하셨소. 형세가 이러하거늘 어찌하여 쇠뿔처럼 앞장서서 귀순하지 않는 것이오?」
이구는 대답 대신 곽송에게 그 서신을 보여주었다. 곽송이 말했다.
"과거 왕릉은 모친이 적에게 잡혔음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그 상대가 동생이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인재를 모으는 것을 워낙 좋아하던 석륵은 이 말을 전해듣고 곽송에게 사슴 꼬리털로 만든 마편(馬鞭)을 선물해 그를 회유하려 했지만 곽송은 답하지 않았다.

석생이 낙양에 둔전을 시행하고 황하 이남을 크게 약탈하기 시작했다. 곽묵과 이구는 후조군에게 자주 패하고 물자를 빼앗겨 기근에 시달리게 되었다. 곽묵이 재차 전조에 투항할 것을 권유하니, 석랑에게 패한 이후로 기세가 꺾였던 이구는 곽묵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전조의 황제 유요에게 사신을 보냈다. 유요는 흔쾌히 이구의 투항을 수락하고 사촌동생 유악(劉岳)을 보내 하음(河陰)에 둔전을 시행하면서 이구와 함께 석생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석륵은 이구에게 반격의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석륵은 먼저 석호를 보내 하음을 포위하니, 유악은 성을 굳게 닫고 감히 나가지 않았다. 이렇게 전조의 원조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곽묵과 이구는 석총에게 또 격파당해 패주했다. 곽묵이 더이상 이구에게 희망이 없음을 알고 건강(建康)으로 도주하자, 이구는 대노하여 곽송에게 그를 잡아오라 명하면서 말했다.
"너는 순망치한의 이치를 아느냐? 곽묵을 영접한 것은 모두 경(卿)에 의한 것이었으니, 재난을 앞두고 도망친 그를 반드시 잡아서 곁에 머물게 하라."
곽송은 양성(襄城)에서 곽묵을 따라잡았으나 곽묵이 처자식까지 모두 버리고 도망치면서 놓치고 말았다. 곽송은 하는 수 없이 곽묵의 처자식만 압송했고, 이구는 곽묵의 가족들에게 죄가 없다 하며 이전과 같이 대우했다. 한편, 하음에서 포위당한 유악은 지원군이 오지 않음에 절망하여 석호에게 투항했다.

이구는 자신을 따르는 장수들 중 석륵에 투항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고도 처벌하지 못했다. 이구는 영지를 버리고 동진으로 향했는데, 곽송, 참군 곽방(郭方), 공조 장경(張景), 주부 순원(茍遠), 장수 건도(騫韜), 강패(江覇), 양지(梁志), 사마상(司馬尚), 이홍(季弘), 이괴(李瑰), 단수(段秀) 등 100여 명만이 그를 따랐으며, 장사 최선(崔宣) 등 2,000여 명은 후조에 투항했다. 이구가 노양현(魯陽縣)에 이르렀을 때 낙마하여 사망했고, 그의 시신은 양양(襄陽)의 현산(峴山)에 매장되었다.


[1] 과거 조조흉노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대군(代郡)을 쪼개서 평양군으로 재편했다.[2] 흉노의 여러 부족(部) 중 하나. 유원해가 이 도각부 출신의 대선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