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1635, #002868 20%, #002868 80%, #0D1635);"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조셉 젠킨스 로버츠 | 스티븐 앨런 벤슨 | 다니엘 바시엘 워너 | 제임스 스프릭스 페인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에드워드 제임스 로이 | 제임스 스키브링 스미스 | 조셉 젠킨스 로버츠 | 제임스 스프릭스 페인 |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앤서니 W. 가디너 | 알프레드 프랜시스 러셀 | 힐러리 R. W. 존슨 | 조셉 제임스 치즈먼 |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윌리엄 D. 콜먼 | 가렛슨 W. 깁슨 | 아서 바클레이 | 다니엘 에드워드 하워드 |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찰스 D. B. 킹 | 에드윈 바클레이 | 윌리엄 터브먼 | 윌리엄 톨버트 | |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새뮤얼 케니언 도 | 찰스 테일러 | 모세 블라 | 엘런 존슨 설리프 | |
제25대 | 제26대 | |||
조지 웨아 | 조셉 보아카이 | }}}}}}}}}}}} |
라이베리아 공화국 제19대 대통령 윌리엄 바카나랏 샤드락 터브먼 William Vacanarat Shadrach Tubman | |||
<colbgcolor=#0D1635><colcolor=#ffffff> 출생 | 1895년 11월 29일 | ||
라이베리아 하퍼 | |||
사망 | 1971년 7월 23일 (향년 75세) | ||
영국 런던 | |||
재임기간 | 제19대 대통령 | ||
1944년 1월 3일 ~ 1971년 7월 23일 | |||
약력 | 메릴랜드 주 상원의원 | ||
1923년 ~ 1931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3px" | <colbgcolor=#0D1635> 배우자 | <colcolor=#373a3c,#ddd>마사 알레사 로다 프랫-터브먼 앙투아네트 루이스 패드모어 터브먼 (1948년 결혼) | |
정당 | }}}}}}}}} |
[clearfix]
1. 개요
라이베리아의 19대 대통령으로, 1944년 ~ 1971년까지 라이베리아 대통령을 역임했다.2. 생애
윌리엄 터브먼은 20세기 초까지 보호무역이 주를 이루던 라이베리아를, 재임 이후 몬로비아를 자유무역 항구로 개방하고 외자를 유치하는 등 개방경제로 전환하려 했다.또 라이베리아에 살던 토착 원주민들과 본인이 속하기도 한 트루휘그당의 기존 주요 지지층이던 아메리카 대륙 출신 라이베리안들의 갈등, 사회경제적 격차를[1]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임기를 늘리는 개헌을 하는 등 장기집권을 꾀했고, 그의 전 동맹자이자 나중에 정치적 반대자가 된 S. David Coleman과 그의 아들 John을 탄압하는 등 정적 제거에 있어 비판받기도 했다.
한편, 그의 이런 자유무역적 기조가 통했는지 집권기간 라이베리아는 경제적으로 성장기를 맞이했었다고 평가받는다.[2] 덕분에 '현대 라이베리아의 아버지'라는 일각의 평가도 받는 모양.
임기 도중 1971년 75세의 나이에 고령으로 사망했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윌리엄 톨버트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3]
3. 기타
라이베리아 20달러 지폐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