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3 22:17:43

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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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집안4. 참고자료

1. 개요

魏哲
(616 ~ 669)

당나라의 관료로 자는 지인(知人). 본적은 거록군(鋸鹿郡) 곡양현(曲陽縣).

2. 생애

위철은 641년 국자박사(國子博士)로 기용되었다. 다음 해인 642년 좌익위북문장상(左翊衛北門長上)으로 제수되었다.

646년, 유격장군(遊擊將軍), 우무후신의부(右武候信義府) 우과의도위(右果毅都尉)로 제수되었다.

657년, 모친상을 당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658년, 좌위청궁부(左衛淸宮府) 좌과의도위(左果毅都尉), 어곡부(圉穀府) 절충도위(折衝都尉)를 역임했다가 대책에서 갑과로 급제하여 좌기위낭장(左騎衛郞將)으로 제수되었다.

659년, 철륵도행군총관(鐵勒道行軍總管)으로 제수되어 철륵을 정벌하고자 출병하였다.

664년, 좌효기중랑장(左驍騎中郞將)으로 제수되고 뒤에 검교우감문좌무위장군(檢校右監門左武衛將軍)으로 제수되었다.

666년, 당고종을 따라 태산(泰山)에 이르러 봉선대전(封禅大典)을 거행했으며, 그 후에 명위장군(明威將軍)이 더해졌다. 이때 고구려에서는 대막리지로 실권을 휘둘렀던 연개소문이 죽은 뒤 장남인 연남생이 대막리지의 지위를 이었지만 연남건, 연남산 형제와의 권력싸움에서 패배하여 축출되고 당나라로 망명하였다. 당나라의 고종은 고구려가 혼란에 빠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켰으며 이때 위철은 요동도행군총관(遼東道行軍總管)으로 임명되었다.

667년, 위철은 상주국(上柱國)이 더하여져 무관으로서 최고위직에 훈급(勋级)되었으며, 초대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로 제수되었다.

668년, 고구려 평정 후에 평양(平壤)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관사(官舍)를 설(設)하였다.

669년, 3월 16일(음력) 평양 안동도호부 관사에서 병사하였으니 향년 54세이다. 사후 좌감문장군(左監門將軍)으로 추증되었다. 사후 안동도호의 직위는 설인귀가 맡았다.

3. 집안

위철의 7대조 위정비(魏靖非)는 전진에서 정북대장군(征北大將軍)을 지냈고 북지(北地)와 상군(上郡)에 진수했으며 훗날 위정비의 자손들이 영주(寧州) 양악현(襄樂縣)으로 옮겨 살았다. 위철의 할아버지 위당(魏唐)은 수나라에서 천수군승(天水郡丞)과 하양도위(河陽都尉)를 역임했으며 위철의 아버지 위보(魏寶)는 당나라에서 통의대부(通議大夫), 총관부(總管府) 사병참군(司兵參軍)을 역임했다.

4.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