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22:30:46

우맹모


사마진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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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동진 원제의 황후
원경황후 | 元敬皇后
출생 277년
서진 제양군 외황현
(現 허난성 상추시 민취안현)
사망 312년 (향년 35세)
능묘 건평릉(建平陵)
재위기간 서진 낭야왕비
290년 ~ 3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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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본관 (虞)
맹모(孟母)
부모 부친 평산현후 우예
(平山縣侯 虞豫, ? ~ ?)
모친 운양현군
(雲陽縣君, ? ~ ?)
배우자 중종 원황제
자녀
양자 2남 [ 펼치기 · 접기 ]
1남 - 사마소(司馬紹, 299 ~ 325)
2남 - 사마부(司馬裒, 300 ~ 317)
작호 낭야왕비(琅邪王妃)
→ 왕후(王后) → 황후(皇后)
시호 원경황후(元敬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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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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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산현후(平山縣侯) 우예의 딸이자 동진의 추존 황후로, 동진의 초대 황제 명제 사마예의 정처였다. 사마예가 황제에 오르기 전에 죽는 바람에 나중에 황후로 추증되었다.

2. 생애

아버지가 명사라 어렸을 적부터 문장을 익혀 이치에 능통했으며, 어진 성정을 가졌고 미모까지 빼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성년이 되기도 전에 양친이 사망해 집안 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그러다 우연히 낭야왕이던 사마예와 만나는 일이 있었는데, 사마예는 그녀의 미모와 총명함에 감탄하며 바로 청혼을 했고, 우맹모를 왕비로 맞았다.

우맹모와 사마예 사이에선 어째서인지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사마예의 총애를 받던 궁녀 순씨가 사마소사마부를 낳자, 우맹모는 순씨를 질투해 그녀를 무척 괴롭혔다. 지위가 미천했던 순씨는 앞에서는 순응할 수밖에 없었으나, 우맹모를 원망하는 마음이 매우 커 뒤에서 그녀에 대한 험담을 자주 늘어놓았다. 얼마 안가 순씨의 뒷담화는 사마예에게까지 전해졌고, 사마예는 크게 노해 그 날부터 순씨를 점점 멀리 하였다. 이후로 순씨에게 정이 완전히 떨어져버린 사마예는 순씨를 자신의 마부에게 시집보내고, 사마소, 사마부 형제 양육을 우맹모에게 맡겼다. 비록 우맹모는 그들의 생모가 아니었으나 친자식처럼 여겨 정성을 다해 길렀다.[1]

312년, 35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6년 뒤인 318년, 황제에 오른 사마예는 우맹모를 황후로 높였고, 그로부터 또 2년이 지난 320년에는 그녀에게 경황후(敬皇后) 시호를 내렸다. 당시 사마예는 태묘에 제사를 지내고, 우황후의 관을 건평릉으로 이장시키면서 그녀를 그리워했다. 참고로 사마예가 우맹모 사후 다른 황후를 두지 않았던 걸 보면 그녀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323년, 사마예가 죽고 사마소가 황위를 이었다. 사마소는 아버지의 시신을 우황후가 묻혀있는 건평릉에 합장해주고, 자신을 양육해준 우황후의 은혜를 항상 감사히 여겼다고 한다.

3.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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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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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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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도 사마소는 자신의 생모는 잊지 못했는지, 훗날 황제에 오르고 나서 순씨를 건안군군(建安郡君)으로 추존하고 일개 궁녀에 불과했던 어머니의 신분도 후비로 높여주었다.